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明理學의 成立 背景에는 儒敎의 體制敎學化에서 三敎一致論의 登場까지의 過程이 있다. 三敎一致論의 登場은 後漢 末期에 提起된 人間의 內面性에 대한 問題에 儒敎가 適切히 對應하지 못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狀況에서 儒敎, 道敎, 佛敎 사이의 思想的 混合이 일어나 中國 文化의 基盤을 이루는 思想으로 자리 잡았다.

儒敎가 體制敎學으로 자리 잡는 過程은 대략 네 段階로 나눌 수 있다. 紀元前 180年에서 紀元前 87年까지는 萌芽 段階로 約 100年 程度 所要되었다. 漢 帝國이 成立하고 禮制의 必要性이 擡頭하면서 儒家가 官吏로 登用되기 始作하였고, 이에 따라 現實 制度를 뒷받침하는 텍스트로서 五經이 整理되기 始作하였다. 紀元前 87年에서 紀元前 33年까지는 發展 段階로 儒家가 本格的으로 政界에 進出하는 시기였다. 紀元前 33年에서 紀元後 23年까지는 完成 段階에 該當한다. 理論的 側面에서 五經을 中心으로 텍스트가 完備되었고 實踐的 側面에서 儒敎的 宗廟制가 確立되었으며 모든 官吏는 儒家 出身만 選拔되었다. 儒敎는 體制敎學으로 完全히 자리를 잡고 儒敎一尊體制로 들어갔다. 그러다 後漢 以後로 넘어오면서 儒敎는 沒落의 段階를 걷는다. 儒敎一尊體制는 무너지고 隋, 唐 時代에는 道敎와 佛敎가 盛行하였다.

後漢 末期 混亂스러워진 社會에서 사람들은 人間의 內面性에 대한 要求에 關心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儒敎一尊體制가 持續되는 가운데 內部 學派 間 對立을 겪고 있던 儒敎는 여전히 制度와 形式만을 重視하며 社會的 要求에 副應하지 못하고 있었고, 結局에는 衰退하게 되었다. 이처럼 儒敎가 人間의 內面性에 대한 探究를 疏忽히 하고 있을 때 道敎와 佛敎가 사람들의 內面으로 浸透하였다. 儒敎一尊體制가 무너짐에 따라 儒, 佛, 道 三敎는 서로 對立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相對의 思想과 敎理를 參照하고 吸收하면서 새로운 思想 體系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 結果 三敎는 巨大한 眞理 體系의 一部를 各各 드러내고 있다는 三敎一致論이 登場하게 되었다. 三敎一致論은 土着化 段界에 들어선 佛敎 및 儒敎와 道敎의 思想이 서로 一定 部分 結合함으로써 發生하였다. 思想의 結合을 통해 現實 世界의 變化에 對處하였던 것이다.

서로 다른 思想의 結合은 佛敎에서 먼저 일어났다. 隋, 唐 時代의 佛敎는 格義佛敎로서 佛敎와 道敎가 結合된 形態였다. 格義佛敎는 純粹한 意味에서의 印度 佛敎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는데, 산스크리트 語로 어루어진 印度 佛敎가 漢字로 飜譯되는 過程에서 老莊思想의 槪念들을 使用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外部에서 들어온 思想을 中國式으로 理解하려는 努力이며, 이를 통해 土着化가 이루어졌다. 三敎一致論이 登場하게 된 背景에는 이러한 過程들이 자리 잡고 있다. 外部에서 傳播된 佛敎는 固有한 思想인 儒敎와 道敎의 槪念을 借用하였고, 道敎는 理論的 土臺를 갖추기 위해 儒敎와 佛敎의 敎理를 가져왔으며, 儒敎는 人間과 宇宙의 窮極的 原理를 說明하기 위해 道敎와 佛敎를 參照하였다. 이처럼 各各의 長點과 短點이 드러남으로써 이를 補完하기 위한 交叉 參照가 일어나는 過程은 混合的 文化가 中國 思想의 밑바탕에 자리 잡는 結果로 이어졌다.

漢 帝國 時期 體制敎學으로 자리 잡았던 儒敎는 後漢 末期에 堤起된 內面性의 問題에 適切히 對應하지 못함으로써 體制敎學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三敎一致論이라는 새로운 思想이 登場하였다. 새로운 思想은 社會의 混亂에 따른 構成員의 集團的 要求에 의해 登場하는데, 여기에는 언제나 오랜 時間이 所要된다. 儒敎의 體制敎學化에서 三敎一致論이 登場하기까지 約 200年 동안 展開된 事態는 宋明理學이라는 또다른 思想이 成立하는 背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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