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 지옥의 풍경, 요한계시록부터 단테까지 해시태그 아트북
알릭스 파레 지음, 류재화 옮김 / 미술문화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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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 나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내 안에 악마가 있기 때문이다."

- 샤를 보들레르

영화 [콘스탄틴] 을 보면 인간 세상은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장소이고 두 거대한 에너지는 팽팽하게 맞서며 균형을 이루어나간다. 그 균형을 깨뜨리는 일은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선과 악의 경계선에서 어느 쪽으로 향할지 선택을 해야 한다. 보통은 "선" 이 내미는 손길을 받아들이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악" 을 돌아보는 게 인간의 심리이다. 괴물이나 악마로 현현되는 악은 그 추하고 역겨운 모습 때문에 겉으로는 배척되지만, 사실 몰래 그들에게 끌리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이 책 [악마-Diable] 은 에콜 뒤 루브르에서 미술사 학위를 받은 알릭스 파레가 엮은 것인데, 루브르 박물관과 베르사유 박물관에서 8년간이나 일한 내공이 책 속에서 팍팍 느껴진다. 다양한 대가들의 손끝에서 창조된, 강렬하면서도 인상적인 악마의 모습이 독자들을 사로잡는다고 할까? 현대인들이 잔인하고도 끔찍한 범죄 사건에 소스라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료되듯, 과거 우리 조상들도 지옥이나 사탄 등의 이미지에 자기도 모르게 끌린 것 처럼 보인다.

이 책 속에서 우리는 여러 예술 작품의 형태로 재창조된, 정말 다양한 모습의 악마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지옥에서 인간에게 잔인한 형벌을 내리기도 하고 인간들이 서로 물어뜯는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기도 한다. 책을 보다가 문득 도대체 화가들은 어디서, 어떻게 악마나 사탄의 형체나 이미지에 대한 영감을 얻었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기독교와 고전 문학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4세기 중반 로마 속주의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는 자신에게 악의 서를 내미는 악마에게 신의 가호를 빌며 단호하게 대답한다. 비록 젊은 시절 죄를 범하며 방황하긴 했지만, 악에 저항하고자 하는 신념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진정한 수도자의 모습이 그림에서 드러난다.


- 종교화의 악마들은 대체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선한 영적 지도자들에게 나타나 유혹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완전히 인간의 모습을 띤 악마의 모습도 있지만 대체로 염소나 박쥐 등에서 뿔이나 날개를 빌려 인간과 차별화시킨 부분이 흥미롭다. 이 그림 속 악마도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이다. 무질서와 혼란 등등이 악마의 신체를 빌려 구체화된 것 같다.

젊은 예술가 윌리엄 부게로 (1825-1905)는 화가에게 최고의 영예인 로마 대상에서 두 번이나 고배를 마신다. 세상이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 부길 바란 그는, 단테의 [신곡] 지옥 편 30곡에 나오는 일화를 그리겠다고 결심한다. 이 그림에서 잔니 스키키와 카포티 오는 서로 상대의 목을 물어뜯거나 머리채를 잡아채고 있고, 이 싸움을 해골처럼 앙상한 얼굴을 한 사탄이 지켜보고 있다.


- 흥미롭다는 듯 두 인간의 거친 싸움을 바라보는 사탄의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이 그림은 인체 근육과 골격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는 점이 큰 감상 포인트인 것 같다. 마치 거대한 야수들이 서로를 향해 덤벼드는 듯한 이 그림에서, 폭발적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지옥에서 영벌을 받은 두 죄수의 싸움은 마치 한 편의 무용극처럼 아름답게 펼쳐지지만 이곳이 지옥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위에 소개된 그림 이외에도 이 책 [악마-Diable] 에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악마를 그린 그림들이 소개되어 있다. 각 화가들의 상상력 만큼이나 다양한데, 그들은 타락 천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우울하게 명상을 하기도 하고 세상을 멸하는 거대한 붉은 용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노트르담의 대성당 위의 악마상이나 니키 드 생팔이라는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 [Le Diable -악마] 와 같은 것들은 기괴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을 희롱하는 듯한 발랄함도 가지고 있다.


눈에 보이는 괴물에서 내면의 악마까지

악의 본질을 탐한 예술가의 기록

지옥에 가야만 악마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책 [악마-Diable] 을 펼치면 다양한 시대와 지역에서 상상되었던 악마의 생생한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 추하고 그로테스크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여러 악마들의

모습이 이 책을 넘기는 독자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소장할 만한 가치가 100% 인 책 [악마-Di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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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신의 오후 (앙리 마티스 에디션)
스테판 말라르메 지음, 앙리 마티스 그림, 최윤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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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내가 만든 첫 책이다. " _ 앙리 마티스

스테판 말라르메와 앙리 마티스, 두 거장의 예술혼의 결정판

시는 너무 함축적이고 난해해서 쉽게 읽히지 않는 문학 장르라서 지금까지 요리조리 피해왔는데, 봄이 느닷없이 찾아오듯 시집 하나가 갑작스럽게 내 삶에 들어왔다. 그것도 매우 난해하다고 알려진 스테판 말라르메 시인의 시 모음집인 [목신의 오후]라는 작품이. 낯선 세계를 탐구하려니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기회라면 기회!!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말라르메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읽고 소화해 보기로 굳게 마음먹어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화가 앙리 마티스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반면 디테일에 무심한 그의 작품은 어느 정도 안정감을 안겨준다. 선이 굵은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불안했던 마음도 풀어지는 느낌이 든다.

사실 이 책 [목신의 오후]를 읽게 된 것도 앙리 마티스 화가가 손수 말라르메의 시를 고르고 그에 어울리는 삽화를 창작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소개말 때문이었다.


스테판 말라르메라는 시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서 시를 읽기 전에 해설을 조금 읽어보았다. 거기서 그의 시 세계가 " 자아와 세계, 현실과 이상이라는 분리된 이원성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거기에서 기인한 불만과 좌절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음... 어렵지만 어두운 지하실을 더듬더듬 나아가듯 시인의 감성에 접근해 본다. 아마도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이 거친 속세를 살아내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현실을 살아간다는 건, 더러운 시궁창을 끊임없이 걸어가는 여정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니까.

전반적으로 그의 시는 다소 침울함과 우울함 그리고 무력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에 등장하는 [창]이라는 시는 아마도 그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느낀 복잡한 심경을 담아서 쓴 시인 것 같았다. 병원에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표정 없는 의료진들 그리고 생기 없는 흰 벽만 바라봐야 하는 그 무기력함이란!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환자들은 크나큰 절망을 느낄 것인데, 하물며 민감한 촉수를 가진 시인이라면? 창으로 비치는 찬란한 햇빛이 원망스러울 것이고, 그 원망이 극에 달하면? 햇빛이 머무르는 천국으로 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 침울한 병원이 지겨워, 텅 빈 벽이 지루해진 큰 십자가 쪽으로

진부한 흰색 커튼을 타고 피어오르는 역한 향냄새가 지겨워.

그 속을 알 수 없는 죽어가는 병자는 늙은 등을 다시 일으켜,

(... 중략...)

내 꿈을 왕관으로 쓰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전생의 하늘에서!

- 말라르메의 시 (창) 중 -

말라르메는 일상뿐 아니라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많은 시를 썼다. 그중 [목신의 오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 신인 "목신 판"을 주제로 한 전원시이다. 엄청난 성욕을 지닌 호색한으로 묘사되는 이 목신은 아름다운 님프와의 사랑을 꿈꾸며 시링크스라는 님프의 꽁무니를 좇는다. 하지만 두려움에 떨던 이 님프는 갈대로 즉시 변해버리고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 목신은 그 갈대를 꺾어 피리로 만들어불면서 아쉬움을 달랜다.


" 도피의 악기, 오 얄궂은 피리 시링크스여,

그러니 호숫가에 다시 꽃 피어 나를 기다려라!

나를 둘러싼 소문에 우쭐하며, 오래오래 나는 여신들 이야기를 떠벌리리라,

숭배의 그림을 그리고 그네들의 그림자에서 다시 한번 허리띠를 벗기리라.

(.... 중략...)

"나의 시선은 골 풀들을 뚫고 불멸의 목덜미들을 하나하나 뜨겁게 찔렀으니,

그네들은 숲의 하늘에 고통의 비명을 울리며 (... 중략...)

사라지네, 오 보석들아!

- 말라르메의 시 [목신의 오후] 중 -

죽음과 지하 그리고 저승을 동경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말라르메와 비슷한 감정대를 공유하는 자이다. 비록 인간의 물질성을 거부하지는 않았으나, 말라르메는 인간의 한계 안에서 괴로워하며 자신이 이상으로 여기는 것들의 찬란함과 격렬함을 노래하였다. 죽음을 무릅쓸 정도로 간절하게 바라는 무엇이 있다고 말하는 시인 말레르메. 그의 시들은 어느 정도 광기에 물들어있다. 구원을 바라며 하늘과 땅을 향해 소리치는 옛 제사장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언어 고유의 암시와 상징에 주목해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한 "말라르메" 시인과 20세기 미술의 혁명가 앙리 마티스의 협업이 낳은 책 [목신의 오후].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아름다운 말라르메 시가 표현한 이미지를 마티스 에칭화가 가느다란 선으로 구현해 내었다. 언어가 다 표현해 내지 못하는 강렬한 감정을 앙리 마티스의 그림이 보충해 주는 듯한 [목신의 오후]. 커피가 당기는 오후에 시와 그림을 동시에 감상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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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여인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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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는 한 남자가 새로 이사한 집에서 박스를 열어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매우 소중한 것이라도 발견한 양, 다급하게 안에 있던 앨범과 사진들을 꺼내 바닥에 펼쳐놓는다. 그 사진들은 여러 모양의 십자가들이 찍힌 것들이고 그중 하나의 뒤편에 누군가가 익숙한 필치로 사진과 관련된 이야기를 적어놓았다. 극단을 이끌어가는 그 남자는 문득, 30년 전 부산의 한 동네에서 누이처럼 친하게 지낸 혼혈인 "헬린 킴 혹은 김혜련"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사람의 아들] 등으로 한때 한국 문학계의 거인으로 손꼽혔던 분인 이문열 작가의 신작 [리투아니아의 여인]을 읽게 되었다. 작품 구상에서 집필까지 1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니, 사유의 깊이와 통찰력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 이야기는 작은 극단의 연출가로 시작해서 뮤지컬 제작으로 저변을 확대해나가는 한 연출가의 여정기로 볼 수도 있겠으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가 비밀스레 간직한 (아닌척하면서) 타 인종에 대한 편견과 알량한 민족 정체성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불특정 다수의 무차별적인 악의가 어떻게 인간을 무너뜨리는지에 대한 비판이 숨어 있다. 묵직한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하는 [리투아니아의 여인] 속으로 들어가 본다.

[리투아니아 여인]의 줄거리를 잠깐 요약하자면, 부산의 한 동네 친구였던 '나'와 '혜련' 은 한동안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그러다가 조그만 극단에서 연출을 배우고 있던 '나'가 [리투아니아 남자들]이라는 연극을 올리게 되면서, 리투아니아 엄마를 가졌던 '혜련'에게 10년 만에 연락을 하여 그녀를 음악 감독으로 초청하게 된다. 주인공 '나'와 '혜련'은 서로를 남매처럼 여기지만 사실 '나'는 그녀에게 이성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번번이 누군가와 만나고 있는 '혜련'의 뒤에서 그녀를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들은 각각 운명적인 짝을 만나 결혼을 하고 정착을 하는 듯 보이지만, 희한하게도 둘 다 이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둘 다 한국과 외국을 오가며 노마드적인 예술가의 삶을 살게 된다. 특히, 혜련의 경우는 리투아니아 조상을 가진 미국인이고 동시에 한국인 아버지를 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진정으로 머물 수 없는 그녀. 본질적인 고독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김치찌개가 그립고 친구들이 그리워 한국에 오면 그녀의 푸른 눈과 갈색 머리가 더 두드러져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리에 속할 수 없다는 점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예술가로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책 속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들이 있다. 혜련의 리투아니아 할머니가 소련의 압제를 피해 미국으로 탈출하는 와중에 3명의 자매 중 한 명만 데리고 온 것. 30년이 흐르고 난 뒤에 분노와 절망에 가득 찬 늙은 이모들이 찾아와 어린이들처럼 어머니에게 그때 왜 그랬냐고 퍼붓는 장면이 매우 인상 깊었다. 각자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이모들의 슬픔이 진하게 느껴졌달까? 그리고 이 책의 중심인 '나'와 '혜련'의 사랑도 인상 깊었다. 사랑인 듯 사랑 아닌 사랑 같은 그들의 밀당 이야기는, 뭐랄까? 애초에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세상을 배회하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한 남자.... 결국엔 그들은 사랑보다는 오래가는 우정을 택하게 된다.

이문열 작가님이 절필 선언을 하셨나 싶을 정도로 그동안 작품 활동이 없으셨는데, 신작을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뻤다. 1970년대와 80년대가 주로 배경이 되기 때문에 다소 고루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연극과 뮤지컬을 사랑하는 분들이 읽으면 정말 좋아할 만한 내용들이 나온다. 뮤지컬에 문외한인 나조차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괜찮은 공연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투아니아 민족이 경험한 분열과 상처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한 개인이 겪어야 했던 외로움과 고독을 이야기했던 [리투아니아 여인]. 생각할 거리가 있고 메시지가 분명한 문학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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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 이브 생로랑 삽화 및 필사 수록본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이브 생로랑 그림, 방미경 옮김 / 북레시피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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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담 보바리는 한 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절망적인 혼란 상태에 빠진 여자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남자인 플로베르가 어쩌면 이렇게 여자의 마음을 잘 알았을까? 싶을 정도로, 고전문학 [마담 보바리]는 순진하기 짝이 없던 아가씨가 잘못된 사랑의 열정에 휘말려 점점 타락하게 되는 상황을 너무나 잘 묘사하고 있다. 마담 보바리, 즉 엠마가 한때의 불장난 같은 사랑, 혹은 성애에 빠져서 인생을 조금씩 잃어버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누구에게 인지 모를 울화통이 터져나갔다. 엠마를 꼬여낸 뒤 냉정하게 차버린 양아치 로돌프에게 인지, 아니면 엠마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몰랐던 둔한 남편 샤를에게 인지, 아니면 소중한 인생을 시궁창으로 던져버린 엠마 본인인지... 하여간 책을 읽는 동안 계속 울화통이 터져나갔다. 이것은 고전인가? 아니면 고전의 옷을 입은 " 부부의 세계 " 인가?

샤를 보바리와 혼인하여 마담 보바리가 되기 전, 엠마는 농장을 꾸리는 아버지를 도와서 성실하게 집안을 관리했다. 만약에 샤를이 엠마 아버지의 다친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서 시골로 오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녀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혹시 모르지, 근처에 사는 비슷한 수준의 농부나 장사꾼과 결혼해서 그럭저럭 만족하고 살았을지도.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샤를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과 결혼한 엠마의 모습이 도저히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깊고 검은 눈동자의 아름다운 엠마, 그녀는 귀족의 아내가 될 수도 있고, 무도회에 가서도 남자의 시선을 끌고, 빛을 발하는 그런 종류의 여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이기 전에 너무나 평범한 샤를. 샤를은 그녀가 그냥 아내로 자신의 곁에 머물러 주길 원했다. 자신을 위해 집안 살림을 도맡고 남편을 지지해 주는 그런 종류의 여인 말이다. 샤를은 성공한 사람이지만 지루한 편이고 관습대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융통성 제로. 아내와 좀 더 친밀해지고자 노력은 하는데 어쩐지 둘의 사이는 삐걱거리기만 한다. 샤를이 낭만적인 사랑 혹은 열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너무나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샤를은 성실하고 아내에게 충실하지만, 엠마가 책을 통해서 배운 이상적인 " 사랑 "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사랑의 언어와 제스처를 모르는 사람이다. 엠마는 사랑이 너무너무 고파서 죽을 지경이다.

좌절과 절망은 쌓이고 쌓여, 마침내 고여있던 흙탕물이 썩어가는 것처럼 그녀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다. 낯설지만 환상적인 남정네들과의 부적절한 애정행각을 몹시도 바라게 된 것. 그러나, 엠마가 책에서 읽었던, 혹은 혼자 상상했던 남녀상열지사는 사실 현실에서는 조금 불가능한 것. 그것은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부부는 그냥 의리로 살아가는 것이다. ( 제 생각입니다 ) 책 속에서 펼쳐지는 환상은,,, 그냥 뭐랄까? 만들어진, 플라스틱 같은 사랑인데 말이다.. 쩝. 어쨌든 남편과의 거리로 인해서 생긴 외로움은 조금씩 그녀를 갉아먹으며 성품까지 변화시킨다. 그녀의 유순했던 성품은 조금씩 음흉하고 세속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아! 내가 만일 엠마의 언니였다면 머리채를 잡아끌고 와서 방 안에 가둬놨을 텐데..... 너무도 안타까운 이 상황. 마담 보바리는 남자들에게 외로움이라는 페로몬을 뿌리고 다니며 그들을 본인 쪽으로 끌어당긴다. 잘생기고 훤칠하지만 여자에게 손톱만큼의 책임감도 없던 양아치 로돌프, 그리고 엠마에 대한 큰 애정도 없으면서 단지 힘든 현실을 잊어보려 그녀를 만난 어린 레옹, 그들과 치명적인 사랑을 시작하게 된 엠마. 엠마는 환상적인 나날을 보냈을 수도 있지만, 그들과의 애정 행각은, 독자들의 예상대로 엠마에게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만을 남기게 된다.

애정행각으로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담 보바리에게는 또 다른 큰 문제가 있었다. 남편인 샤를이 돈을 많이 벌었지만 엠마의 어마어마한 물질적 욕망을 다 채워줄 수는 없었다. 당시 플로베르는 돈만 많고 교양이 없는 부자들이 결국엔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을 많이 본 게 아닐까?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쓸데없는 물건을 구매하고 애인들의 애정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에게 비싼 물건을 사주는 엠마의 욕망이 가득 찬 두 눈동자가 보이는 듯하다. 그녀는 결국 돈만 밝히는, 매우 부도덕하고 사악한 상인인 뢰뢰에게 걸려서 차용증을 계속 쓰던 끝에, 원금을 훌쩍 넘어서는 채무의 늪에 빠지게 된다. 남편인 샤를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은 시간문제,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자신의 인생과 샤를, 그리고 소중한 딸의 인생까지 쓰레기통으로 처박은 것을 깨달은 엠마는 어떤 결심을 하게 되는데....


한심한 마담 보바리라 손가락질 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과연 엠마만 비난을 들어야 하나? 여기서 마담 보바리의 편을 들자면, 그녀는 사실 책을 많이 읽고 호기심도 많고 지루한 현실보다는 가슴 뛰는 이상을 바라는, 그런 인물로 묘사된다. 여자에게 제한이 많았던 당시 사회 말고, 그녀가 시간 여행을 해서 현대 사회로 왔다면, 상황은 좀 달라졌을 거라고 본다.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는 작가가 되었을 수도, 예술가가 되었을 수도, 혹은 큰 사업체를 이끄는 리더가 되었을 수도 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부적절한 애정 행각과 그로 인한 금전의 손실이 그 당시에는 큰 논란을 낳았을 수도 있지만, 엠마가 지금 살아있다면? 과연 서로 맞지 않는 샤를과의 결혼 생활을 그냥 유지하고 살았을까? 그냥 자유롭게 살고 싶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양아치같은 남자를 만나건, 한참 연하를 만나건, 사랑에 실패하고 눈물바람으로 삶을 살아가더라도 그건 자신의 몫. 엠마에게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삶을 살아볼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천재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이 그린 삽화 13점이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열 다섯 살에 그렸다는 삽화는 당시 귀족들의 사교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면도 있지만,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주인공 마담 보바리의 아름다운 모습과 순수했던 순간을 보여주기도 한다. 남자들과 춤추며 행복해하는 엠마...... 앞으로 있을 불행은 전혀 모른 채 홍조를 띤 얼굴이 슬프게 보이기까지한다. 이 책 [마담 보바리]가 고전이기에 현대물을 읽는 것보다는 힘들 거라는 예측을 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대책 없는 이 마담 보바리가 빵빵 터트리는 사건에 가슴 떨면서 책에 푹 빠져들었다. 사슴 같은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엠마, 마담 보바리. 그녀의 이야기가 오늘 내 가슴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더 이상 그녀를 판단하게 되지 않는다, 단지 슬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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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을 가진 사나이 - 조선을 뒤흔든 예언서, <귀경잡록>이야기
박해로 지음 / 북오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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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죽지 않는 자가

살육의 새벽을 피로 물들인다

과연 조선 시대에도 외계인과 좀비가 존재했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어준,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SF 좀비물인

[화승총을 가진 사나이]를 읽었다. [신을 받으라]와 [섭주] 그리고 [전율의 환각]과 같은 초현실적인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쓴 박해로 저자의 신작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상상 속의 예언서인 [귀경 잡록]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이 책에는 온 우주를 아우르는 육십오능음양군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그가 부리는 원린자들 (외계인들) 이 조선을 장악할 것이라는 예언이 실려있다. [귀경 잡록]은 비록 삿된 내용을 품고 있다하여 금서가 되었지만, 비밀리에 [귀경 잡록] 을 읽고 원린자를 모시는 집단이 있었으니....

세종 20년 어느 날, 체격 좋고 힘센 사람들이 이상한 꿈을 꾼 후, 그 다음날 천둥소리와 함께 증발되는 기괴한 사건이 여기저기서 발생한다. 이 증발자들은 사라지기 전 육십오능음양군자라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유일신에 대한 꿈을 꾸었다는 해괴한 발언을 한다. 그 존재는 곧 증발할 자들에게 빛으로 나타나, 세속을 버리고 자신을 받아들이면 위대해질 수 있다는 식으로 그들을 현혹시킨다.

세속의 눈알을 파내고 내세의 신안을 끼워 넣어라.

그리하면 육십오능음양군자를 알현할 시야를 회복하리라.

내일이면 그대는 죽은 학문 대신 시간과 공간의 비밀을 터득할 수 있노라.

이 기괴하고도 허무맹랑해 보이는 사건을 조사하던 포도청 종사관 서만주는 이 사건이 금서 처분을 받은 삿된 책인 [ 귀경 잡록 ] 과 관계가 있고, 특히 찢어진 부분인 33장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사람들이 증발된 와중에 들었다던 천둥소리가 사실은 총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화승총을 가진 존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서 종사관은 그를 찾아내지만, 마치 관절이 없는 듯한 너덜거리는 팔다리와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를 가진 화승총의 사나이는 엄청난 속도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한편, 한양 대신 섭주에서 열린 과거 시험장에 웬 미친 남자가 벌거벗은 채 어기적대면서 걸어들어온다. 시체인 듯, 피가 엉겨 붙고 관절을 굽히지 못하던 그는 증발했었던, 이유석이란 자였다. 좀비가 된 이유석은 자신을 막는 감사관의 어깻죽지를 물어뜯고, 누군가의 머리통을 박살 낸다. 이미 죽은 목숨이라 그런지, 아니면 힘이 원래 세서인지 아무리 많은 병사가 덤벼들어도 끄떡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좀비 말고도 체격 좋고 힘센 시체들이 섭주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포도 대장의 허락을 얻은 서 종사관은 급히 천오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섭주로 출발하는데.....

이 책 [화승총을 가진 사나이]를 읽고 나니, 사람들이 외계인의 흔적을 찾아 헤매고 그들을 숭상하는 종교까지 창시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독서 이후, 나의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히는 걸 느낀다. 책 속에는 선과 악을 뛰어넘는 거대한 우주적 존재가 있고, 그것이 거느리는 무자비한 원린자들 (외계인들)의 종류도 엄청나게 많아서 호시탐탐 지구 정복을 넘보고 인간들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부린다. 그 원린자들은 마술 능력까지 있어서 사람들을 조종까지 하는 무시무시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인 우리는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도 안된다고 이 책은 말하는 듯하다.

과연 좀비로 변한 무적 군대를 무찌를 수 있을까? 그들은 왜 증발했다가 시체로 나타난 것이며,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무리들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이 책에는 [화승총을 가진 사나이]외에도 [암행어사]라는 단편도 실려있는데, 두 이야기가 연관이 되어 있어서 먼저 [암행어사]를 읽어봐도 재미있을 듯하다. 시리즈 [킹덤]과 [데드 워킹]을 보는 듯 좀비들의 생생한 이미지가 그대로 전달되는 책 [화승총을 가진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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