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二分法的 存在論은 現象界와 知性界 사이의 斷絶이라는 限界를 가지고 있다. 플로티노스는 이 限界를 存在의 大 連鎖라고 하는 流出說로 克服하고자 하였다. 流出說은 矛盾을 同時에 가진 제3의 것으로서의 靈魂에 대한 規定을 核心으로 한다.

플라톤은 世界를 現象界와 知性界로 區分하였다. 意見(doxa)의 領域인 現象界는 눈에 보이는 可視的 世界이며, 眞理(episteme)의 領域인 知性界는 知性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이데아의 世界로 知性界의 가장 높은 곳에는 이데아 중의 이데아인 善의 이데아가 있다. 現象界와 知性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間隙이 있다. 플라톤은 現象界의 物質과 知性界의 이데아가 關係하는 方式을 個物에 대한 이데아의 關與, 또는 個物이 이데아를 나누어 가지는 分有로 說明했다. 하지만 関與나 分有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說明하지 않았다. 플라톤의 동굴의 比喩에는 동굴 안쪽에서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동굴 밖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 왜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동굴 밖으로 올라가는지, 또 동굴 밖에서 다시 안으로 내려오는 理由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 플라톤의 二分法的 存在論이 가진 限界가 있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二分法的 存在論이 가진 限界를 認定하고 그 問題 設定을 받아들였다. 플로티노스의 流出說은 바로 이러한 現象界와 知性界의 斷絶을 克服하기 위한 試圖였다. 그는 知性界를 一者와 精神(nous)으로 나누고, 精神과 物質 사이에 이 둘을 連結하는 靈魂(psyche)을 介入시켰다. 一者로부터 精神이 흘러나오고, 精神으로부터 靈魂이 흘러나오며, 靈魂은 物質世界를 創造한다. 一者는 모든 것을 包括하는 者로서 모든 存在者의 窮極的 原因이다. 一者로부터 流出된 精神은 創造의 틀이고, 精神으로부터 流出된 靈魂은 現實化의 原理다. 여기서 만들어진 物質은 끊임없이 生成되고 消滅된다. 플로티노스는 이러한 方式으로 存在의 大 連鎖를 만들었다. 存在의 大 連鎖는 一者의 固有함이 物質에 스며들어 가는 것이다. 太陽이 빛을 비추듯이 一者는 精神에게 빛을 비추고, 精神은 靈魂에게 빛이 된다. 一者가 빛을 비춤으로써 物質世界도 有意味한 것이 된다.

플로티노스의 流出說에서 核心은 靈魂의 性格에 대한 規定이다. 靈魂은 플라톤에게는 없던 槪念이다. 精神的 世界와 物質的 世界 사이에 있는 靈魂은 위로는 精神을, 아래로는 自然을 바라보면서 萬物을 創造한다. 플라톤의 二分法的 存在論에서는 있을 수 없는, 精神的인 것이면서 同時에 物質的인 것이다. 플라톤에서 始作되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同一律과 矛盾律이라는 論理的 形式으로 定立된 二分法的 存在論은 矛盾을 肯定하지 않는다. A=A이고 A≠not A이다. 따라서 精神이면서 同時에 物質인 것은 存在할 수 없다. 그런데 플로티노스의 流出說에서 物質世界를 만들어내는 現實化 原理인 靈魂은 精神이라는 創造의 틀에서 流出된 것이다. 精神과 物質이라는 矛盾되는 두 가지 것이 同時에 들어있다. 이처럼 矛盾을 肯定하는 플로티노스의 靈魂 槪念은 精神的 世界에 속하면서 同時에 物質的 世界에 속하는 第3의 것으로 規定된다.

플로티노스는 靈魂이라는 第3의 것을 介入시켜서 플라톤의 二分法的 存在論이 가진 現象界와 知性界의 斷絶을 克服하고자 하였다. 矛盾되는 두 가지 것을 同時에 가진 第3의 것이라는 槪念은 新플라톤主義로부터 影響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그리스도敎와 만나 예수는 神이면서 人間이라는 三位一体 敎理의 定立에 影響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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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敎의 한 分派였던 初期 그리스도敎는 에게 海 地域으로 퍼져나가며 希臘語의 脈絡으로 들어가 헬레니즘的 그리스도敎로 發展하였다. 유대敎的 그리스도敎에서 헬레니즘的 그리스도敎로 普遍化 過程을 거치는 동안 敎會가 成立되었고, 이 敎會는 사랑의 共同體라는 독특한 性格을 가진 集團이었다. 神의 抽象的 命令인 사랑은 敎會를 통해 個人 次元의 內面的 自覺과 共同體 次元의 社會的 實踐이 統合된 福音으로 具體化 되었다.

初期 그리스도敎는 歷史的 예수의 죽음 以後 그의 追從者들과 함께 에게 海 地域으로 퍼져나갔다. 그리스도敎가 유대敎의 한 分派였을 때 지켜야 했던 유대敎의 律法과 慣行들은 점차 廢棄되었다. 同時에 靈智主義, 스토아主義, 自然哲學, 플라톤, 로고스와 같은 헬레니즘的 要素가 들어오면서 그리스도敎는 새로운 모습으로 變化했다. 臨迫한 하나님 나라(Gottesnahe)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終末의 遲延으로 인해 折衷主義的 形態로 轉換되었으며, 그리스도敎는 헬레니즘이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普遍化의 길로 나갔다. 이러한 普遍化 過程에서 重要한 役割을 擔當한 것은 使徒 바울이었다. 그는 헬레니즘 그리스도敎의 核心을 集約한 書信들을 記錄함으로써 그리스도敎 敎理의 定立에 크게 寄與하였다.

헬레니즘 그리스도敎의 核心은 그리스도, 三位一體, 예수의 代贖的 죽음으로 要約된다. 그리스도는 히브리語 메시아를 希臘語로 飜譯한 것인데,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人間의 罪를 代身하여 十字架에 달려 죽음으로써 人間을 救援하였다. 예수의 죽음은 人間에 대한 神의 사랑의 證票로 人間은 이를 믿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믿음을 共有한 이들이 모여서 敎會가 成立되었다. 敎會는 사랑이라는 槪念을 통해 가난한 者와 베푸는 者라는 範疇를 提示하였다. 福音이 “가난한 者에게(눅 4:18)”전해진다. 그리스도人은 “즐겨 내는 者(고후 9:7)”다. 이로써 서로 “不足한 것을 補充하여 均等하게(고후 8:14)”된다. 이제 敎會는 유대敎의 民族主義에서 벗어나 現實 世界에서 가난한 者를 돌보는 普遍的 共同體로 發展하였다.

로마 帝國 治下에서 ’가난’과 ’기쁘게 주는 이’라는 槪念은 劃期的인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인 사랑을 삶의 基本的인 實踐 德目으로 삼은 사람은 共同體에서 社會的인 實踐으로 사랑을 나타내야 했다. 初期 그리스도敎는 個人의 內面의 靈魂으로 파고들어 사랑에 대한 自覺을 促求하고, 그 內面的 自覺을 社會的인 實踐으로까지 이끌어냈다. 敎會가 전하는 福音은 가난하고 抑壓받는 者들, 즉 窮乏한 者들의 解放을 意味했다. 왜 窮乏한 者들의 解放이 福音인가? 人間은 神의 被造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人間의 靈魂은 高貴하며, 따라서 窮乏으로부터 解放되어야 한다. 이는 예수에 의한 人權宣言이며, 가장 急進的 實踐哲學인 人權運動이다. 여기서 그리스도敎의 社會哲學的 意味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헬레니즘的 그리스도敎는 사랑이라는 主題를 中心으로 世界를 把握하고, 이러한 理解의 바탕 위에서 個人的 次元과 社會的 次元의 急進的 實踐을 要求하는 思想으로 發展하였다. 다시 말해서, 初期 그리스도敎의 福音은 個人의 靈魂을 돌보게 하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름으로써 하나님과 人間의 關係를 直接的인 人格的 關係로 만들었으며, 하나님과 直接的인 人格的 關係를 維持하는 사람들 사이에 相互 結束과 兄弟 關係를 志向하게 하였다. 이러한 關係는 人間들 사이에 包括的이고 깊이 있는 사랑의 共同體 設立으로 이어졌고, 이로써 福音은 사랑을 媒介로 한 個人과 共同體의 統一을 이루었다. 이때 以後로 사랑은 西洋哲學에서 重要한 社會哲學的 主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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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과 道는 中國 思想을 理解하는 核心 槪念이다. 天을 根源으로 德治를 펼칠 것을 主張한 儒敎는 中國 政治思想의 基本 原理로 作動하였으며, 萬物의 理致인 道를 中心으로 自然의 흐름에 順應할 것을 强調한 道敎는 中國的 思惟의 바탕에 폭넓게 자리한 傳統이 되었다. 道敎를 바탕으로 成立된 中國 佛敎는 印度에서 發生한 本來의 佛敎와는 完全히 다른 現世指向的 宗敎로 變化되었다.

‘中國'은 동아시아 地域이라는 地理的 條件에서 歷史的으로 形成된 政治的, 文化的 産物들을 가리키는 槪念이다. 따라서 中國은 狹小한 民族 槪念이 아닌 中國, 韓國, 日本, 베트남을 包括하는 槪念이라는 것을 留念해야 한다. 中國的 世界觀은 世界를 흐름으로 把握한다. 다스림과 어지러움이 循環하는 하나의 흐름이라는 뜻의 一治一亂은 中國 思想의 特徵을 보여준다. 中國 思想을 理解하는 데 必須的인 槪念으로 天과 道가 있다. 天은 殷나라에서 세운 帝라는 槪念에서 비롯되었는데, 帝는 人格的인 神의 性格과 法則的인 性格을 同時에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周나라로 넘어오면서 人格的 神 槪念이 除去되고 理致와 法則으로서의 天 槪念으로 變化되었다. 天은 하늘이 定한 理法이다. 天으로부터 命을 받아, 天命으로 世上을 다스리는 이가 天子다. 天子도 天命을 따르지 않으면 命이 바뀐다. 命을 바꾸는 것, 이것이 革命이다. 天命은 特定한 사람만이 啓示를 받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天은 道德規範의 源泉이며 政治思想의 土臺가 되었다.

天을 道德的 源泉으로 定立한 것은 孔子였다. 祈雨祭와 葬禮, 祭祀 등을 擔當하는 儒 集團에 屬했던 孔子는 여기서 呪術的인 部分을 除去하고 그 안에 담긴 宇宙와 人間을 連結하는 理致를 窮究하여 하나의 原理로서 學問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天이 道德規範의 源泉으로 자리를 잡은 以後 中國은 다시 超越的 神 槪念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儒敎는 天에 根源을 둔 德으로 世上을 敎化하는 政治思想의 基本 原理가 되었다. 儒敎가 天에 根源을 두고 있다면 道敎는 道를 世上의 理致로 생각했다. 自然의 흐름을 일컫는 道는 萬物에 內在한 理致이자 萬物의 根源이며 同時에 그 根源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原因인 同時에 結果이다. 道의 法則은 物極必反이다. 世上 萬物은 極에 이르면 반드시 되돌아온다. 極은 '다하다'라는 뜻으로, 다한다는 것은 消滅을 意味하기도 하지만 質的 轉換을 意味하기도 한다. 固定된 狀態와 運動하는 狀態 그리고 質的으로 다른 狀態를 同時에 表現하는 物極必反은 中國的 思惟의 모든 것에 들어있다. 世界를 흐름으로 把握한 中國的 世界觀의 基盤에는 道敎가 놓여있다.

道敎의 目標는 道와 合致를 이루어 不老長生하는 神仙이 되는 것으로, 이를 得道라고 한다. 道敎의 核心은 東洋五術이라고 부르는 命卜醫相山에 있는데, 마지막에 있는 山은 冥想의 狀態에 到達하는 것으로, 이는 印度 佛敎의 禪定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中國 佛敎는 道敎 위에서 成立되었다. 印度 佛敎의 涅槃은 中國으로 들어오면서 得道로 飜譯되었고, 中國 佛敎에서는 부처가 된다는 意味인 成佛로 變化되었다. 中國 佛敎는 自我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처로 自我를 채워야 한다. 現世의 利益에는 關心을 두지 않는 本來의 佛敎와는 反對로 現世의 利益을 追求하는 데 도움이 되는 宗敎로 바뀐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世界가 모두 부처님의 世界라는 華嚴經을 經典으로 삼는 華嚴宗, 모든 人間이 부처가 되도록 가르침을 펼치러 超越的 存在인 부처님이 世上에 왔다는 法華經의 天台宗, 經典에서 벗어나 日常的 삶에서 부처의 道를 닦아 成佛하는 것을 目標로 삼는 禪佛敎 등 中國 佛敎의 宗派들은 모두 中國 佛敎가 現實 世界에 대한 絶對的 肯定의 宗敎로 탈바꿈하였음을 보여준다.

中國 思想의 特徵은 物極必反의 法則을 따르는 道와 이를 基盤으로 하는 現世指向性에 있다. 21세기 한반도에 사는 사람에게 道는 동아시아에 屬한 한반도라는 地理的 條件에서는 익숙한 面이 있지만, 西歐 文明에 익숙해진 21世紀라는 歷史的 狀況에서는 낯선 面도 없지 않다. 現在를 올바르게 理解하려면 西洋 思想과 더불어 中國 思想에 대한 理解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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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度의 宗敎에는 다르마(dahrma, 法), 브라마(brahma, 梵), 아트만(atman, 自我), 카르마(karma, 業), 삼사라(samsara, 輪廻), 모크샤 또는 니르바나(moksha 또는 nirvana, 解脫)라는 共通된 槪念들이 있다. 이 槪念들은 베다 經典에서 由來한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힌두교가 成立되었다. 그 후 힌두교의 特定 部分을 批判하면서 자이나교와 佛敎가 始作되었다.

印度의 宗敎는 古代 印度 思想의 根源인 베다 經典으로부터 出發하였다. 印度 宗敎의 特徵은 神聖함에 대한 强迫觀念이 적다는 것과 法則的 性格을 强하게 가진 非人格的 神 槪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法이라는 意味의 다르마 槪念이 나왔다. 이 다르마에 人格的 槪念이 若干 덧붙여진 것이  브라마다. 이 브라마와 自我를 意味하는 아트만은 원래 하나였다. 이것이 힌두교가 말하는 理想的 狀態다. 그런데 어느 瞬間 아트만에 카르마가 介入하면서 브라마로부터 아트만이 分離되고 삼사라가 始作되었다. 삼사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트만에 붙어있는 카르마를 除去하고 브라마와 아트만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아트만에서 카르마를 除去하는 行爲가 요가(yoga)다. 요가를 修行하여 브라마와 아트만이 하나가 되는, 梵我一如의 狀態에 이르는 것이 힌두교의 解脫이다.

힌두교에 대한 批判과 함께 자이나교와 佛敎가 登場하였다. 初期에 이 둘은 큰 差異가 없었다. 자이나교와 佛教는 힌두교의 梵我一如가 眞正한 解脫이 아니라고 批判했다. 梵我一如의 狀態에 이르러도 끝없이 有限者의 世界를 떠도는 삼사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삼사라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자이나교는 問題의 原因이 아트만에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트만에 붙어있는 카르마를 더 徹底하게 떼어낼 것을 要求하였다. 徹底한 카르마의 除去는 徹底한 不殺生의 實踐을 통해 可能하다. 商業에 從事하며 菜食을 하고 裸體로 生活하는 등 모든 方法을 實踐하여 不殺生을 徹底하게 成就한 사람에게는 이긴 者, 즉 지나(jina)라는 稱號가 주어진다. 자이나교의 重要한 特徵은 解脫에 이르는 方法으로 아트만에게 매우 强力한 實踐을 要求한다는 것이다.

자이나교가 아트만의 實體를 認定하는 것과 달리 佛敎는 이를 否定한다. 아트만의 實體性을 全的으로 否定한다는 점에서 印度 佛敎는 完全한 否定性의 思想이다. 印度 佛敎는 참다운 實體라는 것은 없으며, 나를 비롯한 눈 앞의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기에 執着을 버려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印度 佛敎의 解脫은 모든 것을 비우는 것이다. 解脫은 戒定慧의 세 段階를 거쳐 到達한다. 戒는 戒律을 지키는 것이며, 定은 고요함에 머무는 禪定을, 慧는 日常 속에서 眞理를 觀照하는 智慧를 말한다. 戒定慧를 具體的으로 實踐하는 길은 八正道(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에 있다. 戒律을 忠實히 지켜 禪定의 段階로 올라서고, 禪定의 고요함에 깊이 머무른 다음 다시 日常으로 내려와 戒律을 意識하지 않으면서도 戒律에 어긋나지 않게 行動하면 智慧의 段階에 이른다. 이것이 佛敎의 니르바나, 곧 解脫이다.

印度에서 發生한 힌두교, 자이나교, 佛敎는 베다 經典을 基盤으로 하는 世界 理解와 解脫이라는 窮極目的을 共有하고 있다. 하지만 具體的 實踐을 이끌어내는 價値評價와 意志의 態度에서 이들 宗敎의 差異가 드러난다. 世界觀의 하나인 宗敎는 先行하는 宗敎의 影響을 받을 뿐 아니라 다른 宗敎와의 競爭을 통해 影響을 주고 받으며 發展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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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에 대한 理解와 그 理解를 바탕으로 行爲하려는 意志의 態度를 世界觀이라 한다. 世界觀은 客觀的 精神, 時代精神과 緊密하게 맞물려 있다. 넓은 意味에서 哲學과 宗敎도 世界觀에 속한다.

‘世界’의 哲學的 定義는 主觀 外部에 있는 모든 것, 즉 ‘對象 一般으로 表現되는 無制限的 全體’다. 學問은 對象 一般으로 表現되는 無制限的 全體로서의 世界를 理解하려는 努力이다. 學問을 하는 것은 오직 人間뿐인데, 이는 人間이 世界 開放性을 지닌 存在이기 때문이다. 思惟나 意志가 없이 世界에 一對一로 對應하며 固定된 삶의 方式만을 따라 사는 動植物과 달리 人間은 世界에 열린 狀態로 思惟와 意志를 펼치며 산다. 이러한 世界 開放性으로 인해 人間은 世界를 意識하고 世界를 理解하여 特定한 觀點에서 把握된 世界像을 만든다. 여기에 그 理解를 바탕으로 行爲하고자 하는 意志의 態度가 덧붙여지면 世界觀이 形成된다. 따라서 世界觀은 單純한 世界 理解 또는 世界를 바라보는 觀點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世界에 대한 理解와 그 理解를 바탕으로 行爲하려는 實踐的 態度까지 包含하는 것이다.

딜타이는 世界觀이 世界에 대한 知識, 價値評價, 窮極目的이라는 세 가지 要素로 構成된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要素는 모두 精神的인 것이다. 그런데 이 精神이 具體的인 行爲로 客觀化되어 나타나면 精神은 行爲를 規定하고 限定짓게 된다. 世界觀의 差異에 따라 人間의 具體的인 行動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 行動은 具體的인 現實 領域에서 實現되는 것이고, 이것이 集團的으로 이루어지면 制度的 裝置가 될 수 있다. 이처럼 世界觀은 現實에서의 具體的 行爲를 이끌어 낼 뿐만 아니라 儀禮, 形式, 節次, 制度 속으로까지 스며들어간다. 이를 現實 속에서 客觀化되는 精神이라는 意味에서 客觀的 精神이라고 한다. 法, 慣習, 制度 등은 客觀的 精神의 外部的 表現 形態다. 그 중에서도 特定한 歷史的 局面에서 特定한 人間 共同體에 共通的으로 드러난 客觀的 精神을 가리켜 時代精神이라고 부른다.

世界觀은 반드시 行爲까지 이끌어낸다는 점을 留念해야 한다. 行爲를 促求한다는 側面에서 宗敎와 哲學도 世界觀이다. 宗敎를 哲學的으로 定義하면 ‘世界觀의 하나로서 神聖하고 固有한 宇宙를 세우려는 企劃 또는 試圖’다. 宗敎의 固有한 特徵은 神聖함에 있는데, 神聖하다는 것은 한마디로 定義할 수 없는 것이다. 神聖함은 人間이 가질 수 있는 最上位의 價値다. 그렇기에 人間은 神聖함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宗敎도 世界觀의 하나이기에 世界觀의 세 가지 要素를 모두 가지고 있다. 모든 宗敎가 人間의 救援 또는 참된 幸福이라는 비슷한 窮極目的을 가지고 있어도 世界 理解와 價値評價가 서로 다르기에 전혀 다른 世界觀일 수밖에 없다. 콘퍼드는 그의 著書 <<宗敎에서 哲學으로>>에서 宗敎와 哲學은 確固하게 區別 지을 수 없다고 하였다. 오히려 宗敎的 表象과 槪念들이 哲學에 重要한 影響을 끼쳤다고 보았다.
 
世界觀은 理論과 實踐의 總體다. 한 번 머리와 몸에 새겨진 世界觀은 바꾸기 어렵다. 世界觀을 바꾸려면 價値評價에 影響을 주는 實質的인 經驗을 통해서 價値評價 自體를, 즉 무엇이 더 좋은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또한 價値評價의 基盤이 되는 世界像을 올바르게 세우는 길은 多樣한 哲學 思想을 工夫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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