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世紀는 삶의 基準으로서의 참다운 것에 대한 理性的 正當化가 要求되는 時代였다. 안셀무스는 理性的 根據에 立脚한 信仰의 知的 解明을 바탕으로 神 存在를 證明하고자 하였다. 안셀무스에서 始作된 神 存在 證明은 18世紀 칸트에 의해서 反駁되었고 이로써 宗敎的 信仰과 事實的 眞理는 서로 다른 領域으로 分離되었다.

生産力의 增加로 삶이 豊饒로워진 12世紀로 접어들면서 生活世界는 한층 複雜해졌다. 共同體와 個人의 關係는 敎會와 個人의 關係, 國家와 個人의 關係로 細分化되고, 敎會와 國家의 關係도 問題가 되었다. 삶이 複雜해지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問題가 提起되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問題 삼는 것은 삶의 基準이 되는 참다운 知識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 것이다. 베르나르두스는 福音을 통해서만 참다운 知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徹底한 靈的 生活을 통해 內面의 變化를 일으키려고 努力하였다. 이와 달리 안셀무스는 信仰과 理性의 調和를 追求하였다. 그는 人間을 超越的 次元으로 이끄는 것은 信仰이며, 理性은 自己 自身에 대한 참다운 理解를 可能하게 함으로써 信仰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했다. 理性으로 自己 自身을 理解하고 이것을 基盤으로 해서 絶對的 完全者를 向한 信仰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을 바탕으로 안셀무스는 神의 存在를 證明하고자 하였다.

안셀무스의 存在論的 神 存在 證明에 따르면 神은 더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觀念 안에서만이 아니라 觀念 밖에서도 實際로 存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神은 實際로 存在한다. 이처럼 안셀무스는 槪念으로부터 現存을 이끌어냈다. 안셀무스가 絶對的으로 完全한 存在를 觀念적인 槪念으로 想定했던 理由는 基準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神은 絶對的 完全者이기에 實在한다는 안셀무스의 立場이 極端的 實在論이라면 아벨라르두스는 穩健한 實在論者였다. 槪念은 人間의 思惟의 産物이다. 槪念만으로는 絶對的 眞理에 이를 수 없다. 理性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理性的 認識만으로 信仰을 完全히 理解할 수는 없다는 것이 아벨라르두스의 생각이었다. 그는 理性을 信仰보다 아래에 두고 理性과 信仰의 共存을 追求하였다. 理性의 힘으로 神의 存在를 證明하려는 努力은 17世紀의 데카르트에게까지 이어졌다.

데카르트는 “神의 現存이 그 분의 本質로부터 分離될 수 없다는 것은 三角形의 內角의 合이 180度라는 것이 三角形의 本質로부터 分離될 수 없는 것처럼 明白하다"고 했다. 存在論的 神 存在 證明은 안셀무스에서 데카르트까지 500年 동안 이어질 程度로 影響力이 깊었다. 이를 反駁한 것은 칸트였다. 그는 眞理를 分析判斷에 의한 必然的 眞理와 綜合判斷에 의한 事實的 眞理로 區別하였다. 分析判斷은 數學的 眞理에 局限되고, 綜合判斷에 속하는 事實的 眞理는 經驗을 통해서만 證明된다. 칸트는 이처럼 實在의 領域과 槪念의 領域 各各에 適用되는 原理와 方法論이 다르다는 것을 分明히 하면서, 經驗에 의해 證明해야 할 領域에 속한 것을 말로만 證明하려는 것이야말로 人間이 가진 深刻한 問題라고 하였다. 經驗을 통한 證明이 不可能한 神 存在 證明은 不可知論이 되었다. 宗敎와 道德은 事實的 眞理의 領域에서 除外되었고, 삶의 基準을 세우는 問題는 事實的 眞理의 領域으로부터 合意를 이끌어 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참다운 것이라는 삶의 基準에 대한 理性的 正當化가 要求되었던 12世紀의 問題狀況 앞에서 哲學者들은 槪念으로부터 神의 現存을 이끌어냄으로써 信仰과 理性의 調和를 追求하였다. 哲學은 언제나 눈앞에 펼쳐진 狀況에 대한 根本的 물음을 提起해왔다. 그것은 낡은 것이 아니며, 單純히 理性的인 問題에만 局限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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