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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여인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월
평점 :
프롤로그는 한 남자가 새로 이사한 집에서 박스를 열어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매우 소중한 것이라도 발견한 양, 다급하게 안에 있던 앨범과 사진들을 꺼내 바닥에 펼쳐놓는다. 그 사진들은 여러 모양의 십자가들이 찍힌 것들이고 그중 하나의 뒤편에 누군가가 익숙한 필치로 사진과 관련된 이야기를 적어놓았다. 극단을 이끌어가는 그 남자는 문득, 30년 전 부산의 한 동네에서 누이처럼 친하게 지낸 혼혈인 "헬린 킴 혹은 김혜련"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사람의 아들] 등으로 한때 한국 문학계의 거인으로 손꼽혔던 분인 이문열 작가의 신작 [리투아니아의 여인]을 읽게 되었다. 작품 구상에서 집필까지 1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니, 사유의 깊이와 통찰력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 이야기는 작은 극단의 연출가로 시작해서 뮤지컬 제작으로 저변을 확대해나가는 한 연출가의 여정기로 볼 수도 있겠으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가 비밀스레 간직한 (아닌척하면서) 타 인종에 대한 편견과 알량한 민족 정체성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불특정 다수의 무차별적인 악의가 어떻게 인간을 무너뜨리는지에 대한 비판이 숨어 있다. 묵직한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하는 [리투아니아의 여인] 속으로 들어가 본다.
[리투아니아 여인]의 줄거리를 잠깐 요약하자면, 부산의 한 동네 친구였던 '나'와 '혜련' 은 한동안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그러다가 조그만 극단에서 연출을 배우고 있던 '나'가 [리투아니아 남자들]이라는 연극을 올리게 되면서, 리투아니아 엄마를 가졌던 '혜련'에게 10년 만에 연락을 하여 그녀를 음악 감독으로 초청하게 된다. 주인공 '나'와 '혜련'은 서로를 남매처럼 여기지만 사실 '나'는 그녀에게 이성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번번이 누군가와 만나고 있는 '혜련'의 뒤에서 그녀를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들은 각각 운명적인 짝을 만나 결혼을 하고 정착을 하는 듯 보이지만, 희한하게도 둘 다 이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둘 다 한국과 외국을 오가며 노마드적인 예술가의 삶을 살게 된다. 특히, 혜련의 경우는 리투아니아 조상을 가진 미국인이고 동시에 한국인 아버지를 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진정으로 머물 수 없는 그녀. 본질적인 고독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김치찌개가 그립고 친구들이 그리워 한국에 오면 그녀의 푸른 눈과 갈색 머리가 더 두드러져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리에 속할 수 없다는 점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예술가로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책 속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들이 있다. 혜련의 리투아니아 할머니가 소련의 압제를 피해 미국으로 탈출하는 와중에 3명의 자매 중 한 명만 데리고 온 것. 30년이 흐르고 난 뒤에 분노와 절망에 가득 찬 늙은 이모들이 찾아와 어린이들처럼 어머니에게 그때 왜 그랬냐고 퍼붓는 장면이 매우 인상 깊었다. 각자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이모들의 슬픔이 진하게 느껴졌달까? 그리고 이 책의 중심인 '나'와 '혜련'의 사랑도 인상 깊었다. 사랑인 듯 사랑 아닌 사랑 같은 그들의 밀당 이야기는, 뭐랄까? 애초에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세상을 배회하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한 남자.... 결국엔 그들은 사랑보다는 오래가는 우정을 택하게 된다.
이문열 작가님이 절필 선언을 하셨나 싶을 정도로 그동안 작품 활동이 없으셨는데, 신작을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뻤다. 1970년대와 80년대가 주로 배경이 되기 때문에 다소 고루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연극과 뮤지컬을 사랑하는 분들이 읽으면 정말 좋아할 만한 내용들이 나온다. 뮤지컬에 문외한인 나조차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괜찮은 공연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투아니아 민족이 경험한 분열과 상처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한 개인이 겪어야 했던 외로움과 고독을 이야기했던 [리투아니아 여인]. 생각할 거리가 있고 메시지가 분명한 문학책으로 추천한다.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솔직하게 리뷰를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