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은 무엇을 남겼을까. 《그들의 새마을운동》은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새마을운동은 청년들이 농촌에서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데 실패했다. 1970년대 농촌 청년들은 더 빠른 속도로 도시로 유입되어 갔다. (....) 청년들이 사라진 농촌, 부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생력을 상실한 농촌, 자본주의체제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데 실패한 농촌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새마을운동이 고조되던 1970년대였다."

상황이 이러한 데도 새마을운동에 대한 평가가 후한 이유는 어째서일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어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달랐다. 슬레이트 지붕과 반듯하고 폭이 넓은 잘 닦인 길, 전기와 텔레비전.

"이 작은 활동사진 박스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포항제철, 시원하게 뻗은 경부고속도로, 그리고 변화된 팔도강산의 모습이 차례로 보였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자랑스러운 조국 근대화의 주역임을 뿌듯한 시선으로 만끽하고 있다."

자부심으로 꽉찬 조국 근대화의 주역들.

"아침저녁으로 마을 앰프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일손을 멈추고 국가와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하며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새마을운동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바로 근대 주체의 생산일 것이다."

이러한 "근대 주체"들 중에서도 "국가를 매개로 마을공동체를 움직일 수 있었"던 "마을 내의 작은 국가권력"인 청년 주체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마을 엘리트들은 농촌 근대화의 주창자이면서 또한 박정희 정권의 지지자가 되어갔다. 현재까지도 새마을운동 시기 지도자나 마을이장 역임자들은 그들과 인생의 황금기를 함께 했던 박정희 정부의 지지자로 남아 있다."

한국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박정희 정권과 더불어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사람들, 그 슬하에서 달콤한 열매를 따먹으며 자란 사람들, '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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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 맥페이그 지음, 장윤재 장양미 옮김, ≪풍성한 생명≫,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8.

이 책의 부제는 "지구의 위기 앞에 다시 생각하는 신학과 경제"다. 신학과 경제를 함께 생각하는 이유는 자연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서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함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신학을 서술함으로써 "지구를 보다 건강하게 만들고 인류를 보다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다른 방식의 풍요로운 삶을(...)강구하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불균형하게 이득을 취하는 지구적 상황을 창출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생산하고 유통하고 유혹하는 '소비지향적 삶의 방식'은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들고, 그 결과 자연자원의 급격한 감소와 생물종의 멸종, 기후 변화 등 지구를 파멸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그리스도인들 역시 안전할 수 없으며,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지구의 위기에 책임을 져야하는가. "우리의 삶의 방식, 즉 일상적이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고도의 소비적 생활양식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생활양식이 만들어낸 결과가 "크게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요, 대체할 수 없는 지구 생명 시스템의 해체다." 자연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전과 다르게 살아야 하며, 또 다르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전체 사물 체계 안에서 누구인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소비자로, "특히 소비적인 '풍요로운 삶'에서 오는 행복할 권리를 타고난 개인"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에 의존하고 있으며 자연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지구 위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특히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의 존재근거로 삼는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우리의 목적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일상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 "분배정의와 지속가능성이라는 매우 현세적인 원리"에 입각한 방식으로 "서로와 세계를 사랑함으로써 그 형상으로 더 충만하게 자라나는 것이다."

달달한 화학조미료에 길들여진 입맛을 건강한 자연의 소박한 입맛으로 바꾸려면 얼마간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익숙한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서 다른 방식의 풍요로운 삶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제약과 희생이 따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제자됨의 형태로, 그리고 희생하고 짐을 나누는 십자가의 삶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온 것은 그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0:10)라는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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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과 공동선》을 읽은 후 떠오른 생각.

칼뱅은 영적, 교회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지만, 문제는 지금 한국 개신교가 양 차원을 분리될 수 없으나 '철저히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 아닐까. 영과 육을 구별하고 교회와 사회를 구별해서 영을 우월한 것으로 여기고 매사에 교회를 우선으로 한다. 그러나 실제로 구별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구별하다 보니 온갖 욕망을 영적인 것으로 착각하거나 영적인 것처럼 포장한 채 정신없이 좇아가고 있는 것이 개신교의 현실 아닌가. 아무리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쳐도 일단 교회와 사회를 구별해서 말하는 순간 머릿속에서는 분열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칼뱅의 시대에는 그런 관념적 구별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 현실도 그 시대와 같은 구별이 필요한 상황인가. 차라리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해야 하는 시대라고 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칼뱅만 바라보느라 현실을 놓친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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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은 유난히 춥다. 입춘이 지났는데도 영하 10도 아래에 머물러있는 기온은 올라갈 줄을 모른다. 숫자로 표시된 기온만 보면 움츠러든 몸이 펴지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곧 추위가 물러가고 봄이 올 것을 안다. 돌고 도는 계절, 그 순환의 법칙을 알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이 더 추웠는지, 아니면 그나마 견딜 만 했는지,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해도 겨울이 지나고 어김없이 봄이 왔다는 사실은 분명히 안다. 작년뿐 아니라 재작년에도 그랬고 10년 전에도 그랬으며 언제나 그래왔다는 것도 안다. 그렇게 과거를 기억한다.

과거를 의식하고 있으면 현재 벌어지는 사태 앞에서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된다. 해 아래 새로운 사태는 없다. 역사를 돌아보면 늘 비슷한 위기가 있었고, 끊임없이 인간은 난관을 헤쳐나가야 했다. 현재가 가장 절망스러운 것 같아도 역사에는 그보다 더한 시기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찰나에 지나지 않는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위기와 혼란과 절망의 연속이었음 알 수 있다.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만을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헤겔의 말은 옳다.

사실 역사를 읽는 이유는, 역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배우기 위해 역사를 읽는다.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은 "조선이 망할 때쯤에는 국가는 없고 가문만 있을 정도였다. 가문의 이익이 우선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만 일어난 일도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저 멀리 유럽 한구석에서 피어오른 종교개혁의 불길은 부와 권력을 향한 메디치 가문의 탐욕이 불쏘시개가 되어 전 유럽으로 번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 사례는 널려 있다.

권력을 쥔 자는 교활하고 악랄한 수법으로 부지런하고 꼼꼼하게 부를 챙긴다. 재력을 가진 자는 '사료'를 먹이듯 돈으로 길들인 권력의 비호 아래 가문의 성벽을 높이 세운다. 이런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 결말 또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러다가 망한다. 그리고 역사는 그 수치스러운 이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누구의 통치를, 누구의 다스림을 받을 것인가. 어떤 나라에서, 어떤 법과 질서에 따라 살 것인가. 제국 로마의 임박한 멸망 앞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전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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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전기(傳記)다. 전기는 '내러티브'로 이루어지는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문학 비평이라는 도구를 통해 살펴본 네 편의 복음서는 한 "예수를 그린 네 편의 초상화"라 할 수 있다.

단 한 장의 초상화만으로 그 초상화의 주인공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단일한 복음서가 아닌 네 편의 복음서 덕분에 우리는 예수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온전한 예수의 모습에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네 편의 각기 다른 초상화를 천천히 비교하고 자세히 분석해야 한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 고대 전기와 유사성이 뚜렷한 복음서는 일종의 고대 전기라 할 수 있다. 복음서에 사용된 자료를 분석하면,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마가복음이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과 'Q', 이에 더해 각자의 고유한 자료를 사용했으며, 요한복음은 독자적 자료를 가지고 가장 마지막에 기록되었다. 자료들은 양식에 따라 기적 이야기, 어록, 비유, 선포 이야기로 분류할 수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러한 원자료를 바탕으로 각자의 관점에 따라 편집, 구성하여 자신이 이해한 바를 독자에게 제시했다.

복음서를 전기라는 형식의 문학으로 볼 때, 저자, 독자, 본문의 삼각 구도를 통한 문학적 접근이 가능하다. 각 복음서의 저자는 내러티브 해설자로서 본문의 내러티브를 조금씩 다른 플롯으로 해설한다. 이 해설의 일차적 독자는 저자가 글을 쓸 때 상정한 내포 독자이지만, 지금 복음서를 읽는 우리 자신도 복음서의 실제 독자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2천 년 해석의 역사가 있다. 그 역사 속에서 모든 영감의 근원인 성령 하느님은 복음서 저자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서학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복음서는 온전한 인간이자 온전한 하느님인 성자 하느님에 관한 인간의 언어로 된 하느님의 말씀이며, 창조성의 원천인 성부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창조적 응답이다. 이처럼 복음서는 문학적 방법으로 인간이 기록한 책인 동시에 인간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하느님이 기록한 책이다.

초대 교회와 교부들은 '네' 편의 복음서를, 그리고 네 편의 복음서'만'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전통은 네 상징을 부여했다. 마가는 사자, 마태는 인간, 누가는 소, 요한은 독수리. 그 후로도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었고, 신학과 문화, 신앙과 예술 영역에서 수많은 예수상으로 재탄생했다. 복음서가 네 편이라는 점은 그 과정에서 해석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해석의 한계를 설정하는 자극제이자 제어 장치로 작동했다. 복음서는 네 편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이야기, 즉 예수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수는 오직 하나,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이다. 예수는 네 편의 이야기에 뿌리내리고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듣는 이들을 한 예수와 대면하게 하고 예수가 하느님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한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복음서와 만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제자로서 예수와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 편의 복음서에서 우리는 한 예수를 만나고 주로 고백하고 경배한다. 그리고 예수를 따른다. 어떤 사람은 사자 같은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리 중에는 소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수리 같은 사람도 있다. 교회나 교파도 마찬가지다. 인간적인 모습을 중시하는 교회/교파도 있고, 소처럼 묵묵히 희생하는 특징을 가진 교회/교파도 있다. 사자가 인간에게 틀렸다고, 소가 독수리에게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 사자, 인간, 소, 독수리가 모두 한 예수를 그린 다른 초상화이듯이,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우리도 한 예수를 따르는 다양한 제자들이다. 네 편의 복음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화합과 일치를 이루라는 명령일지도 모른다. 네 편의 복음서를 꼼꼼히 읽고 그 안에 드러나는 미묘한 차이와 독특한 분위기를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 명령을 따르는 첫걸음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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