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人間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는 意味에서 普遍的이지만 同時에 誤謬 可能性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存在라는 側面에서 人間의 理性인 ‘普遍的 人間 理性'을 提示하였다. 普遍的 人間 理性이라는 有限者의 制約性을 克服하는 過程이 칸트가 定義한 '啓蒙'이다. 칸트의 啓蒙哲學은 有限者는 無限者에 이를 수 없음을 承認함으로써 限界를 明瞭하게 設定한 'kritik'의 哲學이다.

칸트는 “啓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答辯"에서 '普遍的 人間 理性'이라는 槪念을 내놓았다. '普遍的 理性'은 人間이 共通的으로 所有한 理性이라는 意味이며, 여기에는 모든 사람이 眞理의 擔持體라는 前提가 있다. 그런데 人間은 有限한 存在이기 때문에 '人間 理性'이란 完全한 理性이 아니라 部分的인 理性이며, 誤謬와 偏見에 빠질 수 있는, 利害關係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릴 수 있는 理性이다. 따라서 '普遍的 人間 理性'이란 누구나 가지고 있는 理性이지만 完全하고 絶對的인 神的 理性이 아니라 誤謬 可能性을 가진 人間의 理性이다. 다른 한편으로 人間이 誤謬 可能性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해도 全的으로 誤謬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總體的 誤謬 不可能性을 함께 이야기하였다. 칸트는 이러한 普遍的 人間 理性을 提示한 後 그 特徵인 誤謬와 偏見에서 벗어날 方法을 摸索하였다.

칸트에 따르면 人間이 誤謬와 偏見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사람의 立場에 서 봄으로써 認識의 範圍를 넓혀야 한다. 對話와 討論으로 誤謬와 偏見을 除去해 나가고 個別的인 利害關係의 束縛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啓蒙의 過程이다. "啓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答辯"은 啓蒙을 未成熟한 狀態에서 벗어나는 것, 自身의 머리로 스스로 생각하는 것, 偏見이나 迷信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定義하였다. 즉, 啓蒙은 偏見에 뒤덮인 理性의 어두운 部分을 밝힘으로써 참다운 普遍的 理性에 '接近'해 나가는 것이다. '接近'은 칸트 哲學을 規定하는 重要한 述語로서 人間은 無限者에 接近할 수 있을 뿐이다. 無限者에 到達할 수 있다는 생각은 '理性의 超越的 使用'이다. 無限者라는 理念은 方向을 設定하고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統制할 뿐이다. 칸트는 理性의 超越的 使用을 否定하고 統制的 使用을 促求하였다.

理性의 統制的 使用은 다른 見解와 認識 論理에 愼重하고 寬大하며, 反對되는 立場에도 眞理의 조각이 있음을 認定하고, 自身의 誤謬를 솔직하게 밝히는 啓蒙哲學의 態度를 보여준다. 이러한 態度를 'kritik'이라고 한다. kritik은 一次的인 意味에서 '批判'이지만 칸트에 있어서는 '내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다'라고 境界線을 分明하게 긋는 謙遜한 態度를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人間의 有限性을 認定하면서도 神의 變形態로서 人間은 部分的으로 神이라고 했고, 헤겔은 理性을 超越的으로 使用함으로써 無限者를 알 수 있고 無限者의 立場으로 올라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無限者의 立場으로 올라선다는 것은 絶對的 眞理의 擔持者가 된다는 것이며, 나는 眞理이고 너는 非眞理라는 黨派性의 立場에 서는 것이다. 칸트와는 完全히 다른 態度다. 有限者와 無限者의 問題는 哲學的 態度를 決定하는 重要한 要素이다.

칸트의 啓蒙哲學은 神的 理性에 接近할 수 있을 뿐 到達할 수는 없음을 分明히 한다는 점에서 有限者의 立場에 充實한 謙遜하고 敬虔한 哲學이다. 有限者의 立場에서 서서 人間은 누구나 옳을 可能性이 있고, 누구나 틀릴 可能性도 있음을 認定하는 啓蒙哲學的 立場은 民主主義의 가장 重要한 哲學的 土臺이다. 이러한 哲學的 態度는 칸트의 認識 理論과 關聯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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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帝의 一元的 支配가 不可能해진 南宋 時代에 中央權力과 地方權力의 分離가 不可避해진 狀況에서 地方의 鄕里 空間이 생겨나고 이를 基盤으로 自生的 文化 階層을 形成하며 새로운 社會秩序를 構想한 士大夫들이 登場하였다. 이들이 펼친 南宋道學運動은 天의 意味를 새롭게 規定함으로써 學問의 目標와 內容을 再定義하고 國家의 統治 方式에 있어서 地方分權的 形態로의 轉換을 이끌어냈다. 이 過程에서 核心的 役割을 했던 이는 朱熹로서 그는 儒敎의 經典을 四書五經 體制로 確立하고 自身을 包含한 道統을 整理하였거니와 이로써 朱子學은 體制敎學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小農과 家內手工業 中心의 自給自足的 經濟活動이 經濟的 基盤을 이룬 南宋 時代는 皇帝의 一元的 支配가 貫徹되지 않았던 時期이다. 이에 따라 中央權力과 地方權力이 對立하기 始作하였고, 地方에는 皇帝의 權力이 미치지 못하는 빈 空間인 鄕里 空間이 發生하였다. 이러한 狀況은 鄕里 空間을 規律할 새로운 社會秩序와 이를 뒷받침할 理論的 根據를 마련해야함을 意味하는 것이었다. 이를 遂行한 이들이 南宋道學運動의 士大夫들이었다. 士大夫는 科擧 合格을 통해 獲得한 自信感과 一體感을 바탕으로 形成된 새로운 文化的 階層이었다. 血統과 身分 世襲에서 벗어났던 士大夫는 中央權力과 連結되어 있던 貴族들과 對立關係를 形成했다. 初期 士大夫는 科擧 合格을 目標로 삼았으나 南宋道學運動이 本格化되면서 中央權力과의 關係를 끊고 科擧와는 無關하게 學問 속에서 孔子의 道를 攄得하여 生活에서 實踐하는 것을 새로운 目標로 삼았다. 이와 함께 書院을 設立하여 鄕里 空間을 掌握하는 據點으로 삼았다. 科擧 合格을 目的으로 하지 않는 學校인 書院은 聖賢을 崇拜하고 書籍을 出版하며 講義, 學習, 討論이 이루어지는, 그 自體로 完結된 空間이었다.

書院을 據點으로 本格化된 南宋道學運動은 天을 形而上學的 實體로 規定하였다. 天은 모든 規範의 眞正한 根據로, 歷史的으로 傳承된 文化와는 獨立的으로 存在한다. 이러한 생각은 올바른 삶의 規範은 社會生活을 하는 가운데 習得된다고 본 新法의 王安石이나 蜀學의 蘇東波와 對立하는 主張이었다. 社會 現實 속에서 傳承된 社會的 規範은 삶의 窮極的 規範이 될 수 없다고 主張한 道學의 思想은 自然스럽게 脫歷史的 內省哲學으로 자리 잡는다. 이처럼 변함없이 지켜야 할 하늘의 理致가 있고 그 理致를 깨달아 內面의 德을 쌓는 것이 重要하다고 생각한 道學者들은 學問의 目標와 內容을 새롭게 定義하였다. 南宋 以前까지는 傳承된 文化 傳統을 골고루 工夫하는 것이 學問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內面의 德을 重視한 道學者들에게 詩와 賦를 짓는 것은 學問이 아니었다. 이들은 倫理와 道德을 重視하는 學問 世界를 構築하였다. 이에 따라 中央政府의 官僚가 되어 出世하는 것이 아니라 地域社會에서 倫理的 德行을 쌓는 것이 學問의 重要한 目標가 되었고, 皇帝에 의한 中央集權的 支配보다는 德을 쌓은 선비에 의한 地方分權的 支配를 훌륭한 統治로 여기게 되었다.

鄕里 空間에서 實踐할 學問 世界를 構築하고 政策 代案까지 마련하는 過程을 主導한 人物은 朱熹였다. 印刷 出版의 重要性을 認識했던 朱熹는 四書(大學, 中庸, 論語, 孟子)를 編纂하여 儒敎의 經典을 四書五經體制로 改編하였다. 孟子는 古典에 該當하지 않았으나 朱熹가 發掘하여 四書로 採擇하였다. 또한 四書五經의 入門過程에 該當하는 小學과 近思錄을 編纂하여 朱子學의 敎科 體系를 完備하였다. 朱子學의 核心은 修己治人이다. 그 밑에는 三綱領(明明德, 新民, 止於至善), 八條目(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이 들어있다. ‘百姓을 새롭게 한다’는 뜻의 新民은 원래 ‘百姓을 가까이 한다’는 뜻의 親民이었는데, 나를 닦아서 다른 사람을 다스린다는 修己治人에 根據하여 親民을 新民으로 解釋함으로써 士大夫의 統治意識을 反映하였다. 齊家에서 家는 家門으로, 많은 分家를 거느린 一族을 가리키는 槪念이며, 이들이 鄕里 空間을 이룬 勢力이었다. 經典을 完備한 朱熹는 孔子로부터 始作하여 自身에 이르는 儒家 思想의 系譜를 整理하여 道統을 確立하였다. 周公과 孔子의 道를 가리키던 儒敎가 朱子의 影響으로 孔子와 孟子의 道가 되었다.

變化하는 時代가 直面한 問題와 全面的인 對決을 펼쳤던 南宋道學運動은 鄕里 空間을 中心으로 地方分權的 體制를 構築하고 修己治人을 核心으로 하는 思想的 根據를 完備하였다. 南宋道學運動의 展開 過程은 現在 우리가 처해 있는 狀況과 그것을 肯定的인 意味에서 規律할 수 있는 社會 秩序,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理論的 根據를 마련하는 일이 統合的, 持續的으로 이루어져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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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明理學의 成立 背景에는 儒敎의 體制敎學化에서 三敎一致論의 登場까지의 過程이 있다. 三敎一致論의 登場은 後漢 末期에 提起된 人間의 內面性에 대한 問題에 儒敎가 適切히 對應하지 못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狀況에서 儒敎, 道敎, 佛敎 사이의 思想的 混合이 일어나 中國 文化의 基盤을 이루는 思想으로 자리 잡았다.

儒敎가 體制敎學으로 자리 잡는 過程은 대략 네 段階로 나눌 수 있다. 紀元前 180年에서 紀元前 87年까지는 萌芽 段階로 約 100年 程度 所要되었다. 漢 帝國이 成立하고 禮制의 必要性이 擡頭하면서 儒家가 官吏로 登用되기 始作하였고, 이에 따라 現實 制度를 뒷받침하는 텍스트로서 五經이 整理되기 始作하였다. 紀元前 87年에서 紀元前 33年까지는 發展 段階로 儒家가 本格的으로 政界에 進出하는 시기였다. 紀元前 33年에서 紀元後 23年까지는 完成 段階에 該當한다. 理論的 側面에서 五經을 中心으로 텍스트가 完備되었고 實踐的 側面에서 儒敎的 宗廟制가 確立되었으며 모든 官吏는 儒家 出身만 選拔되었다. 儒敎는 體制敎學으로 完全히 자리를 잡고 儒敎一尊體制로 들어갔다. 그러다 後漢 以後로 넘어오면서 儒敎는 沒落의 段階를 걷는다. 儒敎一尊體制는 무너지고 隋, 唐 時代에는 道敎와 佛敎가 盛行하였다.

後漢 末期 混亂스러워진 社會에서 사람들은 人間의 內面性에 대한 要求에 關心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儒敎一尊體制가 持續되는 가운데 內部 學派 間 對立을 겪고 있던 儒敎는 여전히 制度와 形式만을 重視하며 社會的 要求에 副應하지 못하고 있었고, 結局에는 衰退하게 되었다. 이처럼 儒敎가 人間의 內面性에 대한 探究를 疏忽히 하고 있을 때 道敎와 佛敎가 사람들의 內面으로 浸透하였다. 儒敎一尊體制가 무너짐에 따라 儒, 佛, 道 三敎는 서로 對立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相對의 思想과 敎理를 參照하고 吸收하면서 새로운 思想 體系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 結果 三敎는 巨大한 眞理 體系의 一部를 各各 드러내고 있다는 三敎一致論이 登場하게 되었다. 三敎一致論은 土着化 段界에 들어선 佛敎 및 儒敎와 道敎의 思想이 서로 一定 部分 結合함으로써 發生하였다. 思想의 結合을 통해 現實 世界의 變化에 對處하였던 것이다.

서로 다른 思想의 結合은 佛敎에서 먼저 일어났다. 隋, 唐 時代의 佛敎는 格義佛敎로서 佛敎와 道敎가 結合된 形態였다. 格義佛敎는 純粹한 意味에서의 印度 佛敎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는데, 산스크리트 語로 어루어진 印度 佛敎가 漢字로 飜譯되는 過程에서 老莊思想의 槪念들을 使用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外部에서 들어온 思想을 中國式으로 理解하려는 努力이며, 이를 통해 土着化가 이루어졌다. 三敎一致論이 登場하게 된 背景에는 이러한 過程들이 자리 잡고 있다. 外部에서 傳播된 佛敎는 固有한 思想인 儒敎와 道敎의 槪念을 借用하였고, 道敎는 理論的 土臺를 갖추기 위해 儒敎와 佛敎의 敎理를 가져왔으며, 儒敎는 人間과 宇宙의 窮極的 原理를 說明하기 위해 道敎와 佛敎를 參照하였다. 이처럼 各各의 長點과 短點이 드러남으로써 이를 補完하기 위한 交叉 參照가 일어나는 過程은 混合的 文化가 中國 思想의 밑바탕에 자리 잡는 結果로 이어졌다.

漢 帝國 時期 體制敎學으로 자리 잡았던 儒敎는 後漢 末期에 堤起된 內面性의 問題에 適切히 對應하지 못함으로써 體制敎學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三敎一致論이라는 새로운 思想이 登場하였다. 새로운 思想은 社會의 混亂에 따른 構成員의 集團的 要求에 의해 登場하는데, 여기에는 언제나 오랜 時間이 所要된다. 儒敎의 體制敎學化에서 三敎一致論이 登場하기까지 約 200年 동안 展開된 事態는 宋明理學이라는 또다른 思想이 成立하는 背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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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世紀는 삶의 基準으로서의 참다운 것에 대한 理性的 正當化가 要求되는 時代였다. 안셀무스는 理性的 根據에 立脚한 信仰의 知的 解明을 바탕으로 神 存在를 證明하고자 하였다. 안셀무스에서 始作된 神 存在 證明은 18世紀 칸트에 의해서 反駁되었고 이로써 宗敎的 信仰과 事實的 眞理는 서로 다른 領域으로 分離되었다.

生産力의 增加로 삶이 豊饒로워진 12世紀로 접어들면서 生活世界는 한층 複雜해졌다. 共同體와 個人의 關係는 敎會와 個人의 關係, 國家와 個人의 關係로 細分化되고, 敎會와 國家의 關係도 問題가 되었다. 삶이 複雜해지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問題가 提起되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問題 삼는 것은 삶의 基準이 되는 참다운 知識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 것이다. 베르나르두스는 福音을 통해서만 참다운 知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徹底한 靈的 生活을 통해 內面의 變化를 일으키려고 努力하였다. 이와 달리 안셀무스는 信仰과 理性의 調和를 追求하였다. 그는 人間을 超越的 次元으로 이끄는 것은 信仰이며, 理性은 自己 自身에 대한 참다운 理解를 可能하게 함으로써 信仰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했다. 理性으로 自己 自身을 理解하고 이것을 基盤으로 해서 絶對的 完全者를 向한 信仰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을 바탕으로 안셀무스는 神의 存在를 證明하고자 하였다.

안셀무스의 存在論的 神 存在 證明에 따르면 神은 더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觀念 안에서만이 아니라 觀念 밖에서도 實際로 存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神은 實際로 存在한다. 이처럼 안셀무스는 槪念으로부터 現存을 이끌어냈다. 안셀무스가 絶對的으로 完全한 存在를 觀念적인 槪念으로 想定했던 理由는 基準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神은 絶對的 完全者이기에 實在한다는 안셀무스의 立場이 極端的 實在論이라면 아벨라르두스는 穩健한 實在論者였다. 槪念은 人間의 思惟의 産物이다. 槪念만으로는 絶對的 眞理에 이를 수 없다. 理性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理性的 認識만으로 信仰을 完全히 理解할 수는 없다는 것이 아벨라르두스의 생각이었다. 그는 理性을 信仰보다 아래에 두고 理性과 信仰의 共存을 追求하였다. 理性의 힘으로 神의 存在를 證明하려는 努力은 17世紀의 데카르트에게까지 이어졌다.

데카르트는 “神의 現存이 그 분의 本質로부터 分離될 수 없다는 것은 三角形의 內角의 合이 180度라는 것이 三角形의 本質로부터 分離될 수 없는 것처럼 明白하다"고 했다. 存在論的 神 存在 證明은 안셀무스에서 데카르트까지 500年 동안 이어질 程度로 影響力이 깊었다. 이를 反駁한 것은 칸트였다. 그는 眞理를 分析判斷에 의한 必然的 眞理와 綜合判斷에 의한 事實的 眞理로 區別하였다. 分析判斷은 數學的 眞理에 局限되고, 綜合判斷에 속하는 事實的 眞理는 經驗을 통해서만 證明된다. 칸트는 이처럼 實在의 領域과 槪念의 領域 各各에 適用되는 原理와 方法論이 다르다는 것을 分明히 하면서, 經驗에 의해 證明해야 할 領域에 속한 것을 말로만 證明하려는 것이야말로 人間이 가진 深刻한 問題라고 하였다. 經驗을 통한 證明이 不可能한 神 存在 證明은 不可知論이 되었다. 宗敎와 道德은 事實的 眞理의 領域에서 除外되었고, 삶의 基準을 세우는 問題는 事實的 眞理의 領域으로부터 合意를 이끌어 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참다운 것이라는 삶의 基準에 대한 理性的 正當化가 要求되었던 12世紀의 問題狀況 앞에서 哲學者들은 槪念으로부터 神의 現存을 이끌어냄으로써 信仰과 理性의 調和를 追求하였다. 哲學은 언제나 눈앞에 펼쳐진 狀況에 대한 根本的 물음을 提起해왔다. 그것은 낡은 것이 아니며, 單純히 理性的인 問題에만 局限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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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告白錄》은 自身의 罪에 대한 告白이면서 同時에 神의 사랑에 대한 讚美다. 告白과 讚美가 同時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아우구스티누스가 自身의 삶에서 經驗한 事件들을 總體的이고 回顧的인 觀點에서 ‘否定的 必然的 契機’로 認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認識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卽自的 狀態에서 自覺的 狀態로의 移行을 보여주는 ‘意識의 經驗의 敍述’을 完成하였다.

《告白錄》은 아우구스티누스가 人生의 絶頂期에 卓越한 라틴語로 쓴 텍스트다. 《告白錄》에서는 告白과 讚美가 同時에 이루어지는데, 神의 偉大한 사랑을 느끼고 讚美하는 瞬間 罪의 告白이 일어나고, 罪를 告白하는 瞬間 偉大한 神의 사랑을 讚美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自己愛에 빠져 罪의 狀態에 놓인 人間이 神의 恩寵으로 神的인 사랑을 自覺하고 神에게로 돌아오는 過程이다. 이 過程을 歷史的 局面으로 가져와 客觀世界에 代入하면 地上의 나라에서 神의 나라로 轉換이 일어나는 《神國論》의 構造와 一致한다. 同一한 構造가 《告白錄》은 個人의 局面에서, 《神國論》은 歷史의 局面에서 펼쳐지고 있다. 믿음으로 神을 向해 올라가고 神의 恩寵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이러한 構造가 《告白錄》안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告白錄》 1~9卷은 아우구스티누스 自身의 人生에 대한 歷史的 敍述이고, 10卷은 그 過程과 現在의 狀態에 대한 觀照的 解說이다. 그리고 11~13卷은 神이 만든 世界와 神의 本質에 대한 說明이다. 1~10卷이 내가 누구인지 確認하는 過程이라면, 11~13卷은 神이 어떤 存在인지를 理解하는 過程이다. 바꿔 말하면 神과 神이 만든 世界를 理解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確認하는 過程이 반드시 必要한 것이다.

自身의 存在를 確認하는 過程인 1~9卷을 자세히 살펴보면, 1卷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으나 사랑을 自覺하지 못한 卽自的 狀態, 2~4卷은 罪惡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疏外의 狀態, 5~8卷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歸還의 過程, 그리고 9卷은 하나님의 사랑을 確認하고 깨달아 다시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돌아온 狀態다. 2~4卷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契機들이 羅列되는데, 그 契機들은 情欲, 修辭學, 마니敎다. 또한 5卷에서는 파우스트를 만나고, 암브로시우스를 만나고, 新플라톤主義 哲學을 接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自身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다시 돌아오는 過程에서 登場하는 契機들 全體를 精神과 肉體의 總體的 側面에서 理解하고 把握하여 再構成했다. 이 契機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必然的 契機들이다. 否定的이지만 必然的인 契機인 것이다. 情欲, 修辭學, 마니敎에 빠져 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낯설게 여긴다. 靈魂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靈魂의 疏外 狀態에 빠진 것인데, 이 狀態를 깨닫는 것 또한 重要하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疏外 狀態에 그대로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거쳐서 더 나은 狀態로 올라서게 되기 때문이다. 2卷의 배나무 밑에 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8卷의 무화과나무 밑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로 올라선 것이다.

“이처럼 永遠히 當身을 떠나 돌아서서(abs te) 當身 밖에서(extra te) 純粹하고 깨끗한 것을 찾으려고 할 때 곧 外道를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靈魂이 當身께로 다시 돌아가기까지는(ad te) 그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2, 6, 14) 이 文章은 《告白錄》 全體의 構造를 보여준다. 出發點인 1卷은 神의 사랑 안에(in te) 있는 狀態다. 2~4卷은 神의 사랑에서 떠나 멀어지는(abs te) 狀態, 神 밖에(extra te) 있는 狀態다. 5~8卷은 神을 向하여 가는(ad te) 狀態다. 그리고 마지막 9卷은 다시 神의 사랑 안에(in te) 있는 狀態다. in te에서 始作하여 in te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 두 in te 사이에는 差異가 있다. 처음의 in te는 自覺하지 못한 in te였지만 마지막 in te는 自覺한 in te가 되었다. 깨닫지 못한 狀態에서 깨달은 狀態로 올라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깨달음의 狀態로 올라선 자리, 1卷부터 9卷까지를 모두 내려다보는 자리에서 《告白錄》을 쓰고 있다. 自身의 삶 全體를 自身의 精神에서 觀念化된 知의 形態로 떠올리고 있다. 이는 意識이 經驗한 바를 敍述하는, ‘意識의 經驗의 敍述’이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經驗을 精神化하였다. 自身이 겪은 것들이 어떤 意味가 있는 것인지 思惟한 것이다. 겪음을 통해서 精神을 陶冶하고, 精神을 陶冶해서 靈魂을 高揚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告白錄》은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人間’이라는 目的을 前提하고 自身의 삶의 局面에서 일어나는 모든 事件들이 그 目的을 成就하기 위한 必然的 契機였음을 回顧的 觀點에서 再構成하여 敍述한 책이다. 이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中世 神學과 哲學의 定礎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한 個人으로서 人間이 精神을 陶冶함으로 高揚된 靈魂을 지닌 高貴한 存在로 올라설 수 있음을 보여주는 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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