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보낸다 장정일 문학선집 2
장정일 지음 / 김영사 / 2005년 10월
품절


우리 사회에서 문학적이 된다는 게 뭘 뜻하는지 알아? 그건 나약함, 겁쟁이, 패배자 같은 어감을 풍기지. 그래서 이런 구절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얕보이는 꼬투리가 된단 말씀이야... 나느 오늘 같은 일로 여행을 할 기회가 많은데 절대 비행기 속에서나 기차 속에서 소설을 보지 않아. 그건 '나 병신이오' 하는 광고와 같은 거니깐 말이야. 실제로 소설이나 시집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면 경멸하고 싶거든. 추리소설이라면 또 다르지만 말이야. -86쪽

창녀인 나의 어머니가 나를 죽였어요!
건달인 나의 아버지가 나를 먹었어요!
내 어린 동생이 뼈를 주워서 시원한 곳에 묻어주었어요.
그래서 나는 예쁜 숲 속의 새가 되어 날아갑니다! 날아갑니다!

죽은 새, 날개를 지닌 채로
죽은 새. 불쌍한 것들
땅 위에 죽어 있다니,
움직이지 않는 날개를 지닌 채, 땅 위에 가련한 것들
죽은 새, 움직이지 않는 날개를 지닌 채.
저 푸른 창공 대신에 이 땅 위에 누워 있다니!-96쪽

이 시인은, 시쓰기나 우표수집이나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감히, 나는 모든 '열망(욕망)' 간의 등가를 말한다. 우표수집이 하찮은 것이라고 말하는 건방든 시인들에게 그는 너의 시쓰기도 하찮은 것이라고 말한다. 위대한 시를 썼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 거라면 당신의 시쓰기란, 스토크북 속에 없는 희귀 우표를 구해 꽂는 우표수집가 다를 게 뭐 있는가? 희귀 우표를 찾았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듯이, 위대한 시를 썼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차라리 우표수집가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희귀 우표를 구하기 위한 노력을 본받아야 한다. -135쪽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계산된 세계, 그리고 권태만이 지배하는 세계, 감정이나 욕망이 개입되어선 안 되는 세계. 거기엔 모든 것이 근무규정과 사규로 지시되어 있고 제한되어 있어. 어떤 문제든 미리 준비된 해답 속에 해결되어 있는 세계. 이런 세계에서는 눈물을 흘리거나 혀를 내밀어도 안 돼. 그 세계는 수정으로 되어 있고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도록 서계되어 있어. 그런 세계가 있느냐구? 수정궁이 있느냐고? 바로 내가 수정궁의 국민이야. 국민일 뿐이야. 주인이 아니지.-170쪽

현대의 독자는 소설읽기에서 무엇을 구한다고 생각하나? 당신은 독자가 없더라도 글을 쓰겠는가?

- 오늘날의 사회에는 아주 강력한 종교가 없고, 사회계층의 견실한 체계도 없으며 사람들은 그들이 작은 한 부분을 이루는 커다란 조직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떤 소설들을 읽는다는 건 그들에게 옆집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려고, 즉 똑같은 열등감과 똑같은 죄악과 똑같은 유혹을 겪는지 보려고 열쇠구명으로 들여다보는 행위와 약간 비슷한 데가 있다. 이것이 오늘의 독자가 소설에서 추구하는 바다. 나 자신을 위해서, 밤이면 밤마다, 난 그것을 출판되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쓸 수도 있다.-188쪽

나이 든 남자가 영계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의 신화야. 암, 신화지. 원시인들을 지배한 사유법칙은 모두가 유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황금가지]에서 프레이저가 밝혔듯이 아주 단순한 '동종법칙'과 '감염법칙'이야말로 원시인들의 사고축이지. 동종법칙에 따라 그들은 형상이나 성질이 비슷한 것은 서로 똑같은 효과를 가졌다고 믿었고, 감염법칙에 따라 어떤 사물을 만지면 그것과 똑같은 성질이 자신에게로 옮겨 붙는다고 생각했어. 이런 생각은 곧바로 어린 계집아이를 껴안으면 그 아이의 젊음과 활력이 늙은 노인에게 옮겨와 회춘할 수 있다고 믿게 했지. 세계 여러 나라의 고문이나 전설에서 돈 많은 노인이 어린 여자아이를 사서 품에 안고 자거나 의붓딸을 끼고 자느 이야기가 드물지 않게 보이는데 학자들은 그것을 '동기설화'라고 불러. '동기'란 요샛말로 하자면, 영계지. 하긴 요즘엔 영계라는 표현 대신 계란이란 표현을 쓰지만.-209쪽

이 씹새야. 독후감을 다시 고쳐써서 보내라고 했더니, 뭐...후쿠야마이 말처럼 거대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는 마당이라면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자체가 모순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쿠야마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려는 부르주아들의 심정은, 우리의 '마음 속에 든 없어지지 않는 공산주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안정과 복지, 민주를 먼저 선취한 쪽에서 통일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제안에 비추어 볼 때 불법사찰과 고문, 감금 등등의 반민주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남한 정부가 통일의 주도권을 온전히 거머쥐기 위해서는 군정 종식과 공안정치가 사라져야 한다고?-228쪽

문학과 작가를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 나는 작가가 된다는 것, 혹은 글을 쓴다는 것이 아주 못되어먹은 사회분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깐 현대사회가 기능적이고 효율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내버린 도덕이나 윤리 따위를 작가들이 맡아 간수하고 있는 셈인데, 그건 쓰레기를 치우는 일과 같다. 나는 이 쓰레기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마음이 편한 사람들도 있다. 하긴 쓰레기를 태우면 연기가 나고 냄새도 나는데, 그 때문에 눈물을 쏟는 사람도 있고 가슴을 저리는 이도 있다. -358쪽

문학이 사회를 변화, 혹은 변혁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무엇이며, 작가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 문학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흑마술이며 작가가 사회의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믿음은 그들의 자아도취다. 문학이나 철학 등은 항상 현실을 사후적이고 선택적으로 반영할 수 있을 뿐, 그것이 사회를 변화시켜 왔다는 믿음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예를 들면 고리키의 [어머니]와 러시아 혁명, 스토 부인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미국의 남북전쟁 사이에 아무런 인과성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소설가들에 대한 일반인의 통념은 그들이 거짓말쟁이들이며 난봉꾼 집단이라는 정도지. 결코 작가들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시대나 사회의 선구자라고 생각지 않는다. -360쪽

구성이란 인물과 인물 간이나 사건과 사건 간, 혹은 인물과 사건 간의 연관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도색소설에서는 구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구성이 아예 없는 듯이 여겨진다. 도색소설이란, 아주 순수한 관점에서 '더 많은 교접'을 보여 주기 위해 씌어지기 때문에 도색소설의 작가는 '더 많은 교접'을 위해서 사건과 인물을 방사선적으로 증식하려는 강력한 유혹을 벗아나기 힘들다. 또 도색소설은 오로지 '교접'만이 사건의 전개축이 되고 동기가 되기 때문에 도색소설에서 묘사되는 모든 만남은 '교접'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안되는 한정된 조건을 안고 있으며, 도색소설의 등장인물은 그가 왜 이 소설에 등장해야 하는 뚜렷한 이유를 알고 태어난다. 예를 들어, 사드의 소설 <소돔 120일>을 보자. 이 소설이야말로 너무 구성이 많기 때문에 구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도색소설의 원형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백여 명의 등장인물은 서로 '교접'을 하기 위해 주어진 '무제한적이고 방사선적 구성'에 의해 촘촘히 연관되어진다.-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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