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우울 - 최영미의 유럽 일기
최영미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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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기 전에 올라와 있는 서른 아홉편의 리뷰들을 훑었다.
대부분 그녀를 '시인 최영미' 로 알고 '서른, 잔치는 끝났다' 란 강렬한 제목의 시인으로 알고 있다.
나 역시 이번에 그녀의 '서양미술사 - 문학과 미술의 특별한 만남' 을 듣기 전에는 시인으로만 알고 있던 ( 그렇다고 그녀의 시집을 찬찬히 읽어본적이 있던것도 아니였지만) 그녀가 서양사를 강의한다기에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서울대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했고 홍익대학원에서 역시 미술사를 전공한 미술사학도이다.( 그녀 자신 이 표현을 꺼릴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딱 한 번 들어봤지만, 미술사를 강의하는 그녀의 열정은 '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정말 좋아하고, 수백번을 봤을 슬라이드를 설명하면서도 본인이 또 감탄하는' 그런 열정이었다. 그렇게 짧았던 두시간여의 강의 동안 미술사와 문학 이야기를 절묘하게 섞어내는 그녀는 본인 스스로 말솜씨가 없다. 두서없고, 어수선하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강의를 신청하고 그녀 이름으로 된 책을 두 권 샀다. ' 화가의 우연한 시선'이라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표지도 아름다운 책과 '시대의 우울'이라는 자그마한 책. 무려 십여년전에 나온 책이다. 목차로 봐서는 비슷비슷한 요즘 나온 책들을 여러번 본 터라 사지 말까. 잠시 고민하며 책을 후루룩 넘기는데, 나를 사로잡는 한문장이 있어 대번에 샀다. ' 나는 '잔치는 끝났다'고 말한 적 없다'  그녀를 알기 전에 그 말은 참 도발적으로 다가왔고, 결국, 제목도 표지도 온통 블루인 이 책을 집었던 것이다.

1995년 1996년의 여행동안의 일기 속에 유럽을 혼자 떠돌았던 그녀의 모습은 지난달 이십여일간의 유럽여행을 떠올리게 했다. ' 생은 왜 내게 이다지도 낯설까. 이방의 도시를 전전하며 나는 자신과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68pg '여행을 하면서 나는 점점 내 자신에 근접해갔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내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얼마짜리 방이면 만족할 수 있는 인생인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91pg 이런류(?) 의 비슷한 유럽 일기. 함정임의 일기가 문득 생각났다. 그녀의 그 책은 묘지기행이었는데, 너무 오버된 감정으로 보기에 심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대부분인 그림 이야기에 간간히 섞여 나오는 최영미의 독백은 그대로 가슴 털썩스럽다.

이런류(?) 의 책들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이주헌의 책들이다. 그의 글은 솔직담백하며 자연스럽다.
최영미의 글? '깬다 ' 아. 이런글도 쓰는구나. 그저 이런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깜짝깜짝 놀라는데, 그녀가 속해있는 '서양미술사' 공부하는 무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괜찮을까, 그녀? 두번째 책인 '화가의 우연한 시선' 의 책껍데기에는 유홍준의 추천사가 있다. ' 그녀가 내 후배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 고하는 걸보면 왕따는 아니겠지?

언뜻봐도 호오가 분명해보이는 그녀다.
좋아하는 렘브란트의 그림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지고
루벤스의 거대한 캔버스들 앞에서 탄식하며' 거 참 비싼 화폭에 엄청나게도 물감을 싸질렀군'  이라고 말한다.  피터 브뤼겔의 '꿈나라 동산' 을 보는 그녀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 맛있는 음식들이 지붕 위에 가득 널려 있고 포식한 세 명의 남자가 늘어지게 누워 자는 한가로운 모습. 피터 브뤼겔의 [꿈나라 동산](1956) 이다. 동화책의 삽화 같은 그림 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을 법한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오른쪽에 누운 남자의 바지춤이 벌어져 있는 게 아닌가. 너무 배 터지게 먹은 탓에 허리가 잠기지 않은 것이다.  사타구니 가리개가 벌어진 틈으로 혹시.... 아무래도 긴가민가하여 그 부위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혼자서 빙그레, 캔버스 앞에서 웃었다. '꿈나라 동산'이 어린아이의 동화에서 성인만화로 건너뛰는 순간이다. 대식가와 게으름뱅이들을 위한 지상낙원을 묘사한 이 작품의 실제 의도는 과식과 게으름에 대한 비판이라는데, 아무려면 어떤가.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어디선가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의 기억이 새롭다. 그림 속의 과자 접시들은 얼마나 신기하고 맛있어 보였던지. 난 그 음식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아저씨들이 부러워 군침을 흘렸었다. '132pg

http://www.abcgallery.com/B/bruegel/bruegel-3.html


딱히 할일이 없어서 미술관 돌아다녔다는 그녀.
'나는 쌀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 - 89) 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아까데미아 미술관을 나와 달리를 보러 바르똘로메오 교회( Chiesa S. Bartolomeo) 를 방문한 것은 순전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였다. 내가 예약한 베네찌아발 빠리행 야간열차는 저녁 8시에 떠나는데 그때까지 무려 여섯 시간 동안 딱히 갈 데가 없었던 것이다. 점심을 먹은 뒤 리알또 다리 부근을 얼쩡거리다 심심해서 교회를 찾아들어갔다.' 190pg

호오가 분명하다고 했지만, 이 책에는 물론 그녀를 반하게 한, 그녀를 몇번이고 감탄하게 한 때로는 그녀를 무너지게 한 그림예찬들이 대부분이다. 이런류(?) 의 책들 속에서 '싫다' 는 얘기를 거의 본 적이 없기에 재미있어서 몇가지 인용하였다고 해서 오해말기를.

그래. 그녀. 시집을 낸 시인이었지? 그것도 대박친 시집.
이 책에서 그녀가 가장 열광하는 것은 '렘브란트' 가 아닐까. 그녀는 무언가 답을 찾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고, 그 여행을 끝낼쯤 그 답을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혹은 지금까지도 찾고 있는건지 모르겠지만.그녀가 그토록 열광하는걸 보면 여행중에 여러 도시에서 만난 렘브란트의 '자화상' 들에서 가장 근접한 답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평온하게 가라앉다가도 문득 들끓고, 웃다가 다시 분노하고, 상처받는가 하면 곧 냉소한다. 놀람과 두려움의 차이를, 자포자기와 견인의 미세하고도 심오한 차이를 그보다 더 잘 표현해낸 화가는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표정을 한순간에 포착한 그의 초상은 언제 보아도 신선하고 현대적이다. 조금치의 감상도 허용하지 않고 자신을 직시하는 램브란트. 그 끔찍한 자의식은 거의 19세기의 보들레르 수준이다.

나의 신이여,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 아니며 내가 경멸하는 자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증명해줄 아름다운 시 몇편을 쓰도록 은총을 내려주소서.

- 보들레르, [빠리의 우울] -

그래, 바로 이거다. 뒤러가 세상에 대해 그토록 간절히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했다면, 램브란트와 보들레르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했을 뿐이다. 135pg

그녀는 '그림들의 배후를 추적하는게 버릇' 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깐 좀 우아하게 말하면 '그림의 역사와 배경을 공부하는 것' 인데, 그녀의 그런 툭툭 던지는 말투는 은근히 거만한가? 겸손한가?
소크라테스이전부텀도 '요즘애들 버릇없'었듯이 시대 또한 항상 우울하다. 그래도 그 '우울' 을 힘으로 살아가는건 왠만한 예술가에게도 버거운 일일게다. 나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특별한 ' 우울' 은 찾아오고. 그 우울을 허용하는 시절이 있었다. 그녀의 책 제목 ' 시대의 우울' 은 나에게 그렇게 공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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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10-07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 털썩스럽다.. ^ㅂ^)b
시대의 우울, 우연히 읽고는 참 의외다 싶었어요.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 제목만 알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괜히 우습게 보고 있었는데, 참. 괜찮더라구요. ^^
화가의 우연한 시선도 좋았구요. 멋진 강연 열심히 들으시는 하이드님의 모습이 제일 멋집니다만. ^^

하이드 2005-10-07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너스.. 음.. 안 보인다. ^^;;

판다님. 그러게요 .그러게요. 저도 그랬는데, 정말 의외네요. 이 사람.


hnine 2005-10-07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 시작해서는 단숨에 읽은 책 중의 하나랍니다. 작가의 강의를 어디서 들으시는지, 부럽네요. 시도 솔직하고 직선적이었지만, 저는 이 사람의 이런 수필이 제일 맘에 들더군요. 최근에 낸 소설 '흉터와 상처'는 약간 실망^ ^

클리오 2005-10-07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 시인인데 서양미술 쪽으로 넓혀가는 줄 알았었는데... 완전 잘못 짚었었군요.. ^^

kleinsusun 2005-10-10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강의를 어디서 들어시는거예용?
살짝꿍 알려주세용.

카페인중독 2006-09-21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녀의 그 싸한 말투때문에 자꾸 들춰보게 되요...
그 말투가 중독성이 좀 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