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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반다나 싱 지음, 김세경 옮김 / 아작 / 2018년 11월
평점 :
하얀 우주선 같은 곳에서 우주를 내려다보는 듯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뒷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했다니..... 속된 말로 미쳤거나 아니면, 정말 일반인들이 모르는 세계에서 행성 역할을 할 수도 있다.
10편의 단편이 실린 이 SF단편집은 인도의 물리학자이자 SF작가인 반다나 싱이라는 작가에 의해서 쓰여졌다. 그녀는 여성주의 환경운동을 통해서 페미니즘을 만났고 이것을 통해 인도에 뿌리 깊은 카스트와 계급 및 경제적 문제들이 나머지 90% 의 삶을 어떻게 결정짓는지 깨닫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단편집들의 소설들은, SF라고 단정짓기에는 너무나 사실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자칫하다간 이 책의 장르를 사회운동과 페미니즘 쪽으로 묶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또 그러기에는 미묘하게 SF와 환상이 결합되어 있어서 독자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의 여지를 선사해 준다.
각 단편들은, 인도 사회가 품고 있는 실질적 문제, 즉, 가난, 계급, 여성문제, 그리고 종교 갈등 등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서 첫번째 편 허기 ( HUNGER ) 에서는, 한 노인이 자식들에게 거의 버림받은 채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죽는 일이 발생하는데, 같은 건물에 살던 노인이 죽자 , 죄책감을 느낀 여자 주인공 디브야는 자신이 걷는 거리 곳곳에서 ' HUNGER ' 즉 굶주림 자체를 발견하게 된다. 굶주림을 촉으로 느끼는 소위 " 초능력 " 이 발생하게 된다. 그야말로 여성다운 초능력이다. 사람을 살리는 초능력.
그리고 대표작인 "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에서는, 사회에서의 체면만 중시하고 아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관료적인 남편과 함께 사는 여인 카말라가 등장한다. 그녀는 어느날 자신이 행성이라고 선언하면서, 갑자기 옷을 훌러덩 벗어버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 나는 행성이기 때문에 태양볕이 필요해 ".
남의 눈에 띌까 전전긍긍하는 남편 람나스. 그는 부인이 미쳤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 그녀는 여러 풍선과 함께 하늘로 날아간다. 진짜 행성이니까. 그녀와 함께 그녀가 짊어지고 있던 여성으로써의 족쇄, 체면치레, 의무도 함께 날아간다. 자유로운 그녀...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말한다.
사변소설이 상징과 은유를 특정방식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의 우리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다른 행성,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주인공이 외계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두 한번쯤은 외계인이 된 느낌, 계급과 계층, 종교와 교리, 성별과 성적 지향을 이유로 기준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아보지 않았던가?
SF와 판타지는 은유와 비유 그리고 상징을 통해 인간의 삶을 마치 현실이 아닌 듯, 외계 저 너머의 것 인 듯 표현할 수 있다. 가끔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 고립감 등도 어쩌면 내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는 건 아닌지..... 아주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일상 속에서 SF와 환타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몇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작가의 깊이가 드러나는 아주 좋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