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장이 정도 이상으로 화를 내고 있는 것도, 실은 청소는 미뤄둔 채 러브체어 위에
올라앉아 있던 그녀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그와 똑같은 자세로 사장이 그 위에
올라앉아 있었을 때, 그녀가 터뜨렸던 웃음소리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나 한번 가슴속으로 고여들기 시작한 웃음의 충동은 이미 속수무책이었다.
어금니까지 앙다문 윤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이봐, 아줌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사장이 기어코 책상 위를 손바닥으로 쾅 내리쳤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윤의 앙다문 입술 사이에서 기어코 으흑, 하고 울음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뭐야? 아줌마, 우는 거야?"
사장이 놀란 듯 목소리를 낮춰 물었으나, 느닷없이 쩔쩔매는 듯한 사장의
그 목소리는 윤의 웃음보에 불을 질러버렸다.

으흑, 했던 그 소리가 울음소리가 아니라 웃음소리였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삽시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사장이 책상 위의 무언가를 집어던지는가 싶더니
윤의 뒤쪽에서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알프스 산의 풍경화를 담고 있는 거대한 액자가 산산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곳, 지구  반대편의 산과 구름과 하늘은,
순식간에 잘게 깨진 유리조각이 되어버렸다.

윤은 전철을 타고 종점까지 갔다.
그 종점에서 다시 표를 끊어 또다시 전철에 올라탔다.

사장실에서 쫓겨나온 후, 윤은 다른 직원들의 충고대로 잠시 사장의 눈을 피해 있기로 했다.
세탁실이나 청소원 대기실에 숨죽여 있더라도 사장이 일부러 그녀를 찾아다닐 일은
없겠지만, 일단은 모텔 밖으로 나와 있는 게 좋겠다 싶었다.

사장의 화가 어느 정도 풀리기까지를 기다려 그녀는 사장에게 잘못을 빌 작정이었다.
그녀는 돈을 벌어야 했고, 그럴려면 일자리가 필요했고,
무엇보다도 잠자리가 제공되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모텔에서 쫓겨난다면 당장 그녀에게 갈 곳이라고는 집밖에 없었다.
남편이 누워있는 집, 늙은 시어머니가 지키고 있는 집...

그녀에게 집은 '돌아가야 할 곳'이었다. 그녀가 돌아가지 않고 있는 한은 언제든지.
그러나 돌아가는 순간부터는 집은 '떠나야할 곳'이 되었다.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떠나야 할 곳.

떠나서는 다시 돌아오지 말아야 할 곳...
그러나 윤에게는 아주 떠나야 할 곳 같은 데는 없었다.

윤에게는 친정이라 이름 붙일 만한 데가 없었다.
부모는 그녀가 어려서 세상을 떴고,
그녀를 보살피던 할머니도 그녀가 어른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세상을 버렸다.

남편을 만나기까지 그녀는 늘 혼자였다.
남편이 그녀에게 청혼했을 때, 그녀가 감동했던 것은 사랑한다는 말도 아니고
널 위해 평생 살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살자.
남편에게서 그 말이 떨어지지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짐을 쌌다.
우리집, 남편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녀에게도 집이 생긴 것이었다.
내 집, 내 방이 아니라 우리 집, 말이다.

여보, 그날이 생각나네.
우리 집의 문을 처음 들어서던 날..
나는 당신이 내게 말했던 우리 집이란 게 그렇게 낡고 누추하다는 데에 놀라
입이 그만 딱 벌어졌었지.

손바닥만 한 마당에는 철사줄로 엉겨놓은 풀라스틱 함지박에 구정물이 고여 있고,
그 바로 옆에는 온갖 고철덩어리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고,
무슨 사과궤짝들은 그렇게 많았을까...

그 사과궤짝 속에는 10년 20년도 더 되었을 것 같은 신발들이 가득 들어 있었지.
당신 어머니는 무엇이든 내다 버리지를 못하는 사람이라,
그 좁은 마당은 쓸모없는 물건들의 쓰레기장 같아 보였어.
정말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니까.

겨우 두 칸뿐인 방은 오죽했을까.
벽지는 비얼룩으로 젖어 다 일어나 있고,
그 틈틈으로 쏟아져 내린 쥐똥들이 무더기였어.

방 안에도 사과궤짝들이 있었지.
한 궤짝 안에는 양말, 또 한 궤짝 안에는 속옷, 또 한 궤작 안에는 바지, 이런 식으로.

어머니는 살림과는 영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
설거지한 그릇하고 수저조차도 가지런히 놓치를 못하는 양반이었으니까.

방 닦은 걸레도 마당의 더러운 함지박 안에 툭 던져놓고 한나절이나 잊어버리고 있고,
반찬그릇 덮는 뚜껑도 한번 제대로 귀 맞춰놓는 걸 못 봤으니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당신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느라,
평생 바깥일만 했지 집안일에는 시간 팔 겨를이 없었던 양반이라고,
당신이 변명처럼 말을 할 때 어머니는 도끼눈이 되어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

당신 알아? 그날, 내가 우리 집엘 처음 가던 날,
당신이 잠깐 화장실에 가고, 내가 쭈뼛쭈뼛 어머니를 도울 양으로 부엌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내 팔뚝을 할퀴면서, 난데없이 "요년!"이라고 소리를 쳤어.

당신에게 말을 하지 않았던 건, 내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냥 단 한 번 "요년!" 그 소리 뿐이었으니까.

팔뚝의 할퀸 자국도, 아마 어디서 이미 생겨난 것일 거라고 난 그냥 그렇게 믿어버렸지 뭐야.
그러나 놀란 마음이 가시지를 않아서 우리 지에서 처음 먹던 밥,
나는 그만 국그릇을 엎어버렸지.

여보, 그래도 난 그날 얼마나 행복했던지..
결혼식도 안 올리고, 혼인신고도 안 하고, 심지어는 인사 한번 제대로 안 올린 시어머니
사는 집을, 거기가 이제부터 우리 집이라고 짐부터 싸가지고 들어가던 날,
여보, 나는 그래도 얼마나 행복했던지..

당신 기억나? 그날 밤, 여인숙도 여관도 아닌 우리 집 방에서,
그래도 이불 하나는 정갈했던 방 안에서 당신 품에 안겨 내가 했던 말...

몸은 다 죽었어도, 정신은 나날이 맑은 당신, 기억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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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하면 떠오르는 꽃이 장미입니다.

5월이 계절의 여왕이라서 그럴까요?

풍성하고 아름답고 정열적인 5월이 되어야할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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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5-01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예쁘네요. 장미꽃 선물 받는 느낌이예요. 감솨!^^

motoven 2004-05-03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으로 받으셨다니 제가 오히려 감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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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4-04-29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때는 정말이지 빛나는 별이었던......

motoven 2004-04-30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의 지난 추억을 밝혀줬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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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체어가 각 객실에 배치된 이후, 청소원들은 걸레 하나씩을 들고
그 새로운 물건을 깨끗하게 닦기 위해 각 객실로 들어갔다.

트럭 기사의 말처럼 설명서가 한 장씩 붙어 있었다.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가 그 물건 위에 올라앉아 연출할 수 있는
각종의 체위를 그려놓은 그림 설명서였다.

윤은 옆방에서 울려오는 다른 청소원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 그림 속의 체위들을 살펴보았다.

사장 앞에서 멈추지 못하고 웃던 때와는 다르게,
윤의 얼굴에서 부드러운 미소 같은 게 퍼졌다.

그림들은 기괴하게 보이는 대신 유쾌하게 보였다.
윤은 걸레를 바닥에 내려놓고 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러브체어의 여기저기를 툭툭 두드려보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올라앉아 무슨 요동질을 치든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해야 할 물건이었다.

툭툭 두드려보다가 어깨에 억센 힘을 주고 물건의 받침대를 꾸욱 눌러보기도 했다.
러브체어는 한 여자의 팔힘 정도는 능히 받아낼 수 있다는 듯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도 불안한 것처럼 윤은 조심스럽게 체어 위에 한 발을 올려놓아 보았다.
꿋꿋했다. 마치 오래전 남편의 허벅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윤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한 발이 마저 체어 위에 올라갔고, 잠시 후 그녀는 받침대에 등을 기대고
두 다리를 넓게 벌려 발판 위에 올려놓았다.

편안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윤은 그렇게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코를 킁킁거렸다.
어디선가 복숭아 냄새가 퍼져오는 것 같았다.

지방의 공사현장을 떠돌며 중장비를 몰던 남편이 보름 만에 집으로 돌아오던 날,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 봉투 속의 복숭아.....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윤이 기겁을 하며 보름 만에 만난 남편을 피해 도망쳤고
남편은 웃음을 터뜨리며 어린 소년처럼 그녀를 쫓아다녔다.

잘 익은 복숭아 냄새가 온 마당을 가득 채웠다.
윤은 마루 끝에 오도카니 앉아 복숭아를 씻는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마당 수돗가의 큰 함지박에 복숭아 털이 둥둥 떠다녔다.
그러나 남편의 손이 복숭아를 몇 번 문지르자, 복숭아는 곧 매끈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뿌옇게 떠올랐던 털들은 말끔히 하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윤은 연신 팔과 목을 긁어대면서도,
오랜만에 만난 남편의 뒷모습을 놓칠 수가 없어 끝내 외면하지 않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복숭아를 씻는 내 남자..... 복숭아를 씻는 내 남자....
남편이 불현듯 어깨를 돌려 잘 씻은 복숭아 하나를 마루 위의 그녀에게 던졌다.

윤이 엉겁결에 그 복숭아를 받아들고는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윤의 입가로 손톱만 한 크기의 두드러기들이 툭툭 불거져 올랐다.

그래도 행복한 그녀의 웃음...
복숭아 과육을 입가에 잔뜩 묻히고 두드러기가 돋아 오른, 한 여자의 행복에 겨운 미소...

그날 밤, 남편은 그녀를 끌어안고 절정에 겨운 채 물었다.
하고 싶었지? 너도 하고 싶었지?

그때 그녀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가려워, 여보.......
내 생의 이 숨 가쁜 순간이 내 몸속 어딘가를 자꾸 가렵게 하나 봐.
여보, 나를 좀 긁어줘. 복숭아 털이 내 몸 어딘가에 붙어 있어요.

제발, 여보, 나를 좀 긁어줘. 털 벗지 못한 복숭아 같은 내 몸......
내 몸을 힘차게 씻어 싱싱하고 매끈하게 만들어줘요.

- 그래........무엇이든 하렴.
러브체어 위에 다리를 넓게 벌리고 편안하게 누워, 윤은 홀로 중얼거렸다.

- 살아 있는 몸일 때, 너희들, 무엇이든 하렴...... 그렇게 하렴......

그렇게 중얼거리고, 홀로 미소 짓고, 눈을 뜨자마자 윤은 기절을 할 듯 놀라
의자 위에서 나동그라지듯이 떨어져 내렸다.

객실 입구에서 한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이었다.

사장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는데,
세상에 이렇게 이상한 아줌마는 듣도 보도 못했다는 게 요지였다.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사장과 눈을 맞추고 있을 수가 없어
윤은 사장실의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장실은 깨끗하지 않았다.
객실 청소에 대해서는 그렇게 까탈을 부리면서도 정작 자기 방의 청결 상태에 대해서는
무심한 사람이 사장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깨끗한 것이 불편하다고 했다.
자기 방은 하루 묵어 가는 방이 아니니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고.

머리카락도 떨어져있고 담뱃재도 묻어 있고 소파에서는 땀 냄새도 적당히 풍겨야 한다고.
사장의 그런 요구가 청소원들에게는 더 힘겨웠다.

사람 냄새가 날 만큼 적당히 지저분하다는 거은 어떤 정도를 말하는 것일까.

꽁초 쌓인 재떨이를 비우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비운 재떨이를 닦아놓지 않을 수도 없었는데, 그때마다 청소원들은 그것이 해도 좋은 일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어 공연히 안절부절을 했다.

소파의 쿠션을 털 때도, 책상 위를 마른걸레로 닦을 때에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윤이 내려다보고 있는 사장실 바닥 카펫에는 담배 자국이 보였다.
며칠 전 청소를 할 때에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마 사장은 사장실에 있는 동안에도,
자리에 앉지 못한 채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줄담배를 피워대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장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윤의 시선이 언뜻 사장의 얼굴로 가 닿았는데
마치 불에 덴 듯이 그 시선은 얼른 다시 바닥으로 떨궈져 내렸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인 걸까.
사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또다시 참을 수 없는 것은 웃음이었다.

물레방앗간을 외치던 그의 새된 음성이 떠오르고, 한낮의 모텔 마당 한복판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러브체어 위에 올라앉아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럼 사랑은 어디에서 하라는 거냐는 그의 탄식이 떠오르고..
윤은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6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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