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무연고 처리해주세요 -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 제13회 브런치북 종합 부문 대상작
이유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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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무연고 처리해 주세요>를 읽으면서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서로 미워하고 지지고 볶아도 함께 한 시간만큼 사랑과 애정이 쌓이고, 그 아래에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 단단한 끈 같은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기에 존재조차 희미했던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라니.. 나는 어안이 벙벙할 것 같다.

책의 저자 이유진 씨는 어린 시절 헤어진 아버지를 수십 년 만에 시신으로 마주한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작은방에는 차마 버리지 못한 오래된 통장과 낙첨된 로또 용지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발견된 짧은 메모 한 장.

“아침엔 당뇨약, 저녁엔 혈압약

그리고 그 아래, 마지막 줄.

꼭 무연고 처리해 주세요.”

혹시나 가족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일까? 이리저리 쫓기며 자신의 흔적조차 지워가며 살았던 아버지는 이제 관보다 가볍다. 아들은 유골이 되어서 한 줌으로 남은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저자는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기보다는 꾹꾹 눌러 담는다. 사물과 풍경의 묘사를 통해 살짝 드러나는 그의 미묘한 감정선.

“그제야 아버지의 죽음은 내가 혼자서도 짊어질 수 있는 무게가 되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을 한 후 제주로 돌아온 후에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아버지의 빚을 알리는 우편물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처리하는 것도 그의 몫이 되었다. 눌러놓았던 감정과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가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이는 아내와의 다툼과 정신적 불안으로 이어지는데...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너무 안쓰러웠다. 홀로 자신을 키워야 했던 엄마와의 삶, 그 어떤 약속도 없이 갑자기 시신으로 돌아온 아버지 그리고 떠난 후에 남겨진 빚 문제 등등등 이 와중에 저자가 느꼈을만한 회한, 분노, 우울, 죄책감 등을 그렇게 눌러 담고 감추느라 공황증상이 찾아온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저자는 어릴 적 헤어진 아버지와의 관계를 어떤 감각으로만 기억한다. 짙은 담배 냄새, 함께 먹었던 자장면, 닮은 입술의 모습 등등 어쩌면 이 책을 쓴 이유는 ‘무연고’를 ‘연고’로 다시 돌리고자 하는 마음 때문은 아니었나 싶었다. 서류뿐만 아니라 몸에도 남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동시에 현재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떠올리는 저자.

출산의 고통을 이겨내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아내.. 자신을 보호하느라 아버지에게 맞아서 청력을 잃은 어머니.. 마당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이러한 기억과 이미지를 눈에 담고 머릿속에 새기는 가운데 연고의 의미는 단지 혈연이라는 형식적 관계를 뛰어넘어서 곁을 지키며 삶을 함께하는 것에 가까워진다.

저자의 문장은 감각적인 반면 감정은 상당히 절제하고 있다.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나 연민 혹은 분노 등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저자의 정리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도 좀 느껴보고 싶었다. 전체적으로 글은 깔끔하고 담백하게 느껴지면서도 다소 거리감이 느껴졌던 것도 그래서인가?

<꼭 무연고 처리해 주세요>는 ‘무연고’라는 단어에서 시작된 글이었으나 결국은 저자 자신의 ‘연고’를 짚어가면서 끝내는 이야기다. 가족이라는 단어 아래 묻힌 단단한 끈을 다시 되찾는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우리는 가족 안에서 때로는 상처받고 고통받지만 결국 그 안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들이다. 끊어진 자리를 다시 한번 복구하는 한 소방관의 이야기 <꼭 무연고 처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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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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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윤서 지음 / 더블:엔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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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그림은 설명되지 않는다>는 그림 없는 그림 에세이다. 

처음엔 그림이나 사진 한 장 없이 활자로만 빽빽한 지면에 

다소 놀랐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드는 저자의 

유려한 설명 덕분에 독서가 너무 즐거웠다.



이 책에는 이미 유명한 화가나 예술가들 외에도 이름이 낯선 여러 현대 미술가들을 

만나볼 수 있다. 작품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작가들의 삶의 경험과 궤적을 

들여다보고 나니,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 세계가 더욱더 궁금해졌다.



우선 책의 구성에 대해 말하자면, 이 책은 '희, 노, 애, 락'이라는 네 가지 감정으로 

나뉜다. 각 감정의 영역에 어울리는 예술가들을 배치하여 '감정'이라는 큰 주제를 

두고 독자들이 서로 다른 작품 세계를 탐구할 수 있게 해준다.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전문 도슨트의 안내를 받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저자의 

설명에는 전문가 특유의 깊이가 있었고 그 덕분에 작품을 직접 보기에 앞서서 

어느 정도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78쪽 <불안정한 형태로 버텨낸 분노>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설치미술가 에바 헤세의 작품과 삶을 다룬 글인데, 설치 미술이라는 예술 장르의 

독특함을 맛볼 수 있었다.



설명을 듣고 나름 상상을 해본 후 QR코드를 통해 그녀의 작품을 감상했는데,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면 조금 어리둥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이런 종류도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나?''



그러나 책이 들려주는 에바 헤세의 삶과 그녀의 작품 세계를 따라가며 <컨틴전트>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죽음 성인이 된 후 겪은 결혼 생활의 불행과 큰 질병까지..



삶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불안한 것이라는 감각은 설치미술 <컨틴전트> 를 

통해서 뚜렷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인간이란 완성되고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늘 

흔들리고 변화하는 존재라고 속삭이는 듯한 작품이었다.



이번 독서를 통해 내 취향도 또 새롭게 알게 됐다. 나는 강렬한 형태와 감정을 

드러내는 예술가에게 끌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특히 '노'에 속한 화가들의 삶과 

작품에 더 마음이 갔다.



분노의 표현 이면에는 누군가와 연대하고픈 마음이 컸던 

장 미셸 바스키아,  인간 영혼의 비극적 상태를 직시했던 

오스카 코코슈카, 삶과 죽음을 굳이 분리하지 않았던 프란시스 베이컨 등



이들의 작품은 때로는 매우 강렬하게, 또 때로는 다소 불편함 으로도 다가왔으나 

전반적으로 내 눈에는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비췄다.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인간의 삶은 늘 흔들리고 좌절하고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그 무엇이지 않을까?



<그림은 설명되지 않는다>는 상상을 통해 그림과 가까워지는 즐거움을 

알려준 책이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 머릿속으로  작품을 그려보고, QR코드를 

통해 실제 모습을 감상하는 과정이 신선했다. 내가 그려본 작품과 실제 모습이 

비슷하게 보일 때 뭔가 카타르시스도 느꼈다.



처음엔 그림 한 점 없는 지면이 다소 낯설었으나

저자가 전하는 풍부한 해설에 감동하고 내가 상상한 그림과 작가들의 진짜 그림이 

비슷할 때 한 번 더 감동하게 되는 책 <그림은 설명되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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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설명되지않는다 #이윤서 #더블엔 #르온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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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의 가장자리 - 부서진 유년의 파편에서 출현한 신경과학자 이야기
데이비드 수실로 지음, 이충호 옮김 / 북하우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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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 난 인생에서

'나'로 창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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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뛰어난 과학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 <카오스의 가장자리> 그런데 이 책은 이 문장만으로는 약간 소개가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저자 데이비드 수실로는 다소 불행했으나 지식 탐구로 빛났던 어린 시절을 들려준다. 매우 혼란스러운 나날 속에서도 잘 자라난 것이 놀랍기만 하다. 누군가는 어려운 환경을 벗어나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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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실로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안정했다. 부모의 약물 중독과 어머니의 정신적 어려움으로 제대로 된 돌봄을 받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누나와 함께 들어간 보육원에서도 폭력과 부당한 처벌을 겪어야만 했다. 이후 옮겨간 기숙학교 역시 편안한 곳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종교 시설에서 출발한 밀턴허시스쿨은 난해한 규칙들과 이해할 수 없는 처벌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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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읽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이야기긴 하지만 저자는 아주 솔직하고 담백하게 어린 시절을 들려준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순간들도 담담하게 들려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평범함이 그에게는 일찌감치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 안타까웠다.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독자라면 어린 수실로를 보면서 공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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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의 삶을 바꾼 계기 중 하나가 비디오게임이었다는 게 아주 재미있는 포인트였다. 나도 어린 시절에 한때는 특정 오락 게임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비디오게임에서 시작된 관심이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으로,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뇌와 마음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그냥 좋아서 빠진 일이 미래의 나를 결정짓게 된 것이다! 아마도 어린 자녀가 있는 부모님들이 이 지점을 유심히 살펴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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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카오스의 가장자리>에는 위태로웠던 어린 시절에 대한 개인사와 함께 신경과학,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쳐놓는다. 참으로 재미있는 부분을 말하자면, 주로 과학의 대상이 되는 뇌가 이 책에서는 삶과 엮이면서 문학적 요소가 된다는 점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지금의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살피고 심리치료를 통해서 깊이 있게 스스로를 파악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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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인이 된 뒤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에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고 박사과정에서는 오랫동안 쌓아온 연구의 기반이 흔들리는 좌절도 겪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보육원 생활까지 한 누나와 다른 아이들이 그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우리 인생에는 어쩌면 너무나 많은 변수들이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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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아니라 비늘로 이루어져 반짝이는 강을 상상해 보라. 햇빛을 반사하는 수천 마리 물고기가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협을 하면서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이러한 무리 행동은 창발이라 부르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조율하는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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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창발'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는 것 같다. 수많은 경험과 만남이 어떤 식으로든 조화를 이루며 시너지 효과를 내고 지금의 '나'를 만드는 현상. 여러 요소의 상호작용에서 새로운 특성이 나타나는 '창발'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현재의 성공한 모습을 그려내는 듯하다. 그에게는 관심을 주고 가능성을 믿어주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도운 손길이 있었다. 그리고 수실로 자신도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온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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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성장과정을 딛고 성공한 과학자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을 담은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이 책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과학적 이론과 개념 설명도 나는 재미있었다. 고등부 영어 수업을 할 때 가끔 등장하는 단어 "비선형성(nonlinearity)"이 딱 나와서 놀랐다. 술이나 날씨 등으로 설명해 주니까 조금 이해하기 쉬웠던 것 같다. 수학과 과학이 어쩌면 그의 삶에 등불이 되어주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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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의 가장자리>를 읽는 동안 저자가 이룬 성취도 놀랍지만 그를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고마웠다. 물론 그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봐 준 사람들 덕분에 그가 지금의 성공한 과학자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은 매우 매력적이다. 카오스, 질서와 무질서, 창발 등 복잡한 과학 이론과 한 개인의 과거에 대한 세밀한 회상이 만나면서 아주 멋진 책이 탄생했다. 개인적 서사와 과학이 만나 독특한 감성과 지성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책 <카오스의 가장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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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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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길고 투쟁은 진행 중 - 운동 좀 하던 할머니들의 현재진행형 인생 이야기
변정정희 지음 / 현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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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순히 돈만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아주 조그맣더라도 사회에 쓸모가 되고자 한다.

그렇게 일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인생은 길고 투쟁은 진행 중>을 읽다가 눈에 띈 문장을 적어본다. 일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말은 내게 아주 의미 있게 다가왔다. 한때는 맹렬한 여성 노동자였던 분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니 이 문장이 좀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이 책은 1970~80년대 노동 현장에서 활동했던 일곱 여성의 삶을 따라가는 일종의 르포이다. 우리 엄마이자 이모 혹은 나이가 좀 있는 언니들인 이들은 회사와 공장에서 열심히 일했고 부당함과 차별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것은 바로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일터’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아무리 열악하더라도 그들에게 일터는 친구들이 있고, 가족을 먹여 살릴 월급을 주고 또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의 현장이었다. 따라서 그곳에서 자신의 권리를 찾고자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투쟁한 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컴퓨터 부품 회사인 콘트롤데이터에서 일한 정화 씨. 그녀는 여성 노동자가 대부분인 공장에서 여성들이 편안히 근무할 수 있는 노동 조건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부양가족을 조사해 임금 인상의 근거를 마련하고, 생리 휴가와 같은 건강권을 확보했으며 교양 강좌 등도 개최했다.



70년대, 노동조건이 아주 열악했던 시기에 그렇게 일터를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갔다는 점이 놀라웠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살피고 해결하기는 과정이 멋져 보였다.



청계 피복 노동조합 출신 재봉사 박연준 씨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사진 속에서 보는 모습은 넉넉한 중년 부인으로 느껴졌지만 그녀의 삶에는 미싱사의 시다로 일하면서 호된 대우와 질책을 견뎌야 했던 세월이 있었다. 노동은 둘째치고 폭력이 난무했던 과거의 노동 현장... 가슴이 매우 아팠다.



그러나 당시에 이들에게 장애가 된 것은 열악한 노동환경도, 쥐꼬리만한 월급도 아니었다. 군부독재와 같은 혼란스러웠던 사회 환경과 특히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가 여성들이 마음껏 일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였다.



지금은 시인으로 활동하는 정명자 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일방직 똥물 사건은 특히 충격적이었다. 노조위원장을 여성들로 뽑아서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여성들에게 회사 측도 아니고 같은 노동자인 남성들이 똥물을 뿌린 사건!! 너무나 치욕적이고 폭력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70~80년대 당시에는 여성 노동자들 사이에 연대 의식이 살아있었고 해고나 체포 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겁 없이 싸웠다는 점이다. 이 책 표지에 나와 있는 것처럼 진짜 “치열하게 일하고 신나게 싸웠던 그 시대 언니들 이야기”가 맞다. 탄압과 폭력 속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인생은 길고 투쟁은 진행 중>이라는 제목을 다시 보게 된다. 젊은 시절의 치열한 투쟁은 지금 이들의 삶에도 녹아 있는 듯하다. 복지관에서 이웃을 살피고, 가진 것을 나누고, 자신의 경험을 말과 글로 전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부당함 앞에서 당당히 권리를 주장하고 서로의 곁을 지켰던 마음이, 오랜 세월 이들의 삶을 지탱해온 힘이 아니었을까.



책을 읽으며 처음 눈길을 끌었던 ‘일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문장을 다시 떠올린다. 이들은 자신뿐 아니라 동료들도 그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일터를 바꾸려 애썼다. 치열하게 일하고 싸우며 삶을 가꾸어온 우리 엄마, 이모, 언니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 시대 여성 노동자들의 생생한 삶과 목소리를 만나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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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
성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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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갈라지는 강 위의 얼음

삶이라는 것은 원래 이렇게 불안하다.

성혜령의 소설집 <대부호>를 읽다 보니 떠오른 이미지이다.


우리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죽음과 질병 그리고 파산 등이 삶의 기반을 무너뜨릴지라도.

이 책의 인물들은 불행을 두려워하면서 자신의 고통이

다른 누구의 고통보다 더 크고 절박하다 느끼며 살아간다.


여덟 편의 단편은 익숙한 풍경에서 시작된다.

나만의 집을 구하기 위해 부동산 임장 모임에 나가고

오래 알고 지낸 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감정 쓰레기통이 된 기분을 느낀다. 생계를 위해

입주 간병 일을 시작하는, 우리가 흔히 보는 일상이다.


그러나 평범하게 이어지던 이야기는 어느 순간

뜻밖의 진실을 드러내며 독자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다.

마치 높은 곳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불안하다.

익숙한 관계에서 숨겨진 악의가 표출되고

깊은 단절의 틈에서 드러나는 외로움이 서늘하다.


<임장> 부동산 모임의 리더인 민연 언니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서 사람들은 직접 그녀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런데 전혀 예상 못한 광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악> 가족이라는 허울좋은 껍데기 아래 놓인

피로와 갈등이 느껴졌던 단편. 가족이기에 감당해야 하는

책임은 때로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


<나방파리> 오래된 친분 속 숨겨져있던 어두운 악의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상대를 이해할 마음의 여유는 없다.


<독재자의 오른발> 생계를 위해 입주 간병인으로

일하는 주인공. 새로 맡은 환자는 비교적 수월해 보였다.

그러나 환자가 저지른 악행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펼쳐진다.


이외에도 <원경>에서는 주인공 신오의 끔찍한 외로움이

지면을 뚫고 나에게 느껴졌고 <운석>에서는 죽기 전에 이미

돌에 갇혀버린 듯한 한 남자의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표제작 <대부호>에서는 가족의 죽음이 남긴 끔찍한 상처..

내 눈에는 모두들 그 상처가 남긴 고통이라는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팔을 휘젓는 것으로 보였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내 고통에 몰두하느라 다른 이를

돌아볼 수 없는 게 인간이다. 단편 <베인>에서 아연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눈앞에서 누가 총을 맞고 쓰러져도, 종이에 베인

내 손가락 상처가 더 아픈 게 인간이야. 언니는 다를 거라고

착각하지 마.”


소설집 <대부호>의 인물들은 불행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미칠듯한 속도로 도망치거나 회피한다. 그러나 회피하는

자신이 타인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 와중에 결국 스스로에게 남는 것도 끔찍한 외로움과

고립감이다.


달콤하게 위로하는 말 하나 없이 아주 서늘한 목소리로

이것이 인간의 본모습이라고 보여주는 듯한

단편소설집 <대부호>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대부호 #성혜령 #문학동네 #한국소설 #단편소설집 #도서협찬 #소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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