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여자육상 400m 금메달리스트 캐시 프리먼이에요. 7일 저녁 성화봉송 행사가 있었던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뵈었죠? 저는 이번에 아테네 올림픽 삼성전자 홍보대사로 선발되어서 전 세계를 돌고 있답니다. 5일, 세계 순회 성화봉송 릴레이 첫 날 호주 시드니에서 첫 주자로 뛰기도 했구요. 아테네 올림픽에 선수로 참가는 못하지만 저한테는 무척 의미 있는 대회가 될 것 같아요. 참, 한국은 92년 세계주니어육상선수권 이후 두 번째 방문인데요. 사람들이 친절해서 좋아요. 다음에 또 불러 주세요.

제가 처음 올림픽 무대를 밟은 건 19살 때였어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나갔는데 예선탈락 했어요. 1년 후에는 세계선수권에도 출전했지만 아쉽게도 준결승에서 떨어졌어요. 그때 호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마음 속으로 다짐을 했죠.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반드시 뭔가를 보여주겠다' 기내에 있던 멀미 봉지 뒤에다 '48.60 ATLANTA'라고 쓰면서 스스로 각오를 다졌어요. 결국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육상 400m에서 은메달을 땄죠. 기록은 48.63. 제 목표랑 근접한 수준의 기록이었지요. 덕분에 전 애보리진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고, 그후 97, 99세계선수권 400m를 연속 제패했답니다. 비로소 세계 1인자로 우뚝 선 거죠.

아시다시피 저는 애보리진(호주 원주민) 입니다. 애보리진에 대해서 잠깐 설명해드릴게요. 사실 애보리진의 생활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어요. 정부의 차별정책 때문에 대부분이 연금에 의존해서 빠듯하게 살고 있고, 교육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거든요. 1700년대에 이주한 백인들은 애보리진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죠. 1910~1970년 사이에는 동화정책이라는 명목으로 10만 명의 원주민 어린이들을 백인가정으로 입양시켰구요. 애보리진은 전체인구의 2%도 안 되는 소수민족(38만5천명)으로 전락했고, 지금은 호주 전역에 흩어져 있는 원주민 거주지역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답니다.

시드니 올림픽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성화 최종 점화자로 나선 대회인데요. 성화에 점화한 순간 경기장 지붕 위에서는 50여 개의 레이저빔이 하늘로 퍼지고, 지붕 바닥에서는 원반 받침대가 올라와 성화를 고정시켰지요. 그 순간 숨죽이고 있던 11만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댔구요. 올림픽에서 은메달 1개 딴 게 전부인 제가 베티 쿠스버트나 돈 프레이저 같은 위대한 올림피언들을 제치고 성화 점화의 영광을 차지한 건 올림픽이 인류의 화합을 상징하는 대회이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저는 애보리진 인권운동에 깊숙이 참여했거든요. 지금도 '수레바퀴는 화해의 방향으로 굴러야야 한다'는 신념에 변함이 없어요.

세계선수권 2연패를 이뤘지만 제 목표는 올림픽 이었습니다. 96년 올림픽 때 은메달에 그친 한도 풀고, 호주의 아픈 역사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어요. 9월 25일 주경기장에서 400m 결승이 열렸죠.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는 바디 수트를 입었어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뛰었지요. 마지막 50m를 남기고 막판 스퍼트에 들어갔는데, 제가 가장 먼저 골인점을 통과했죠. 관중석에서 건네준 호주 국기와 애보리진 깃발을 함께 움켜쥐고서 맨발로 트랙을 한 바퀴 돌았어요. 아, 그 가슴 벅참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저의 금메달은 핍박 받는 애보리진은 물론이고, 백인 호주국민들에게도 뜻깊은 선물이 됐을 거라 생각해요.

이쯤 해서 마리 조세 페렉(프랑스)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겠네요. 여자 400m는 대회 전부터 최고 빅카드로 꼽혔어요. 본선은 물론 예선경기까지 판매한 지 몇 분 만에 매진됐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페렉과의 맞대결은 성사되지 못했죠. 페렉이 갑자기 경기를 포기하고 도망치듯 자기 나라로 가버렸으니까요. 스토커의 협박을 견디다 못해 떠났다고 하더군요.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의 패배를 설욕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요. 생각해 보면 페렉이 뛰었어도 전 충분히 금메달을 딸 수 있었을 거에요. 이 해 400m 최고기록도 세웠고, 무엇보다도 응원의 힘을 무시할 수 없잖아요.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시드니 올림픽 때 200m와 4x400m 계주에도 출전했어요. 두 종목 모두 입상권에 들지 못했지요. 주변에서는 '실력도 안 되는데 왜 나가냐'고 했죠. 하지만 전 이기기 위해 뛰지 않아요. 항상 최선을 다 할 뿐이죠. 음~ 올림픽 기간 중에 팬레터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아마도 제가 아닐까 싶네요. 경기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팬레터가 수북이 쌓여 있었죠. 이 자리를 빌어 팬레터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네요. 올림픽은 제게 참 많은 걸 가져다 줬어요. 개인적인 영광 외에도 애보리진의 인권 문제를 널리 퍼뜨릴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소득입니다.

저는 2003년 7월에 트랙을 떠났답니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심각한 '올림픽 후유증'을 겪었어요.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는 건 분명 멋진 일이지만 육상에 대한 열정을 잃었고, 더 이상 어떤 추진력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99년 세계선수권 출전도 스스로 포기했지요. 개인적인 시련도 많았습니다. 전 매니저로부터 소송을 당하고, 남편과도 이혼을 했죠. 스타가 되면 겪게 되는 유명세도 톡톡히 치렀구요. 올림픽 후 기억나는 경기는 2002년 커먼웰스게임이에요. 1,600m 계주에서 두 번째 주자로 나서서 호주가 금메달 따는 걸 도왔죠.

요즘 저는 선수생활 할 때 못지 않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알다시피 삼성 올림픽 대사로 활동하고 있구요. 나이키랑 홍보대행 계약을 맺어서 각종 행사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시드니 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였던 제게 또 한 번 큰 기회가 주어진 것 같네요. 성화 홍보대사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또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올림픽은 출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메달을 따든 못 따든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한 선수들 모두에게 박수 많이 쳐주세요. 네? 올림픽 대사같은 말만 골라서 한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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