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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열정'이란 문패명을 달고 나온 책을 구입하기 위해 발걸음을 서점으로 향했다. 제법 한기까지 느껴지는 쌀쌀해진 날씨탓인지 길을 걷는 사람들은 저마다 두툼한 옷으로 완전무장한 채 바삐 걷고 있다. 서점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밖에 맴돌고 있을 추운 한기와 이별을 고한 후 내 옷과 밖으로 들어난 피부 표피들은 따뜻한 온기와의 만남을 갖는다. 평소 머릿속 즐겨찾기에 넣어 두었던 몇몇 책들을 들여다 본 후 지갑속 투명 비닐안에 넣어져 있는 노란색 포스트잇 한 장을 꺼낸다.포스트잇에는 도서명, 저자, 출판사 順으로 약간 삐뚤한 내 글씨가 쓰여져 있는데, 이 메모지를 서점 직원에게 건네며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흰 장갑을 끼고 책을 정리하고 있던 그녀는 근처 컴퓨터 자판 앞으로 다가가 장갑을 벗고 자판을 두드리며 검색을 시작한다.
‘산도르 머래이’, ‘산드로 마리아’, ‘산돌 마라이’ 등등.
이상은 그녀가 잘못 입력한 저자의 다른 이름들이다. 그만큼 산도르 마라이는 아직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셈이었다.
책은 장군(헨릭)에게 콘라드가 보낸 편지가 도착하면서 부터 전개되기 시작하는데, 사십 일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전혀 만나지 못했던 친구 콘라드에게 장군이 마음속에 간직했던 의문점들을 밖으로 끄집어 내는 것이 책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한 두 해도 아니고 이십사 년 동안 청소년기와 장년기를 함께 보낸 친구 콘라드가 어느날 갑자기 ‘도주(장군의 표현대로 말하면)’ 하고 콘라드가 소개시켜줘 장군과 결혼까지 한 크리스티나는 콘라드가 열대로 도주한 후 그를 ‘겁쟁이’라고 남편 장군에게 말한 후 무려 팔년이나 장군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별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십 일 년 전 콘라드와 헤어졌을때의 마지막 식사 모습을 최대한 그대로 재현해 내려고 음식과 포도주, 장식에 이르기 까지 하나하나 신경 쓴다. 다만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이라면 크리스티나가 없다는 점과 둘 다 인생의 황혼녘인 일흔 다섯살의 나이를 먹었다는 점일 게다. 장군은 콘라드에게 그동안 마음속에 차곡차곡 정리해 둔 듯한 인상이 역력이 드는 의문의 물음표들을 그에게 계속 던진다. 그러나 그 의문은 애초에 대답을 듣기 위한 물음이 아니기에 손님인 콘라드도 별 말이 없고 묻는 장군도 계속 말만 이어 나간다. 콘라드는 장군과의 대화에선 그의 이름 대신 ‘손님’으로 칭해졌는데, 아마도 한 곳에 머무르지도 않을 것이며 곧바로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하는‘손님’이란 의미가 깃들여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콘라드에겐 적격인 단어선택이 아닌가 한다. 밤을 지새면서 까지 거듭된 얘기가 끝난 후 손님은 다시 자신의 다음 행선지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 이 책은 막을 내린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부분은 읽는 독자들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개인적으론 무수한 상상의 연결고리들을 독자들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만일(if)'이라는 가정법을 써서 콘라드와 장군, 크리스티나 등에 적용시켜 본다면 이 책을 좀 더 재미있게 접근해 볼 수 있으리라.
‘만일 콘라드가 장군을 사냥터에서 총으로 쏴 죽였다면...’
‘만일 콘라드가 장군의 아내 크리스티나와 함께 열대로 떠났다면....’
‘만일 장군이 격분해 콘라드와 크리스티나 둘 다 죽이거나 혹은 한 명을 죽였다면...’
등등.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새싹처럼 힘이 넘치는 파릇파릇한 젊은 시절이 어느새 휘~익 소리 내며 지나가고 이제 막 삶을 보는 눈이 떠질때쯤 세상과 작별을 고하게 된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사랑과 우정중에서 그 어느 편도 손을 들어 주지 않는다. 또한 장군이 분노와 상실감에 악착같이 버텨온 사십 일 년 침묵의 세월에 보상보단 이렇게 살아 숨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맙고 감사한 감정을 은근히 드러내 보였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빛의 엿보이는 그런 책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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