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처음 낸 휴가였다. 간만에 찾아온 여유로운 평일이었기에 집에만 있기엔 시간이 아까웠고 알찬 휴가가 되어야 한다(!)라는 강박에 점심을 서둘러 해치우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우선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피해 한가로운 시네마테크로 가서 영화 한편을 보기로 했다.(수도 세올의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가 시네마테크가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무채색의 강렬함(!)"이 느껴진다는 네이버 영화평을 보고 미하넬 하네케의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하얀 리본>을 보고 싶었으나, 시간대가 맞지 않아 노근리 사건을 다룬 <작은 연못>을 보기로 결정. <시네코드 선재>로 향했다.  


 

 

 

 

 

 

 

 

 

역사의 적은 망각이라고 했던가. <노근리 사건>(1950년 7월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 있었던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의 적은 망각이 분명하지만, 이 망각은 거대 권력의 은폐로 인한 강요된 망각이었다.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60년이 지나서야 AP의 탐사보도 끝에 밝혀졌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위해 아파하지 않으며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명백하고도 잔혹한 진실을 수용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확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비극을 만든 주체가 우리를 공산당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준 미국이었기에. 우리의 형제인 미군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었기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 혹은 근현대사의 반민주 독재세력에 의해 벌어졌다면 이렇게 쉽게 잊혀졌을까라는 의문이 머리 속에 떠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사건의 희생자들과 유가족의 한이 한꺼번에 밀려와 가슴이 뜨거워졌다.

영화 시작 전 결말을 미리 알고 보는 영화는 지루하다. 특히 그 결말이 등장인물(특히 주인공인 경우는 더욱이)의 죽음이라면 (결말 직전의) 영화 Context의 탄탄함과는 상관없이 그 영화 관람은 그 자체로 실패다. 이러한 이유로 <노근리 사건>의 비극성을 미리 알고 있던 나는 영화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영화는 예측가능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 울림의 이유는 그 안에 감정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사의 비극을 전달하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노개런티로 출연한 수많은 영화배우들과 (수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영화를 제작한 스태프들의 감정과 진심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화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는 "감정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역사란 사실로서의 의미를 잃게 된다"고 말했다. <노근리 사건>은 AP의 탐사보도로 가까스로 세상에 나왔지만 이제서야 비로소 <작은 연못>이란 영화로 새 생명(감정)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노개런티로 출연/제작한 배우들과 제작진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며 많은 관객들이 나와 같은 큰 울림을 느낄 수 있도록 재개봉 또는 상영관 확대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ps. 잊혀진 역사의 가슴 아픈 진실을 좇는 이런 영화에 조차 이념의 색깔을 덧칠하고 불순한 의도를 찾고자 노력하는 인간(조직)이 있다면 그(그들)가 바로 괴물이다. 홍상수 말대로 사람은 못 되도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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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06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개봉할것 같지 않은 상영관에서 웬일로 개봉해서

봤던 기억이 나네요 ^^

에로틱번뇌보이 2010-12-1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참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어요~이런 영화가 여러 군데에서 상영을 해야 하는데 말이죠ㅠ

다이조부 2010-12-12 23:20   좋아요 0 | URL


네이버 에 영화관련 카페에 가입했는데 이렇게 규모가 작은 영화를

주로 같이 감상하는 동호회입니다 관심있으면 한 번 들려보는것도.....

에로틱번뇌보이 2010-12-1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카페명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제가 인디영화에 관심이 많아서요~

다이조부 2010-12-15 07:12   좋아요 0 | URL


다음 영화는 뭐죠?


언니네이발관의 노래제목에서 따왔다네요 ㅋ

에로틱번뇌보이 2010-12-15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언니네 이발관에 그런 노래가 있었군요(저는 마이앤트메리를 더 좋아합니다 ㅋㅋ)~

얼른 가서 가입해야겠습니다~

다이조부 2010-12-15 15:12   좋아요 0 | URL


닉네임이 기대되는군요~ ㅋ 설마 여기서 쓰는 닉네임을 거기서도 ㅎㅎ

저는 동일 닉 쓰니까 반갑게 인사해요 ㅋ

마이앤트메리 앨범 저스트 팝은 정말 좋긴 한데 저는 그 친구들 인간이

싫어요 ㅋㅋㅋㅋ

에로틱번뇌보이 2010-12-15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아이디 똑같이 만들었다는 ㅋㅋ
어찌 그렇게 좋은 카페를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는지~

2010-12-16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7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