오늘 자 <한겨레>의 김규항 칼럼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다. 교활하면서도 어리석은 우리. 우리에게 희망은 있기나 한걸까? 

왕들의 구멍 


엠앤엠(M&M) 대표인 최철원이 제 회사 직원들 앞에서 저보다 열두 살 많은 노동자 유홍준씨를 한 대에 100만원씩 야구방망이로 때렸다. 유씨는 자기 트럭을 가진 사업자지만 실제론 고용되어 일하는 이른바 ‘특수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다. 최는 유씨의 탱크로리 값과 맷값으로 7000만원을 지급했는데 교활하게도 이미 열흘 전 유씨를 상대로 7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해놓았다. 최의 패악질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다. 그 집안인 에스케이(SK) 불매운동도 벌인다. 그러나 과연 최철원이 한국에서 가장 포악하고 잔인한 자본가일까? 대법원 판결조차 무시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공장에 가두어놓고 교섭조차 거부하는 정몽구보다?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노동자의 산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이건희보다?

오늘 한국의 대자본가들은 마치 왕이라도 된 듯 인륜도 법도 무시한 채 포악하고 잔인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노동자에 대한 야만적인 폭력이 허락되고 그에 항의하는 건 죽음을 무릅쓰는 일이던 군사독재 시절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걸까? 촛불시위에서 충분히 드러났듯 이제 한국인들은 군사독재 수준의 억압은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 시민의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왜 박정희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이런 야만적인 일들이 벌어질까? 그것은 오늘 우리의 시민의식에 어떤 구멍이 있음을 알려준다.

정치적 악행엔 저항하면서도 자본의 악행엔 그리 저항하지 않는, 이명박의 악행에 대해선 들고일어나지만 정몽구나 이건희의 악행은 결국 방치하는 구멍 말이다. 그 구멍은 왜 생겼을까? 시민들은 왜 정치적 시민의식에 걸맞은 자본에 대한 시민의식을 갖지 못했을까? 물론 그 주요한 사회적 배경은 1997년 구제금융 사태 이후, 즉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래 진행된, 자본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변화일 게다.(우리가 ‘얼마나 좋은 대통령이었는가’ 추억하는 노무현 대통령 집권 동안에만 983명의 노동자가 구속되었는데 2006년 한해 구속자 중 91%가 비정규직이었다.) 그 기간에도 정치적 시민의식은 계속 발전했지만 자본에 대한 시민의식, 즉 시민의식의 구멍 또한 더욱 커졌다.

우리는 정몽구와 이건희를 욕해도 잡혀가지 않는 시민의 권리를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정몽구와 이건희를 부러워하는 내면을 갖게 되었다. 현대와 삼성을 욕하는 우리는, 동시에 그곳의 머슴인 조카와 자식을 짐짓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한국의 진보적인 사람들이 흠모하는 급진적 생태주의자 스콧 니어링처럼 대자본가의 머슴이 된 아들과 절연까지는 않더라도, 좀더 잘 먹고 잘살고 싶은 욕심에 저 짓을 한다는 불편함은 가질 만도 한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정몽구와 이건희는 바로 그 구멍을 통해 왕으로 등극했고, 왕족의 일원인 최철원은 천한 것들을 손수 매로 다스린다.

우리는 이 빌어먹을 왕들의 세상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막막하지만 분명한 한가지는 그 구멍부터 막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욕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부러워하는 우리 내면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가장 치열한 전장은 역시 교육이다. 한국 부모들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짜리’가 될 것인가에 몰두한 역사는 그 구멍의 역사와 일치한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고민이 남아 있지만 양보할 수 없는 첫째 고민은 역시 ‘얼마짜리’인가다. 우리는 그 구멍을 막을 수 있을까? 막는다면 정몽구와 이건희와 최철원은 여전히 왕처럼 호의호식할지언정 적어도 우리 앞에서 왕 노릇은 하지 못할 것이다. 막지 못한다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권위와 영화가 한층 더해진 왕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살 것이다. (한겨레)/김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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