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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용이 있다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지음, 김유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수백권의 책을 읽으며 여러 상황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기에 어떤 상황이 닥쳐도 어려움 없이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막상 중요한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이 오니 이것저것 핑계대기 바쁘다. 부모님이 원하는 모습과 내가 원하는 모습, 내 선택대로 밀고 나가서 잘못되었을 때 겪게 될 후폭풍(내가 한 선택이므로 오롯이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 부모님의 선택을 따라갔을 때 내가 후회할 것들 등등. 이것저것 재고 따지느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다. 이럴때면 이 책임감을 벗어두고 잠시라도 좋으니 현실에서 멀리 달아나고 싶다.
난 힘들때마다 소설을 찾았다. 현실을 잊기에는 에세이나 자기계발서처럼 현실의 나를 자꾸만 돌아봐야하는 책들보단 소설이 좋다. 이왕이면 현실적이지 않은, 200% 픽션으로. 판타지 소설이면 더욱 좋다.
제목만 보면 용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일 것 같다. 실은 작가가 틈날때마다 끄적인, 한쪽 혹은 길면 세쪽 분량의 짧은 글들인데 그의 글에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분위기가 풍긴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계속 뒷통수를 치는 이야기들이랄까.
동그랗고 좁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오빠는 공부를 하고 나는 이 책을 읽었다. 공부하는 동안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작가의 말'부터 혼자 알고있기 아까운, '대박대박, 오빠 이거 한번만 읽어봐' 하게 되는 글들이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자 '대박.... 오빠 이거 읽어봐' 는 끊이질 않았다는 사실..
이 책 제목에 나온 용들은 수 세기 전부터 고대의 미완성 지도들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지도들이 가리키는 세상이 끝나는 그곳에서 바로 지식이 생겨났다. 비축된 물이 다 떨어지기 전에 어디에서 배를 돌려야 하는지, 또는 배를 침몰시킬 최악의 협곡이 숨겨진 깊은 바다가 어디인지 그 지도 위에 주의 표시를 해놓았다.
'여기 용이 있다'라고.
기괴한 날개 달린 뱀이 나오는 전설은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위험들이 생길 수 있음을 경고했다. 무시무시한 개가 있는 곳에 조심하라고 걸어둔 팻말처럼, 중세 지도 제작자들은 항해자들에게 '가지 마시오. 그곳에 가면 공포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라는 표시를 해놓고 모험심을 품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은 아름다운 은유이기도 하다. 즉, 우리의 지식이 끝나는 그곳에서 상상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
세상만사의 신비한 생각의 중심에 깊게 다가가고 우리 자신과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는 픽션만 한 것이 없다. 이것은 마치 손에 든 램프 혹은 사용 설명서와 같다. 우리가 열 걸음을 걷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상세 지도처럼, 이것은 우리 자신을 밝게 비추도록 돕는다. 그러면서 우리를 안내하고 조언하며 길을 알려준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당신은 바로 자신을 찾게 하는 확실한 힘,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거꾸로 그려진 지도를 보는 것처럼 오로지 이 안에서 길을 잃어버리겠다는 목적으로만 사용하길 권한다. 물론 이것은 현실도피나 불가능한 일들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힘을 내서 자신의 현실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p, 6~8 (작가의 말 中)
그랬다. 이 책을 읽는 두시간 동안 이 안에서 길을 잃었다. 중간중간 알리고 싶은 글들이 많아 사진으로 찍고 인스타그램에 바로바로 올리는 동안에도, 오빠한테 '이거 한번 읽어봐!' 할 때도 중요한 선택을 앞둔 현실을 잠깐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난 후엔 상쾌해진 머리와 '배고픈데 저녁은 뭐먹지?' 하는 단순한 선택과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이 책을 읽으려는 분들이라면, 작가가 권했듯이 순서대로 읽기를 바란다. 단편은 이것저것 골라읽는 맛도 있지만 이 단편들은 최대한 천천히 쓰여진 순서대로 읽어야 더 큰 '대~박!!!'을 얻을 수 있다.
그의 글을 읽고나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번에 도서관에 가면 베르나르의 소설을 빌려와야지. 그리고 나에게 두통을 가져다 준 중요한 선택은, 막연한 선택을 해두긴 했지만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또 다시 이 선택으로 머리가 아파지면 소설을 손에 들고 카페로 도망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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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있던 단편들 중에서 그나마 현실적이었던 단편들,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는데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가 나누기엔 쉬우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