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민턴으로 세계를 제패한 여자' 방수현.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셔틀콕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항상 돕고 사는 여자'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셔틀콕 천사'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닌다. 하지만 방수현이 대단한 이유는 단순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여서도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실천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선수시절 그가 보여준 배드민턴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강한 집념 그리고 오기와 깡 때문이다. 현재 미국 루지애나주에 거주하고 있는 방수현(33)과 이메일 인터뷰를 가졌다.
♦ 두 번째 도전, 마침내 금메달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단식 결승전. 상대는 '숙적' 수산티였다. 방수현은 1세트를 11-5로 따내며 기선을 제압했지만 2세트는 수산티의 노련미에 눌려 5-11로 패했다. 3세트마저 범실이 겹치는 바람에 3-11로 내줘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처음 밟은 올림픽 무대. 애초에 메달권 진입이 최상의 목표였기 때문에 은메달도 감지덕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으면서도 '은메달은 금메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언뜻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다시 한 번 해보자' 이를 악물었다.
방수현은 마침내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시상대 맨 위 칸에 섰다. 양 옆으로 수산티와 미아 아우디나를 거느린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준결승에서는 수산티를 통쾌하게 꺾었고, 결승전에서는 아우디나를 2-0(11:6 11:7)으로 눌렀다. 인도네시아 자매는 방수현에게 아주 혼쭐이 났다.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기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은 왠지 뭔가 빠져나간 것 같았어요".
어쩌면 방수현의 금메달은 '천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집 가는 날 등창 난다고 했던가. 방수현은 대회 직전 갑작스럽게 발목부상을 당했다. '괜찮겠지' 싶었는데 점점 부어올라 걷기조차 힘들었다. 시합을 치를 수 있을 지 걱정됐다. 물리치료도 받고, 침도 맞았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마음은 자꾸만 약해져 갔다. 그러나 다친 지 나흘 후, 살짝 걸음을 옮겼는데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아팠냐는 듯 말짱했다. "4일 동안 침 맞고 깨끗이 나아서 꾀병으로 오인 받았다니까요. 그래도 시합은 지장 없이 할 수 있었지요".
♦ 수산티, 수산티, 수산티
방수현을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한 명 있다. 바로 '코트의 여우' 수지 수산티(인도네시아)다. 수산티는 중학교 2학년 때인 87년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 처음 만난 이후 선수시절 내내 '숙적'이었다. 또한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역대전적 5승19패가 말해주듯 수산티는 중요한 대회 때마다 '징하게도' 방수현의 발목을 잡았다. 오죽하면 '수산티 징크스'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하지만 '마지막 승부'에서 웃은 사람은 방수현 이었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준결승. 방수현은 수산티를 42분 만에 2-0(11:9 11:8)으로 셧아웃 시켰다. "결승전에서 아우디나를 이기고 금메달 땄을 때보다도 수산티를 이겼을 때 더 기뻤어요". 한 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오기와 깡으로 재무장한 방수현은 마침내 세계 1인자로 우뚝 섰다.
방수현이 말하는 수산티는 '정신력이 강하고, 체력이 좋고, 승부근성이 있는 선수'라고 한다. 또한 반드시 꺾어야 될 '숙적'이자 서로 도움이 되는 좋은 '라이벌'이었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목표를 세우고 훈련할 수 있게 한 라이벌 친구였죠. 수산티가 있어서 제가 배드민턴 단식 세계 1인자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갈비랑 자장면 잘 만들어요
우리에게 영원한 배드민턴 선수로 기억되는 방수현. 그는 96년 10월,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 루지애나주에서 남편(신헌균), 아들(신하랑)이랑 셋이서 알콩달콩 살고 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특별한 삶을 사는 건 아니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산다. 요즘에는 유치원 여름방학을 맞은 하랑(5살)이와 하루 종일 논다고. "아침에는 하랑이 수영레슨 하는 데 가구요. 오후에는 피트니스센터 가서 운동하고 하랑이랑 수영 하구요. 가끔씩 공원에서 놀고, 저녁 준비해서 식구들이랑 저녁 먹구요”. 회수로 9년 차 베테랑 주부답게 요리도 수준급이다. 특히 갈비, 불고기 양념, 자장면은 일류 요리사 뺨치는 수준.
체육에 관한 공부를 더 깊이 있게 하기 위해 요즘 영어공부에 매진하고 있다는 그는 "아들이 저를 닮아서 운동신경이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배드민턴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운동을 다 즐길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멀리서도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역시 대한민국 '아줌마'답다.
♦ '네' 하지 마세요
"선수 때처럼 긴장되는 건 아니지만 많이 설레이고 부담되네요" 한국 배드민턴 사상 유일한 올림픽 단식 금메달리스트로 기록되어 있는 방수현. 아테네 올림픽에는 선수가 아닌 해설자로 가게 됐다. 사실 그는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해설 잘 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풍부한 선수경험과 논리적인 말솜씨가 어우러져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것이 시청자들의 평가다.
처음 해설을 맡은 대회는 2001년 눈높이 슈퍼시리즈. '말이 조금 빠르다' '말하는 톤이 너무 일정하다' 별별 평이 난무했는데 그래도 '처음 치고는 잘했다'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그가 공개하는 에피소드 하나. "제가 말 실수 한 게 있어서 PD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근데 중계 중에 '네'하고 대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PD 왈 '네' 하지 마세요. 그런데 제가 또 '네'해서 계속 실수했던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