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의 천명관이 장편을 들고 돌아왔다. 그의 작품 목록 전체로 보면 <고래>와 <고령화 가족>사이에 <유쾌한 하녀 마리사>라는 단편집이 있었지만 그의 영화같은 이야기를 펼쳐내기에는 단편은 부적합한 면이 있었으며 그래서 무엇보다 그의 장편소설이 반갑다. 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소설은 핍진성이 뛰어난 동시에 양감있는 플롯이 한편의 시나리오를 소설로 각색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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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비현실적인 소재와 배경을 통해 어디에선가 실제 있었음직한 양감이 느껴지는 에피소드로 독자를 매료시켰던 <고래>와는 달리 <고령화 가족>은 너무나 끔찍하게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판타지스러운 소설이다.
<고령화 가족>은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이지만, 사실 가족 소설이라기 보다는 가족이라는 소재를 통해 약자들이 살아가기엔 너무나 부조리한 현실을 꼬집은 풍자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단 한번의 기회였던 데뷔 영화의 흥행 실패로 영화판을 떠날 수 밖에 없던 주인공 <나>, 공고를 졸업하고 양아치 짓을 하다 감옥에 들락거린 실패한 깡패, 형 <오함마>, 술집작부로 살아가는 여동생 <미연>,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어 학교에서 소외받는 조카까지. 이들에겐 동일한 피가 섞였다는 공통점(사실 이들 가족 관계는 얽히고 설켜있어 피가 전부 동일하지도 않다) 이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양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사회적 다윈주의 시스템 하에 낙오한, 실패한 인생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그들이 적을 두고 있는 각 분야를 대표하는 '루저'들이다.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에게 'One More Time'을 허락하지 않는 야만성을 가진 한국사회에 이들을 위한 또 한번의 기회와 최소한의 생계 보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사회적 시스템 내에서는 더 이상 기댈 곳 없는 이들이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종착지는 그들의 출발지였기도 한 엄마의 집 뿐이다.
집이란 공간, 가족이란 공동체야말로 사회적 다윈주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양육강식이란 투쟁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마지막 남은 요새가 아닐까?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이기려고 눈을 부라리지 않아도, 남에게 질타받지 않으며 멸시당하지 않는 유일한 공간인 것이다. 심지어 그곳에는 언제나 풍성한 한상 차림 엄마표 '뜨신 밥'까지 먹을 수 있다. 마치 이들에게 집이란 과거 삼한시대에 천군의 제사를 주관하여 범죄자가 도망가도 잡으러 들어올 수 없는 신성한 지역인 '소도'와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물론 누구에게나 집이란 공간이 '소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란 답답한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이도 있으며, 벗어난 이들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그곳을 벗어나려 애써도, 벗어났다 해도 우리는 언젠가는 또 다른 공동체를 꾸리고 '집'이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또 다시 가족이란 이름으로.
ps. 이번 소설의 또 다른 재미는 헤밍웨이, 캐스린 비글로 등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문학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보는 것이다. 소설가이면서 여전히 영화감독을 꿈꾸고 있는 저자의 이력답게 문학과 영화의 다양한 소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이 으뜸이다. 곁다리 지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문학과 영화의 소재를 통해 매끄러운 플롯을 풀어갔던 장정일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가 읽는 내내 떠올랐던 건 아마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