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나디아 코마네치에요. 그러고 보니 제가 은퇴한 지가 벌써 20년이 됐네요. 선수생활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 정말 빠르네요.(나이 드니까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아요^^) 사실 한국은 제게 낯설지만은 않답니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참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사람들이 따뜻하고 정이 많아서 또 오고 싶더라구요. 아테네 올림픽이 얼마 안 남았네요. 한국 체조 대표팀 선전하시길 바래요. 파이팅! 그럼 지금부터 얘기 보따리를 풀어보도록 하죠.

제 인생에서 체조는 '모든 것'이에요. 체조 없는 인생은 생각해본 적도 없구요. 체조에 처음 입문한 건 6살 때였어요. 벨라 카롤리 코치 눈에 띄어서 '카롤리 체조학교'에 들어갔고, 하루 4~5시간씩 훈련하면서 체조 요정의 꿈을 키워나갔지요. 그때만해도 제가 이렇게 '거물 선수'가 될 줄은 몰랐답니다. 7살 때 국내대회에 처음 나갔는데 13등에 그쳤죠. 어찌나 실망스럽던지.. 하지만 카롤리 코치는 꾸중 대신 격려를 해주셨죠. 귀여운 에스키모 인형을 사주시면서. 그 후로 저는 국내외 대회를 휩쓸기 시작했고, 75년 유럽선수권 4관왕에 오르면서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답니다.

아~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지금의 저를 있게 한 대회잖아요. 후훗~ 그때 이단평행봉 연기를 끝내고 점수표가 공개됐을 때 잠깐 당황했었답니다. 전광판에 '1.0'이라는 수치가 나왔거든요. 내심 '9.9대'를 기대했건만 '1.0'이라니… 그런데 다 이유가 있었죠. 당시 전광판에서 표현할 수 있는 점수는 '9.99'가 최고였거든요. 10점! 올림픽체조 사상 최초의 만점이었죠. 체육관은 관중들의 우뢰와 같은 함성과 열광적인 환호로 뒤덮였고, 전 세계가 찬탄으로 물결쳤죠. 사실 저는 그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답니다. 일종의 주술에 걸린 것처럼 멍~ 했어요.

저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개인종합, 이단평행봉, 평균대에서 금메달 3개를 땄구요. 총 7차례 만점을 받았어요. 당시 여론은 찬반으로 팽팽히 갈렸답니다. 신도 아닌데 만점이라니.. 구 소련 코치 라리사 라티니나는 "그 누구도 완전할 순 없다"고 딱 잘라 말했죠. "신이 아니고서는 완벽한 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게 그때까지 체조계의 불문율이었거든요. 반면 '타임'지는 저를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날아다니는 요정’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죠. 글쎄요.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네요. "제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심판들도 10점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저의 체조인생은 찬란하고 화려했답니다. 몬트리올 올림픽 후 조국 루마니아로부터 '사회주의 영웅' 칭호를 선사 받았고, 84년에 은퇴했을 땐 부쿠레시티 스포츠광장에서 성대한 은퇴식을 가졌지요. 루마니아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어요. 음~ 물질적으로는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지만 사회주의에 염증을 느꼈죠. 자유가 그리웠어요. 결국 89년 차우셰스쿠 정권 붕괴 직전에 헝가리로 탈출한 뒤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했답니다. 96년에는 천생배필도 만났어요. L.A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 버크 코너가 제 신랑이에요. 지금은 오클라호마주에서 남편이랑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오순도순 잘 살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 체조를 떠나서 살 수 있겠습니까.^^

요즘 후배들의 연기를 보면 '참 많이 발전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선수시절 고난도 연기로 여겼던 기술이 이젠 워밍업 수준이 됐더라구요. 제가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선수는 안드레아 라두칸(루마니아)이에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인종합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는 제 일처럼 기뻤죠. 저랑 비슷하지 않나요? 작은 체구, 하나로 묶은 갈색 머리,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얼굴, 힘이 넘치는 연기.. 감기약을 잘못 복용해 금메달을 박탈당했을 땐 또 제 일처럼 슬펐죠. '당시 라두칸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파요. 분명한 건 "체조선수들이 의지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기술뿐"이라는 겁니다.

얼마전 황당한 일이 있었어요. 딕 파운드 전 IOC부위원장이 자신의 저서 '인사이드 올림픽스'에서 언급한 내용 때문인데요. 그 내용이 뭐냐면 "코마네치가 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이단평행봉에서 기록한 10점은 당시 국제체조연맹(FIG)의 실권을 잡고 있었던 구 소련이 자국 선수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점수를 높게 매기는 과정에서 실수로 나온 것"이라고 했다는군요. 너무 어이가 없더군요. 사실 몬트리올 올림픽 3개월 전에 열렸던 아메리카컵에서도 저는 2번이나 만점을 받았었거든요. 왜 그런 말을 지어냈는 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요.

저는 체조로 이룰 것은 다 이룬 것 같습니다. 올림픽체조 사상 최초로 만점을 받았고, 남들은 하나 따기도 힘들다는 올림픽 금메달을 5개나 주렁주렁 목에 걸었으니까요. 물론 명예도 얻었죠. 93년 국제체조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고, 98년에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100명의 여성'에 선정되기도 했죠. 언젠인가부터 '제2의 코마네치'라는 칭호는 여자 체조선수에게는 최고의 찬사가 됐구요. 하지만 제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코마네치를 보고서 체조선수의 꿈을 키웠다"는 선수들을 볼 때랍니다.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난 후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제가 내뱉은 첫 마디는 이거 였어요. "집에 가서 햄버거랑 사탕을 실컷 먹으면 좋겠어요" 훈련하는 동안 살찌는 음식은 먹을 수가 없거든요 14살 소녀답죠?^^ 그동안 체조 덕분에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은 것 같아요. 이젠 베풀어야 할 때가 온 거죠. 2000년부터는 라우레우스 재단 소속으로 전 세계를 방문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요. 참, 2004년 라우레우스 스포츠 어워드 신인상 수상자는 미셸 위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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