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과 함께 춤을 - 아프다고 삶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
다리아 외 지음, 조한진희(반다) 엮음, 다른몸들 기획 / 푸른숲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 그 누구도

아픈 것 때문에

또 다른 아픔을 얻지 않기를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듣기에도 마음이 무거운 질병과 함께 춤을 추다니, 대단히 낙관적인 성품의 사람이 아니라면 힘든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질병과 팔짱 끼고 춤추면서 살아가는 게 불가능한 일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어차피 늙어갈 것이고 노화와 함께 질병이라는 친구가 함께 찾아올 거라면, 두려워하고 움츠리기보다는 두 팔 벌려 활짝 맞이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 책은 다른몸들에서 기획하고 조한진희씨가 엮은 에세이인데, 다리아 외 4명의 작가들이 쓴 글이 단편집처럼 묶여있다. 우리나라 사회의 시선 때문에라도 질병과 관련된 경험을 고백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들어서 우리나라의 경우 지나치게 건강과 젊음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까. 그리고 가족이라도 누군가의 질병 고백 - 아프고 힘들었던 이야기 -를 듣는 것을 힘겨워한다. 하지만 이 책을 엮은 조한진희 씨는 들어가는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아픈 몸으로서 겪는 사회적 고통으로부터 ' 회복' 되길 바라고, 자신의 몸을 ' 다른 몸'으로 수용하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 그리고 타인의 질병 경험을 읽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신의 질병 경험을 말하고 쓰기를 바란다 "

[ 나는 내 질병이 부끄럽지 않다 ]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글을 쓴 다리아 씨는 수년 동안 반복되는 난소낭종 때문에 난소를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게 된다. 남자친구와 지인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해 주지만 본인이 스스로 질병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녀의 질병 앞에서 의연하게 대처하고 배려해 준 남자친구와 결혼을 했지만 시어머니는 그녀의 불완전해진 자궁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 혹시나 손주 출산에 지장이 있을까 봐.

" 나 자신과 세상, 모든 것에 화가 났다. 왜 혹이 생겼는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예민한 성격 탓일까. 아니면 만병의 근원이라는 스트레스 때문인가. (......) 몸을 돌보지 않은 생활 습관이 문제였을까.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

" 셋이 둘러앉아 어머니의 주도로 기도하는데 집에 대한 내용이 이어지다 갑자기 이런 말이 들렸다. " 다리아의 난소의 혹이 없어지길.... " (...) 순간 저 멀리 어딘가로 사라지고만 싶었다 ."

나도 몇 년 전에 담낭과 관련된 수술을 받았었다. 크다면 큰 수술이고 뭐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그전까지는 정말 날아다닐 수도 있을 만큼 건강하다고 자부했기에 나에겐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러나 수술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픈 나를 보는 가족들의 시선, 바로 그것이었다. 왕래가 드물어지고 내가 아픔을 호소할 때마다 버거워하던 눈빛.... 한동안 아파도 아프다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로 살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고, 또 춤과 같은 동작으로 표현해내는 게 사람을 얼마나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질병을 앓고 있다고 해서 자책감과 자괴감이라는 감옥을 만들진 말자. 과연 질병과 건강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명확하게 나눌 수 있을까? 인간이기에 그건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앓고 있다. 아파도 괜찮은 사회로 나아가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퍼펙트 와이프
JP 덜레이니 지음, 강경이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비밀을 가둔 상자, 진실로 향하는 잠긴 문

사라진 그녀보다 더 그녀다운 존재

당신에게 어울리는 완벽한 아내

퍼펙트 와이프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갑자기 눈을 뜬 애비. 그녀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같은 방에 있던 낯선 남자가 자신이 남편인 팀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애비에게 그녀가 훌륭한 아내이자 창조성으로 가득찬 예술가이며 장애가 있는 아이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아내, 즉 완벽한 아내라고 말한다. 소설은 이렇게 전략적으로 시작된다. 독자들은 애비와 공감하면서, 자신이 누군지, 남편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애비를 불안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그녀는 곧 남편을 통해서 자신이 죽은 아내를 본따서 만들어진 ' 코봇 ' ( companion robot : 일종의 배우자 로봇? ) 이라는 걸 알게 된다. 동시에 그녀에게 ' 인간 ' 애비 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의 기억과 정보가 조금씩 흘러들어오면서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충격적인 현실에 조금 흔들렸지만 곧 안정을 찾는 현재 ' 인공지능 ' 애비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들 대니와 감정적 유대를 쌓으려고 노력하고 남편 팀에게도 완벽한 아내가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JP 덜레이니는 [ 더 걸 비포 ] 와 [ 빌리브 미 ] 를 선보인 작가인데, 지적이고 독자들을 성찰하게 만드는 심리 스릴러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특히 이 책에는 현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듯, 최첨단 기술인 ' AI, 즉 인공 지능 ' 이 등장한다. 식당에서 웨이팅을 하고, 공항에서 안내 서비스를 하는 로봇이 등장하는 시대인데, 죽은 가족을 대신할 수 있는 로봇이 미래에 등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은 곧 깨닫게 된다.

" 퍼펙트 와이프 " 는 공상 과학과 긴장감 그리고 미스터리가 결합된 심리 스릴러이자 끝부분에 드러나는 폭발적인 반전이 매력적인 소설이다. AI 애비가 간직하고 있던 잠재적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독자들은 심장이 쿵쾅거림과 동시에 크나큰 슬픔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뒤엉킨 실타래 마냥 복잡하게 꼬여있던, 김서린 창문처럼 흐리기만 하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애비는 더 이상 완벽한 아내로 살아갈 수 없게 되는데......

보통은 포기하고 살아가는데, 완벽함을 모토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마음 먹은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애비의 남편 ' 팀 ' 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직원들에게 불가능한 일을 시키고 애비에게도 완벽함을 요구하는 그런 남자. 이런 남자의 손에 최첨단 기술이 쥐어진다고 생각해보자... 기술이 주는 편리함? 인간을 대신하는 로봇이 주는 안정감? 따위는 절대 머리에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누가 인간이고 누가 로봇인지..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미스터리이자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도 함께 던져줬던 소설 [ 퍼펙트 와이프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내게 필요한 건 나와 함께 있어줄 사람이야 "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생에 꼭 필요한 게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다른 거 다 필요없고 내가 아프거나 슬플 때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 딱 한 사람만 있으면 좋겠다 싶다. 꼭 가족일 필요는 없다. 피를 나누진 않았더라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 안심하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진실한 친구가 단 한 명만 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친구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고 했을 때, 그 뿐 아니라 그 순간 함께 있어달라고 했을 때 당신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 책 [ 어떻게 지내요 ] 는 우정과 공감이라는 주제를 기반으로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친구의 동반자 역할이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가 있어서 독자들의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 어떻게 지내요 ] 의 주인공은 이름없는 작가인데 ( 아마도 누네즈 자신일 듯 ), 한동안 암치료를 받던 친구가 회복과 재발을 반복하던 끝에 결국 회복 불능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친구는 고통스러운 죽음보다는 안락사를 통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고는 주인공에게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때 곁에 함께 있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친한 친구로부터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부탁일터.... 이럴 때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책은 첫 부분은 화자의 전 연인이었던 한 유명 작가의 강연과 그것을 들은 청중들의 반응에서 시작된다. 남성이고 이제 어느 정도 나이가 먹은 유명 작가인 그는, 오염과 기후 변화 등으로 이제 인류는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제 지구가 맞닥뜨린 위기 상황을 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말하고 그 어떤 시도를 하더라도 우리는 회복 불가하다는 무시무시한 폭탄 발언을 떨어뜨린 후 자리를 떠나버린다. 사실 이 책을 주로 차지하는 내용은 화자 ( 아마도 누네즈 일 듯한 ) 와 회복 불가능한 상황, 즉 죽음을 적극적으로 맞이하려는 친구와의 대화이다. 이런 상황이 남성인 그 작가의 강연 내용과 대비되면서 극적 효과가 난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의연히 대처하는 친구와 절망이라는 무거운 짐을 함께 기꺼이 지고자 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희망과 배려, 진정한 우정 등등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주인공과 죽음을 준비하는 친구 둘다 작가라서 그런지 이 책에는 우리의 삶에 예술과 문화가 어떤 가치가 있고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그들은 이런 식의 질문을 그들 자신과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던진다. 문학이 과연 세상을 바꾸는데 기여를 해온 걸까? 작가랍시고 인생을 허비한 건 아닐까? 책을 읽는 사람들이 문학에서 과연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문학이 삶에 과연 의미가 과연 있는 걸까? 문학 덕분에 삶의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걸까? 등등등

이 책에 정답이 나와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 자체가 정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 죽음 " 이라는 재앙과도 같은 상황 속에서도 친구와 함께 웃을 수 있는 여유.. 그 담대함과 유연함이라니... 누네즈의 글은 배려심과 지혜 그리고 웃음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절망할 수도 또 희망을 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늙어가고 질병을 맞이하고 또 언젠가는 죽게 되는 상황... 인류가 기후 변화 앞에서 멸망할 지도 모르는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기에 우리는 분노보다는 인류에 대한 연민을, 두려움보다는 담담히 받아들이는 담대함을 선택할 수도 있다. 누네즈의 책 [ 어떻게 지내요 ] 를 읽으며 글의 아름다움이 마음 속에 가득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 금빛 시간, 마법의 시간, 뢰르 블뢰. 변화하는 하늘의 아름다움을 보며 우리 둘 다 가만히 몽롱함에 잠기는 저녁 시간. 비스듬히 떨어지는 해의 빛이 잔디를 가로질러 올려놓은 우리 발에 닿는가 싶더니, 느리고 긴 축복처럼 우리 몸을 타고 올라오면, 만사가 아무 문제 없다고 당장이라도 믿을 수 있을 심정이었다. 달을 보라. 별을 세어보라. 거기 당신은 없는 모든 시간이. 그리고 영원히 존재할, 세상이 한없이. (조이스.) 한없이 풍요롭고 한없이 아름다운. 다 괜찮을 거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데바 - 삶 죽음 그리고 꿈에 관한 열 가지 기담
이스안 지음 / 토이필북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꿈은 실존하는 또 다른 세계를 엿보는 경험.

삶, 죽음, 그리고 꿈을 관통하는 열 가지 기묘한 이야기 "

한동안 계속 꿨던 꿈이 있다. 항상 어떤 대학교가 배경인데 수강 신청을 못해서 미로같은 건물을 헤매고 있다거나, 수강 신청은 했는데 나의 게으름 때문에 한 학기 수업을 몽땅 빼먹었다거나 하는 종류였다. 조금씩 꿈의 내용은 달랐지만 어쨌든 대학교에 속한 것은 여전했고 최근에 꾼 꿈에서는 마치 현실처럼 내가 나 스스로에게 ' 왜 아직까지도 대학을 다니고 있는 것이냐? ' 하면서 혀를 끌끌 차곤 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꿈을 꿀 땐 정말 너무 리얼해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악몽 ( 수십년째 같은 대학교를 다닌다니 악몽이지요 ㅋㅋ ) 에서 깨면 평범한 일상이 있다는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한국 공포 문학을 이끌어가는 신예 주자인 이스안 작가의 신작 [ 카데바 ] 는 이렇게 경계가 흐릿한 현실과 꿈이라는 것을 주제로 여러 편의 단편을 선보이고 있다. 기묘하지만 아름답고도 슬픈 감정이 깃든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첫번째 작품 [ 버릇 ] 주인공 소녀는 자꾸 구석에 쓰레기들을 뭉쳐놓는 버릇이 있다. 먹이를 제때 주지 않아서 굶어죽은 햄스터 시체나 생리혈이 묻은 생리대까지 똘똘 뭉쳐서 서랍이나 여러 구석구석에 쑤셔놓는 이상한 버릇의 그녀. 그러던 어느날 아빠와 엄마가 부부싸움을 하게 되고 엄마가 가출하게 되는데...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바라지 않았던 반전과 결말... 우리는 DNA 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세번째 작품 [ 악몽 그리고 악몽 ] 미대에서 강사로 일하는 주인공은 밤마다 각양각색의 악몽을 꾼다. 좀비떼가 쳐들어와서 자신의 몸을 물어뜯기도 하고,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푸는 것이 불가능한 시험지 앞에서 절망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심지어는 꿈 속의 병원에서 의사에게 췌장암 말기라 곧 죽을 것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 남자, 도대체 이 남자가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려야 하는 이유는 뭘까?

악몽이 현실보다 낫다면 ... 그렇다면 그 현실은 바로 지옥?

다섯번 째 작품 [ 카데바 ] 태어날 때부터 어둡고 음침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접근을 피하는 주인공. 친구가 없어서인지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조건이 자연스레 마련된다. 우수한 성적으로 의대에 입학한 뒤에 시체

( 카데바 ) 해부 실습을 하게 되는 주인공. 그러던 어느날, 한 카데바에게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이상한 끌림을 느낀 후, 계속 그녀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하는 주인공...

▶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살아갈까?

이스안 작가의 작품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현실 말고도 다른 세계가 있음을 넌지시 들려준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어둠과 음침함 그리고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말로 꺼내는 것도 싫어한다. 그래서인지 호러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독특한 사람들로 구분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기 마련.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죽음이 있고 죽음의 공포가 있기에 우리는 하루 하루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듯 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깨닫지 못했던 죽음이 슬그머니 옆자리에 와서 차가운 손으로 내 볼을 만지는 듯한 단편소설집 [ 카데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추정경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8년전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살아난 남자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내 목숨을 끊으러 "

언젠가 미스터리를 다루는 프로그램에서 " 시간여행자 " 편이 소개된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전화기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절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듯한 몸짓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휴대폰으로 보이는 듯한 장치를 귀에 대고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던가 스포츠 경기 관람 중 휴대폰으로 보이는 것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물론 사진이 조작되었거나 착시 현상으로 인한 잘못된 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실제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 있다면 어떨까?

이 책의 주인공 진은 사회의 낙오자 중에서도 최하급들이 몰리는 강원 카지노의 한 전당포에서 일하고 있다. 카지노는 온갖 범죄와 타락의 온상지이다.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린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어떤 경우는 다른 사람들이 도박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그들의 칩을 훔쳐 달아난다. 현금을 다 날리고도 미련이 남은 도박꾼들은 죽은 자리를 떠도는 지박령처럼 카지노를 떠나지 못하고 소유물 ( 시계, 핸드폰, 차 등등 ) 을 야금야금 팔아서 현금을 확보한 뒤 다시 대박을 노리기도 한다. 카지노라는 배경에서 풍기는 어두움과 SF 의 재기발랄함과 상상력이 만난다면 과연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낼까? 꽤나 독특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책 [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 를 만나보자.

주인공 장진은 성사장이 운영하는 한 전당포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은 도박판 지박령들이 맡기는 물건의 상태를 꼼꼼하게 체크하여 현금으로 교환이 가능한지를 알아보는 일인데, 어느날 재수 없는 일에 휘말리고 만다. 다른 전당포에서 이미 확보한 차를 확인하러 갔다가 그 전당포에서 나온 무리들에게 쫓기게 된 장진. 한참 두들겨 맞고 어느 공중 화장실에 숨어들어가지만, 화장실에 그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다. 왜냐하면 같은 시각 장진은 이미 자신이 일하고 있는 성 사장의 전당포에 가 있었기 때문.

사실 장진에게는 비범한 능력이 있었다. ' 포트 ' 를 만들어 ( 아마도 웜홀 같은 개념? )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 무리들에게 쫓기던 날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지만 ' 포트 ' 가 형성되어 공중화장실에서 성 사장의 전당포로 바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능력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것을 그는 곧 깨닫게 된다. 성 사장의 왼쪽 손가락 중 2개의 마디가 왜 절단되어 있는지를 알게 되고 ( 포트가 닫히기 전 제때 빠져나오지 못하면 절단됨 ) 아빠와 새엄마가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느낀다. 사실 에너지는 어마어마하지만 아직 ' 포트 ' 능력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던 장진, 그러나 능력을 키우면 키울 수록 무시무시한 힘이, 자신을 해칠 의도를 가진 힘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데......

눈깜짝할 사이에 시공간을 넘나드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떨까? 대개의 독자들은 아마도 기쁨의 탄성을 지를 지도 모른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현장에 직접 갈 수도 있고 비행기 값이 없어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능력이 나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면 어떨까? 능력 때문에 목숨을 내놔야할 상황이 온다면? 아마도 그런 능력을 심어준 신을 원망하거나 아니면 제발 살려달라고 기도를 올릴지도 모른다. 이 [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 속의 장진은 원망도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빌지 않는다. 다만,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를 할 뿐. 마치 먹이를 쫓는 하이에나처럼 자신을 뒤쫓는 무리로부터 어떻게 살아남을지...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해지는 소설 [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 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