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나디아 코마네치에요. 그러고 보니 제가 은퇴한 지가 벌써 20년이 됐네요. 선수생활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 정말 빠르네요.(나이 드니까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아요^^) 사실 한국은 제게 낯설지만은 않답니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참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사람들이 따뜻하고 정이 많아서 또 오고 싶더라구요. 아테네 올림픽이 얼마 안 남았네요. 한국 체조 대표팀 선전하시길 바래요. 파이팅! 그럼 지금부터 얘기 보따리를 풀어보도록 하죠.

제 인생에서 체조는 '모든 것'이에요. 체조 없는 인생은 생각해본 적도 없구요. 체조에 처음 입문한 건 6살 때였어요. 벨라 카롤리 코치 눈에 띄어서 '카롤리 체조학교'에 들어갔고, 하루 4~5시간씩 훈련하면서 체조 요정의 꿈을 키워나갔지요. 그때만해도 제가 이렇게 '거물 선수'가 될 줄은 몰랐답니다. 7살 때 국내대회에 처음 나갔는데 13등에 그쳤죠. 어찌나 실망스럽던지.. 하지만 카롤리 코치는 꾸중 대신 격려를 해주셨죠. 귀여운 에스키모 인형을 사주시면서. 그 후로 저는 국내외 대회를 휩쓸기 시작했고, 75년 유럽선수권 4관왕에 오르면서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답니다.

아~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지금의 저를 있게 한 대회잖아요. 후훗~ 그때 이단평행봉 연기를 끝내고 점수표가 공개됐을 때 잠깐 당황했었답니다. 전광판에 '1.0'이라는 수치가 나왔거든요. 내심 '9.9대'를 기대했건만 '1.0'이라니… 그런데 다 이유가 있었죠. 당시 전광판에서 표현할 수 있는 점수는 '9.99'가 최고였거든요. 10점! 올림픽체조 사상 최초의 만점이었죠. 체육관은 관중들의 우뢰와 같은 함성과 열광적인 환호로 뒤덮였고, 전 세계가 찬탄으로 물결쳤죠. 사실 저는 그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답니다. 일종의 주술에 걸린 것처럼 멍~ 했어요.

저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개인종합, 이단평행봉, 평균대에서 금메달 3개를 땄구요. 총 7차례 만점을 받았어요. 당시 여론은 찬반으로 팽팽히 갈렸답니다. 신도 아닌데 만점이라니.. 구 소련 코치 라리사 라티니나는 "그 누구도 완전할 순 없다"고 딱 잘라 말했죠. "신이 아니고서는 완벽한 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게 그때까지 체조계의 불문율이었거든요. 반면 '타임'지는 저를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날아다니는 요정’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죠. 글쎄요.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네요. "제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심판들도 10점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저의 체조인생은 찬란하고 화려했답니다. 몬트리올 올림픽 후 조국 루마니아로부터 '사회주의 영웅' 칭호를 선사 받았고, 84년에 은퇴했을 땐 부쿠레시티 스포츠광장에서 성대한 은퇴식을 가졌지요. 루마니아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어요. 음~ 물질적으로는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지만 사회주의에 염증을 느꼈죠. 자유가 그리웠어요. 결국 89년 차우셰스쿠 정권 붕괴 직전에 헝가리로 탈출한 뒤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했답니다. 96년에는 천생배필도 만났어요. L.A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 버크 코너가 제 신랑이에요. 지금은 오클라호마주에서 남편이랑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오순도순 잘 살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 체조를 떠나서 살 수 있겠습니까.^^

요즘 후배들의 연기를 보면 '참 많이 발전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선수시절 고난도 연기로 여겼던 기술이 이젠 워밍업 수준이 됐더라구요. 제가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선수는 안드레아 라두칸(루마니아)이에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인종합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는 제 일처럼 기뻤죠. 저랑 비슷하지 않나요? 작은 체구, 하나로 묶은 갈색 머리,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얼굴, 힘이 넘치는 연기.. 감기약을 잘못 복용해 금메달을 박탈당했을 땐 또 제 일처럼 슬펐죠. '당시 라두칸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파요. 분명한 건 "체조선수들이 의지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기술뿐"이라는 겁니다.

얼마전 황당한 일이 있었어요. 딕 파운드 전 IOC부위원장이 자신의 저서 '인사이드 올림픽스'에서 언급한 내용 때문인데요. 그 내용이 뭐냐면 "코마네치가 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이단평행봉에서 기록한 10점은 당시 국제체조연맹(FIG)의 실권을 잡고 있었던 구 소련이 자국 선수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점수를 높게 매기는 과정에서 실수로 나온 것"이라고 했다는군요. 너무 어이가 없더군요. 사실 몬트리올 올림픽 3개월 전에 열렸던 아메리카컵에서도 저는 2번이나 만점을 받았었거든요. 왜 그런 말을 지어냈는 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요.

저는 체조로 이룰 것은 다 이룬 것 같습니다. 올림픽체조 사상 최초로 만점을 받았고, 남들은 하나 따기도 힘들다는 올림픽 금메달을 5개나 주렁주렁 목에 걸었으니까요. 물론 명예도 얻었죠. 93년 국제체조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고, 98년에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100명의 여성'에 선정되기도 했죠. 언젠인가부터 '제2의 코마네치'라는 칭호는 여자 체조선수에게는 최고의 찬사가 됐구요. 하지만 제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코마네치를 보고서 체조선수의 꿈을 키웠다"는 선수들을 볼 때랍니다.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난 후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제가 내뱉은 첫 마디는 이거 였어요. "집에 가서 햄버거랑 사탕을 실컷 먹으면 좋겠어요" 훈련하는 동안 살찌는 음식은 먹을 수가 없거든요 14살 소녀답죠?^^ 그동안 체조 덕분에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은 것 같아요. 이젠 베풀어야 할 때가 온 거죠. 2000년부터는 라우레우스 재단 소속으로 전 세계를 방문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요. 참, 2004년 라우레우스 스포츠 어워드 신인상 수상자는 미셸 위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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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점심 무렵 찾은 태릉선수촌. 때 아닌 6월 무더위가 절정을 이룬 이날, 실외에서 선선한 곳을 찾는 건 '우물가에서 숭늉찾기'나 다름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운동장 앞 벤치는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땡볕은 접근할 엄두도 못냈다. 흥겨운 음악이 선수촌 가득 울려퍼지는 가운데 제법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김기석 선수와 얘기를 나눴다.

▲ 무지하게 많이 뺐죠

'시합보다 체중감량이 훨씬 어렵다'는 것은 체급종목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물론 김기석도 예외는 아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48kg급 선수였던 김기석에게 "체중감량이 힘들지 않았냐?"고 묻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평소 체중은 54kg. 대회 때마다 6~7kg씩 빼야 했으니 답변은 들으나 마나. "무지하게 많이 뺐죠" 그때와 비교하면 51kg급에서 뛰고 있는 지금은 양반이지만 감량의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어차피 빼는 건 똑같아요".

김기석은 3개국(이탈리아,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전지훈련에서 돌아온 다음날(3일)부터 바로 태릉선수촌 합숙에 들어갔다. 그리고 5일부터는 다시 강훈련에 돌입한다. 전지훈련지에서 감기에 걸려 고생했다는데 한국에 오자마자 너무 더워서 어쩌냐고 했더니 "지금 한국 날씨가 운동하기에는 딱 좋아요"라고 잘라 말한다. '체중과의 싸움'은 이미 시작됐다.

▲ 첫 태극마크의 추억

첫 키스, 첫 미팅, 첫사랑.. '처음'이라는 단어는 왠지 모르게 마음을 들뜨고, 설레이게 한다. 잠시나마 아련한 옛 추억에 젖어들게 해 미소짓게 만든다. 아마도 운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선수들은 '첫 시합' '첫 승리' '첫 태극마크' '첫 메달'을 평생 잊지 못할 게다. 어느덧 국가대표 6년 차 중고참이 된 김기석도 '첫 태극마크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국제대회 데뷔전은 99년 킹스컵 대회. 부푼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김기석의 첫 시합 상대는 쿠바선수 였다. 상대선수로 말할 것 같으면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2연패한 '절대강자'. 국제경험이 전무한 신참내기가 상대하기엔 너무도 벅찬 상대였다. 당연히 졌다. 그리고 '비극'은 계속 된다. 두 번째로 출전한 대회였던 99년 세계선수권 1차전 상대 역시 그 선수. 물론 졌다. "대적한다기 보단 무서웠어요" 잔뜩 얼어서 시합이고 뭐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잘 했어, 그 정도면 아주 잘 한 거야" 코치 선생님의 말소리만 귓가에 맴돌 뿐.

▲ 유쾌, 상쾌, 통쾌한 청년

"천진난만하고, 잘 놀고, 이야기 잘하고.." 본인의 말마따나 김기석은 명랑, 쾌활한 청년이다. '복싱선수'하면 으레 '한 터프'할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히려 정반대다. '후까시'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동혁' '현빈'같은 럭셔리한 이름보단 '봉수' '만수'같은 서민적인 이름이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은 모습. 김기석은 뭘 물어봐도 거침이 없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답변도 시원시원하게 잘 한다. 솔직담백한 것도 장점. 말할 때 이러 저리 재는 법이 없고, 생각나는 대로 툭툭 내뱉는다. 그러면서도 예의 바르고, 말에 조리가 있다. '삼척 동자'(잘난 척, 있는 척, 아는 척)들에게 고하노라. '김기석 반 만 닮아라'.

선수촌 내 식당, 김기석은 오랜만에 만난 다른 종목 친구들과 얘기 꽃을 피우기에 바쁘다. 나이보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도 그렇고, 신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이 꼭 사춘기 소년 같다. 여자친구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더욱 밝아진 김기석은 이 말을 꼭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수정아, 다치지 말고 운동 열심히 해라. 오빠가 응원 많이 할게”.

▲ 복싱은 운명

김기석이 처음 복싱에 입문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무렵.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뜀박질도 잘 하고, 태권도에도 소질이 있었다. 본인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 쪽으로 가길 바랐다. 하지만 앞집 사는 형 때문에 진로를 복싱으로 바꿨다. 앞집 형(류지운)은 당시 경북체고에서 잘 나가던 복싱선수. 어린 마음에 펀치를 마음껏 휘두르는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글러브를 끼게 됐다. 어찌보면 복싱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슉슉~

김기석은 한국 아마복싱을 이끌고 있는 선두주자. 6년 째 국가대표로 활약하고 있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도 땄다. 하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안쓰러운 마음과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고 한다. “지금도 썩 좋아하시진 않아요. 마음 아프잖아요” 집(대구)에 내려가면 가장 먼저 "어디 다친 데는 없냐?"면서 몸부터 챙겨주는 부모님. 그렇기에 김기석은 더 열심히 샌드백을 두드린다.

▲ 노력한 만큼 결과 얻길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 권투는 노메달에 그쳤다. 한국이 올림픽 복싱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것은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변에선 '추락' '몰락'같은 단어를 써가며 입에 거품을 물면서 한국 복싱의 앞날을 걱정했다.

김기석은 2000년 올림픽 때 한국선수로는 유일하게 8강까지 올랐지만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8강전에서 브라힘 애슬럼(프랑스)에 8-12로 판정패 해 메달 문턱에서 발길을 돌렸던 것. 그로부터 4년 후, 그는 한 체급을 올려 다시 돌아왔다. 올림픽 메달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해서 메달 따고 은퇴하고 싶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있길.

원형 탈모증 때문에 머리를 아예 밀어버려 동료들 사이에서 '빡빡이'로 통하는 김기석. 그의 앞날도 '빡빡머리'처럼 시원하게 뚫리길 바란다. 그나저나 어쩌나. 올림픽 끝나면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 만나고, 여행 다니면서 한 달간 푹 쉬고 싶다는데 9월 중순에 바로 전국체전이 있으니 말이다. 별 수 없지 뭐. 본요리(올림픽) 먼저 화끈하게 해치우고, 디저트(전국체전)로 깔끔하게 무리하는 수밖에.^^

▲ 프로필

생년월일: 1980년 9월 2일 신장/몸무게: 171cm, 54kg 출신교: 대구효동초-경북체중-경북체고-서울시립대-서울시청 국가대표 경력: 99년부터 현재까지 주요경력: 2001년 동아시안게임 금메달,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2003년 중국오픈 금메달 별명: 빡빡이 취미: 친구들과 어울리기 종교: 불교 여자친구: 박수정(경성대 수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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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9월 10일 로마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열렸다. 로마시청을 출발한 69명의 건각들은 로마 시내를 일주하는 코스를 달리고 또 달렸다.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 결승점인 콘스탄틴 개선문을 가장 먼저 통과한 사나이는 아베베 비킬라 였다. 우승기록은 2시간15분16초2. 당시 '마의 벽'으로 통하던 2시간20분대 벽을 5분 가까이 단축시킨 세계최고기록 이었다. 아프리카 흑인 최초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이기도 했다.

아베베가 올림픽 마라톤의 월계관을 쟁취한 순간 그의 조국 에티오피아 국민들은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1935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군대는 에티오피아를 무력침공 했고, 시바여왕의 후예들은 9년간에 걸쳐 피의 항전을 벌어야 했다. 그로부터 25년 후 아베베는 맨발로 옛 침략국의 수도를 정복했던 것이다.

'아베베의 전설'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베베는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해 또 다시 세계최고기록(2시간12분11초2)을 갈아치우며 올림픽 2연패를 이뤘다. 이번에는 맨발이 아니라 양말과 신발을 모두 갖추고서 였다. 경기 40일 전 맹장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대역주였다. 1위로 골인한 후 5분간 정리체조를 하면서 "앞으로 20마일(35km)은 더 달릴 수 있다"고 큰소리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에티오피아의 황실근위병 소속이던 아베베는 두 번의 올림픽 우승으로 일등병에서 하사로, 하사에서 다시 중위로 특진했다. 도쿄올림픽 직후 황제는 그에게 폴크스바겐 승용차를 하사했다.

아베베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그는 사상 초유의 올림픽 마라톤 3연패를 노렸지만 중간에서 레이스를 포기했다. 대신 후배인 마모 웰데가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했다. 그의 희생 덕분에 에티오피아는 '올림픽 마라톤 3연패'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웠다.

아베베는 6개월 뒤 명예회복을 선언하고 다시 훈련에 돌입했지만 얼마 후 자동차 충돌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평생 휠체어에 앉아 생활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 다리로 세계를 제패한 그에게 뛸 수 없다는 건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전에 '포기'라는 단어는 없었다. 대신 탁구라켓을 잡았고, 결국 피나는 노력 끝에 장애인 올림픽 탁구 남자단식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올림픽 마라톤 2연패 못지 않은 위대한 성취였다. 아베베가 진정한 올림픽 영웅으로 추앙 받는 이유다.

그는 1973년 10월 25일, 휠체어를 탄 채 또 한 번 교통사고를 당해 불과 41살의 나이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하지만 그의 질주는 현재 세계 육상계를 강타하고 있는 아프리카 '검은 돌풍'의 시발점이었고, 그가 만든 '맨발의 전설'은 여전히 아프리카인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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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여자육상 400m 금메달리스트 캐시 프리먼이에요. 7일 저녁 성화봉송 행사가 있었던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뵈었죠? 저는 이번에 아테네 올림픽 삼성전자 홍보대사로 선발되어서 전 세계를 돌고 있답니다. 5일, 세계 순회 성화봉송 릴레이 첫 날 호주 시드니에서 첫 주자로 뛰기도 했구요. 아테네 올림픽에 선수로 참가는 못하지만 저한테는 무척 의미 있는 대회가 될 것 같아요. 참, 한국은 92년 세계주니어육상선수권 이후 두 번째 방문인데요. 사람들이 친절해서 좋아요. 다음에 또 불러 주세요.

제가 처음 올림픽 무대를 밟은 건 19살 때였어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나갔는데 예선탈락 했어요. 1년 후에는 세계선수권에도 출전했지만 아쉽게도 준결승에서 떨어졌어요. 그때 호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마음 속으로 다짐을 했죠.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반드시 뭔가를 보여주겠다' 기내에 있던 멀미 봉지 뒤에다 '48.60 ATLANTA'라고 쓰면서 스스로 각오를 다졌어요. 결국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육상 400m에서 은메달을 땄죠. 기록은 48.63. 제 목표랑 근접한 수준의 기록이었지요. 덕분에 전 애보리진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고, 그후 97, 99세계선수권 400m를 연속 제패했답니다. 비로소 세계 1인자로 우뚝 선 거죠.

아시다시피 저는 애보리진(호주 원주민) 입니다. 애보리진에 대해서 잠깐 설명해드릴게요. 사실 애보리진의 생활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어요. 정부의 차별정책 때문에 대부분이 연금에 의존해서 빠듯하게 살고 있고, 교육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거든요. 1700년대에 이주한 백인들은 애보리진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죠. 1910~1970년 사이에는 동화정책이라는 명목으로 10만 명의 원주민 어린이들을 백인가정으로 입양시켰구요. 애보리진은 전체인구의 2%도 안 되는 소수민족(38만5천명)으로 전락했고, 지금은 호주 전역에 흩어져 있는 원주민 거주지역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답니다.

시드니 올림픽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성화 최종 점화자로 나선 대회인데요. 성화에 점화한 순간 경기장 지붕 위에서는 50여 개의 레이저빔이 하늘로 퍼지고, 지붕 바닥에서는 원반 받침대가 올라와 성화를 고정시켰지요. 그 순간 숨죽이고 있던 11만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댔구요. 올림픽에서 은메달 1개 딴 게 전부인 제가 베티 쿠스버트나 돈 프레이저 같은 위대한 올림피언들을 제치고 성화 점화의 영광을 차지한 건 올림픽이 인류의 화합을 상징하는 대회이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저는 애보리진 인권운동에 깊숙이 참여했거든요. 지금도 '수레바퀴는 화해의 방향으로 굴러야야 한다'는 신념에 변함이 없어요.

세계선수권 2연패를 이뤘지만 제 목표는 올림픽 이었습니다. 96년 올림픽 때 은메달에 그친 한도 풀고, 호주의 아픈 역사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어요. 9월 25일 주경기장에서 400m 결승이 열렸죠.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는 바디 수트를 입었어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뛰었지요. 마지막 50m를 남기고 막판 스퍼트에 들어갔는데, 제가 가장 먼저 골인점을 통과했죠. 관중석에서 건네준 호주 국기와 애보리진 깃발을 함께 움켜쥐고서 맨발로 트랙을 한 바퀴 돌았어요. 아, 그 가슴 벅참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저의 금메달은 핍박 받는 애보리진은 물론이고, 백인 호주국민들에게도 뜻깊은 선물이 됐을 거라 생각해요.

이쯤 해서 마리 조세 페렉(프랑스)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겠네요. 여자 400m는 대회 전부터 최고 빅카드로 꼽혔어요. 본선은 물론 예선경기까지 판매한 지 몇 분 만에 매진됐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페렉과의 맞대결은 성사되지 못했죠. 페렉이 갑자기 경기를 포기하고 도망치듯 자기 나라로 가버렸으니까요. 스토커의 협박을 견디다 못해 떠났다고 하더군요.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의 패배를 설욕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요. 생각해 보면 페렉이 뛰었어도 전 충분히 금메달을 딸 수 있었을 거에요. 이 해 400m 최고기록도 세웠고, 무엇보다도 응원의 힘을 무시할 수 없잖아요.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시드니 올림픽 때 200m와 4x400m 계주에도 출전했어요. 두 종목 모두 입상권에 들지 못했지요. 주변에서는 '실력도 안 되는데 왜 나가냐'고 했죠. 하지만 전 이기기 위해 뛰지 않아요. 항상 최선을 다 할 뿐이죠. 음~ 올림픽 기간 중에 팬레터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아마도 제가 아닐까 싶네요. 경기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팬레터가 수북이 쌓여 있었죠. 이 자리를 빌어 팬레터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네요. 올림픽은 제게 참 많은 걸 가져다 줬어요. 개인적인 영광 외에도 애보리진의 인권 문제를 널리 퍼뜨릴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소득입니다.

저는 2003년 7월에 트랙을 떠났답니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심각한 '올림픽 후유증'을 겪었어요.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는 건 분명 멋진 일이지만 육상에 대한 열정을 잃었고, 더 이상 어떤 추진력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99년 세계선수권 출전도 스스로 포기했지요. 개인적인 시련도 많았습니다. 전 매니저로부터 소송을 당하고, 남편과도 이혼을 했죠. 스타가 되면 겪게 되는 유명세도 톡톡히 치렀구요. 올림픽 후 기억나는 경기는 2002년 커먼웰스게임이에요. 1,600m 계주에서 두 번째 주자로 나서서 호주가 금메달 따는 걸 도왔죠.

요즘 저는 선수생활 할 때 못지 않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알다시피 삼성 올림픽 대사로 활동하고 있구요. 나이키랑 홍보대행 계약을 맺어서 각종 행사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시드니 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였던 제게 또 한 번 큰 기회가 주어진 것 같네요. 성화 홍보대사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또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올림픽은 출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메달을 따든 못 따든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한 선수들 모두에게 박수 많이 쳐주세요. 네? 올림픽 대사같은 말만 골라서 한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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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민턴으로 세계를 제패한 여자' 방수현.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셔틀콕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항상 돕고 사는 여자'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셔틀콕 천사'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닌다. 하지만 방수현이 대단한 이유는 단순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여서도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실천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선수시절 그가 보여준 배드민턴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강한 집념 그리고 오기와 깡 때문이다. 현재 미국 루지애나주에 거주하고 있는 방수현(33)과 이메일 인터뷰를 가졌다.

♦ 두 번째 도전, 마침내 금메달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단식 결승전. 상대는 '숙적' 수산티였다. 방수현은 1세트를 11-5로 따내며 기선을 제압했지만 2세트는 수산티의 노련미에 눌려 5-11로 패했다. 3세트마저 범실이 겹치는 바람에 3-11로 내줘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처음 밟은 올림픽 무대. 애초에 메달권 진입이 최상의 목표였기 때문에 은메달도 감지덕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으면서도 '은메달은 금메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언뜻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다시 한 번 해보자' 이를 악물었다.

방수현은 마침내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시상대 맨 위 칸에 섰다. 양 옆으로 수산티와 미아 아우디나를 거느린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준결승에서는 수산티를 통쾌하게 꺾었고, 결승전에서는 아우디나를 2-0(11:6 11:7)으로 눌렀다. 인도네시아 자매는 방수현에게 아주 혼쭐이 났다.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기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은 왠지 뭔가 빠져나간 것 같았어요".

어쩌면 방수현의 금메달은 '천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집 가는 날 등창 난다고 했던가. 방수현은 대회 직전 갑작스럽게 발목부상을 당했다. '괜찮겠지' 싶었는데 점점 부어올라 걷기조차 힘들었다. 시합을 치를 수 있을 지 걱정됐다. 물리치료도 받고, 침도 맞았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마음은 자꾸만 약해져 갔다. 그러나 다친 지 나흘 후, 살짝 걸음을 옮겼는데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아팠냐는 듯 말짱했다. "4일 동안 침 맞고 깨끗이 나아서 꾀병으로 오인 받았다니까요. 그래도 시합은 지장 없이 할 수 있었지요".

♦ 수산티, 수산티, 수산티

방수현을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한 명 있다. 바로 '코트의 여우' 수지 수산티(인도네시아)다. 수산티는 중학교 2학년 때인 87년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 처음 만난 이후 선수시절 내내 '숙적'이었다. 또한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역대전적 5승19패가 말해주듯 수산티는 중요한 대회 때마다 '징하게도' 방수현의 발목을 잡았다. 오죽하면 '수산티 징크스'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하지만 '마지막 승부'에서 웃은 사람은 방수현 이었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준결승. 방수현은 수산티를 42분 만에 2-0(11:9 11:8)으로 셧아웃 시켰다. "결승전에서 아우디나를 이기고 금메달 땄을 때보다도 수산티를 이겼을 때 더 기뻤어요". 한 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오기와 깡으로 재무장한 방수현은 마침내 세계 1인자로 우뚝 섰다.

방수현이 말하는 수산티는 '정신력이 강하고, 체력이 좋고, 승부근성이 있는 선수'라고 한다. 또한 반드시 꺾어야 될 '숙적'이자 서로 도움이 되는 좋은 '라이벌'이었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목표를 세우고 훈련할 수 있게 한 라이벌 친구였죠. 수산티가 있어서 제가 배드민턴 단식 세계 1인자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갈비랑 자장면 잘 만들어요

우리에게 영원한 배드민턴 선수로 기억되는 방수현. 그는 96년 10월,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 루지애나주에서 남편(신헌균), 아들(신하랑)이랑 셋이서 알콩달콩 살고 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특별한 삶을 사는 건 아니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산다. 요즘에는 유치원 여름방학을 맞은 하랑(5살)이와 하루 종일 논다고. "아침에는 하랑이 수영레슨 하는 데 가구요. 오후에는 피트니스센터 가서 운동하고 하랑이랑 수영 하구요. 가끔씩 공원에서 놀고, 저녁 준비해서 식구들이랑 저녁 먹구요”. 회수로 9년 차 베테랑 주부답게 요리도 수준급이다. 특히 갈비, 불고기 양념, 자장면은 일류 요리사 뺨치는 수준.

체육에 관한 공부를 더 깊이 있게 하기 위해 요즘 영어공부에 매진하고 있다는 그는 "아들이 저를 닮아서 운동신경이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배드민턴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운동을 다 즐길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멀리서도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역시 대한민국 '아줌마'답다.

♦ '네' 하지 마세요

"선수 때처럼 긴장되는 건 아니지만 많이 설레이고 부담되네요" 한국 배드민턴 사상 유일한 올림픽 단식 금메달리스트로 기록되어 있는 방수현. 아테네 올림픽에는 선수가 아닌 해설자로 가게 됐다. 사실 그는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해설 잘 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풍부한 선수경험과 논리적인 말솜씨가 어우러져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것이 시청자들의 평가다.

처음 해설을 맡은 대회는 2001년 눈높이 슈퍼시리즈. '말이 조금 빠르다' '말하는 톤이 너무 일정하다' 별별 평이 난무했는데 그래도 '처음 치고는 잘했다'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그가 공개하는 에피소드 하나. "제가 말 실수 한 게 있어서 PD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근데 중계 중에 '네'하고 대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PD 왈 '네' 하지 마세요. 그런데 제가 또 '네'해서 계속 실수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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