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운동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2
이성재 지음 / 책세상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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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운동은 1960년대 후반 유럽, 아메리카, 동유럽, 일본 등지에서 권위주의 타파, 기성 질서에 대한 거부 그리고 새로운 창의성과 상상력의 확대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개된 역사적 사건을 의미한다. -12쪽

1968년대 초에는 1964년보다 실업자가 네 배나 증가했으며 그중 절반이 25세 이하의 청년들이었다. 이와 함께 기존 좌파 정당에 대한 실망 또한 68운동의 원인이었다. 당시의 좌파 정당들은 겉으로는 혁명을 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떤 변화도 바라지 않았다. 노동조합 역시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노동귀족화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22쪽

이미 1966년부터 학생들의 정치의식은 매우 고양되고 있었는데 그 기저에는 미국의 명분없는 베트남 전쟁이 있었다. 68운동 당시 마오쩌둥,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호치민같은 제3세계 혁명가들에 대한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23쪽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와 영국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학과 사회의 권위주의에 저항했으며, 체 게바라와 호치민은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32쪽

1967년에는 상황주의자 라울 바이네겜이 <일상생활의 혁명>을 펴내고 새로운 폭동의 물결이 젊은이들을 서서히 결집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네이겜은 정치 체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변혁이 진정한 혁명임을 강조했다. -34쪽

마침내 3월 22일에 학생들의 저항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날 낭테르에서는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그 전날 대학생 8명이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항의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무실을 습격하고 미국 국기를 불태운 죄로 체포되었다. 다네엘 콘 벤디트와 학생들은 대형 강의실을 돌며 학생을 모았고 대학 본부를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바로 3월 22일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프랑스 68운동의 기원으로 본다. -36쪽

상황주의자(situationnists) : 다다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은 아방가르드 예술가, 지식인모임에서 출발했으며, 권태를 타파하려 했으며, 특히 인간의 창조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당하고 있다고 보고 일상의 혁명을 통해 인간 소외를 극복하려 했다. 1970년대 초에 내부 분쟁으로 해체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기 드보르와 라울 바이네겜이 있다. -27쪽

피에르 부르디외 : 프랑스와 사회학자로 후기 구조주의 입장에서 구조와 행위의 관계를 설명했다. 특히 아비투스 개념을 통해 사고,행동, 감정표현 등을 생활양식을 계급이 아닌 제도와 문화 차원에서 분석했다. 실업자 운동, 문명 파괴 반대 운동에 참여했으며, 범세계적인 지식인 연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대표적인 저서로 <구별짓기>, <호모 아카데미쿠스>, <텔레비전에 대하여> 등이 있다. -42쪽

68운동의 강점이자 약점인 무정향성과 무조직성은 내부 분열을 가져왔다. -45쪽

"섹스를 해, 전쟁을 하지 말고(make love, no war)"-56쪽

하르베르트 마르쿠제 :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신좌파 사상가로 68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였다. 헤겔,마르크스,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산업 사회가 인간에게 물질적 만족을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인간의 사상과 행동 체게 안에 완전히 내재화해 변혁의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주요 저작으로는 <에르스와 문명, <일차원적 인간>, <반혁명과 폭동> 등이 있다. -59쪽

영국의 사회학자 에릭 홉스봄은 1960년대 후반에 일어난 학생들의 시위를 보면서 "처음으로 세계가, 아니 적어도 학생 이념가들이 살던 세계는 참으로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고 말했다. -68쪽

그의 말처럼 이 시기에 로마, 파리, 베를린, 함부르크, 프라하, 도쿄 대학가에서는 동일한 담론이 퍼져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하게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난 68운동에서 학생들은 기성의 권위주의에 저항했으며 전체주의와 전쟁에 반대했다. 또한 소비사회를 비판하고 욕망의 해방을 주장했으며, 낡은 세계에서 소외되었던 흑인과 여성, 사회적 소소자의 권익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현대 사회의 제반문제를 포괄했다. -68쪽

"파괴의 열정은 일종의 창조적 희열"이라는 러시아의무정부주의자이자 혁명가 바쿠닌의 말을 상기했다.-72쪽

"혁명적 사고란 없다. 오직 혁명적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내일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가 오늘의 권태를 보상하지 못한다"-75쪽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30년대 이후에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에 참가한 학자들을 말한다. 제 2차 세계대전 이전 세대로는 막스 호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발터 벤야민, 에리히 프롬 등이 있으며, 전후 세대로는 위르겐 하버마스와 알프레드 슈미트 등이 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사상을 통합하고자 했으며, 1932년에 기관지 <사회 연구>를 창간했다. 그러나 나치의 탄압에 해외로 망명했다가 1950년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활동을 재개했다. 이들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비판 이론'이라고 불리지만 통일성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인간 이성의 능동성, 자율성, 창조성을 통해 현대 소비사회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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