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 - 텍스트로 콘텍스트를 사는 사람들에게
박양규 지음 / 샘솟는기쁨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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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시대에 기독교는 거의 사회악처럼 비춰지고 있다.

기독교가 사회에 좋은 영향력과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궁금하다.

요즘 이엠바운즈의 기도를 2번째 읽고 있다.

3분의 2쯤 읽었는데 다 읽으면 성경통독을 본격적으로 하려구한다.

몇 년전에 성경 통독을 하면서 필사를 했는데 그럴 때 가정예배에서 매일 읽던 성경과 설교를 들을 때의 성경과 또 다른 내용과 느낌이 있었다.

이엠바운즈를 또 읽으면서 느낀 점은 하나님은 끈질기고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는 걸 원하신다는 걸 알았다.

난 이 세상에서 와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믿는 존재가 하나님이다.

하나님없이는 살 수 없고 하나님 때문에 살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모조리 알고 싶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만큼 하나님도 나에게 음성을 들려주시고 반응을 해주시니까 감사하기도 하고 기쁘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보다 그 어떤 것도 우선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신을 나에게 전부 주셨으니까말이다.

이 책도 하나님과 관련된 거라서 꼭 읽고 싶었다.

이 책은 성경속의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다윗에게도 우리아에게 왜 그랬는지 삼손에게 왜 그렇게 여자를 밝혔는지 사울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다니엘이 뜻을 하나님께만 둔 것처럼 나도 그러고 싶다.

난 과학으로 성경을 접근하다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하나님을 만나고 우주적인 첫사랑, 우주적인 기쁨, 우주적인 기적을 경험했다.

인문학적으로 성경을 접근하면 내 인생에 또 어떤 변화가 생길지 궁금해서 이 책을 읽었다.


다수가 선택하는 가치가 세상의 이치, 관행이라고 한다.

다수가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세상은 합리적이고 편리한 것을 추구하지만 의외로 옳은 방식을 추구하는 것은 드물다.

아담은 930세에 죽을 때까지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과 공존했다.

노아는 구전으로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고 선택했다면 노아의 가족들도 셋과 에노스처럼 소수였고 아웃사이더였을 것이다.

나나 아빠엄마도 아웃사이더같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빠는 교수를 할 때 총장이나 제자들한테 사기를 당하고 아빠엄마가 목회할 때도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잘해줘도 돌아오는 건 배신뿐인 걸 많이 봐서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기대 자체를 안하고 먼저 다가가지도 금방 친해지지도 못한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면서 하나님밖에 없고 하나님뜻만 이루면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관계는 어쩔 수 없지만 인위적으로 노력이나 연락을 하는 관계는 해본적이 없다.

오늘도 친구가 너가 연락 좀 하라고 했다.

매일 시도때도 없이 카톡을 하는데 갑자기 왜 연락을 하라고 하냐고하니까

중학교때부터 항상 자기가 먼저 연락을 했지 너가 연락을 먼저 안 하쟎아라고 했다.

친구때문에 생각을 해봤다.

내가 연락을 잘 했던가,,

내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넌 연락을 잘 안한다,,살아 있었구나라는 얘기를 오랜만에 잘 한다.

연락을 많이 하면 공부나 책을 많이 못 읽을 것 같은데,,

방주안에 들어갔던 사람은 8명뿐이었다.

노아의 가족들은 라멕, 므두셀라와 공존했고 그들 역시 구전을 통해서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방주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방주 밖에서 머물 수도 있었다.

선택의 차이는 운명의 차이를 만든다.

성경은 노아의 가족들을 의로운 사람들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들이 처한 환경과 그들의 해석, 고민, 판단을 했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노아 가족들이 보기에 세상 사람들은 악했고 땅은 부패했다.

부패했다는 표현이 연속해서 나올 만큼 세상은 부패했다.

사람들의 부패함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한 것을 한탄했다.

노아가 태어났을 때 문명을 이룩한 가인의 후손과 아벨의 후손이 있었다.

노아가 태어났을 때는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므두셀라, 라멕과 공존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던 에노스부터 라멕 사이의 게대들이 전하는 구전을 들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처럼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그들의 가치였다.

그들이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은 문명이 번성했고 그 속에는 권력과 편리함도 있었다.

노아의 며느리들이 볼 때 노아, 므두셀라, 라멕은 세상과 다른 사람들이었다.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태도와 목적이 달랐다.

자녀들이 봤을 때 노아는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였을 수도 있고 왕따로 보일 수도 있었다.

우리 가족처럼 세상을 등지고 사람들을 등지는거랑 비슷한 것 같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있고 노아는 그런 사람들과 언택트 그 자체였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였지만 며느리들에게 방주는 비정상이다.

노아의 가족들이 결국 방주를 만드는 일에 동참했다고 기록한다.

방주를 만들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라는 단어로 압축한다.

세상의 방식이 무엇을 성취하고 소유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성경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의 가치를 고민하게 한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욕망과 탐욕의 포로가 되었고 노아는 그 가치관을 등지고 방주를 만들었다.

노아에게 선택의 기준은 이익이 되는가의 기준이 아니라 옳은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처럼 옳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지 고난을 피해가면서 꽃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의로움과 옳음을 희생시키면서 성공과 현실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후서에서 노아 가족을 떠올리며 가치라는 화두를 던졌다.

베드로는 예수의 사도로서 로마 시대에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겠지만 옳은 것을 선택해서 기꺼이 최후를 맞이했다.

베드로는 주후 60년대 네로의 박해 당시 거꾸로 죽음을 당했다.






베드로는 반란자가 되어 로마에서 정치범으로 처형되었고 요한은 무인도에 유배되었다.

갈릴리 주민들의 기억 속에 그들은 철저히 실패한 인생들이다.

그와 반대로 역사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선택의 태도다.

나도 베드로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켈란젤로는 로마 교황의 신임 속에 여러 작품을 의뢰 받았다.

미켈란젤로가 보았던 로마 교회, 가장 거룩하다고 여겨지는 교회의 심장부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대신 악취가 진동했다.

그 모습을 본 루터는 16세기 초에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종교개혁은 카라바조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평범한 사람들을 모델로 선택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의 순교와 카라바조의 베드로의 순교의 그림을 보면 베드로가 순교를 당하기 직전이 묘사되어 있다.

십자가가 거꾸로 들려지는 순간의 그림이다.

베드로가 옳음을 선택한 결과이다.

난 성경 인물들을 볼 떄 난 저 사람처럼 안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욥부터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너무 아플 때 욥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요즘엔 노아가 정말 이해가 된다.

하나님뜻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밖에 없는데 많은 비난들이 돌아온다.

그런 사람들과는 어울릴 수 없으니 멀어진다.

그 대신 나에게는 하나님이 있으니까말이다.

토론을 위한 질문은 이 세상에서 합리적이고 이익이 되지만 옳지 않은 선택은 무엇인가? 왜 그런가?

옳은 선택을 할 때 어떤 손해가 예상되는가? 반대로 어떤 좋은 면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혼자 생각해보고 엄마랑 얘기를 해봐야겠다.

박양규 목사님이 적당히 지적이면서 적당히 무겁고 적당히 재미있게 책을 잘 쓰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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