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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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이었던 은교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광고 문구에 얇은 귀가 솔깃했다. 작가 스스로가 미쳐서 썼다던 적요의 뜨거운 사랑을 이야기했던 은교‘. 강렬했던 여운이 몇 년이 흘러도 쉽게 잊히지 않고 가끔 생각나 재탕도 하는 내가 이런 광고문구에 혹하는 건 당연한 얘기.

 

소소한 풍경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분명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관계를 이야기하는 건 맞다. 광고에 빗대어 보면 이건 분명 사랑 이야기여야 하는데 내가 생각한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가 광고를 잘못 본걸까, 아니면 광고가 잘못된 것일까. 각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또 한명의 여자.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헤집으며 이상한 관계를 쌓아가는 소소에서의 작은 풍경.

 

이들의 상처는 모두 가족에 관한 것이다. 남편으로, 아버지와 형으로, 새아버지로 흘러가는 상처에 관한 이야기는 이들을 더욱 돈독하게 만드는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결국 곁에 비어있는 자리의 허전함을 느낀 이들이 상처를 외면하고자 작은 도시 소소로 떠나오면서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고 위안이 되는, 일상처럼 그냥 지나쳐도 모를 아주 작고 작은 소소한 이야기. 뚜껑을 열어보면 마냥 소소한 이야기가 아닌 거라는 게 여실히 드러나지만 깊은 상처를 지닌 이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책을 전부 읽고 나서의 느낌은 모르겠다였다. 작은 판형에 두껍지도 않은 책을 지진부진 일주일을 붙잡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권 읽기도 버거운 요즘인데 하염없이 뚝뚝 끊기는 행간에 집중을 하기 힘들었다.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의도를 파악하기엔 나의 문학적인 소양이 너무 초라하기만 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책이 손에 안 잡힌다는 핑계로 그동안 너무 쉬운 책들만 읽었나 하는 뼈아픈 반성을 하게 만든 시간이었다. 소소에서만 알 수 있는 이들의 관계가 내내 머릿속을 아프게 헤집는다. 부유물처럼 들러붙어 쉽게 떨쳐지지도 않는다. 숙제 같은 마음으로 읽었지만 무언가 바늘로 콕콕 쑤시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도 든다. 소소한 풍경에 나도 한발자국 깊숙이 들여놓은 기분. 이들의 비밀스러운 사랑 한 자락을 몰래 읽다 들킨 기분. 이 깊은 여운이 아마 오래 머무를 것 같다.

 

p.51
나는 여전히 죽음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죽음이 지우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워지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누구에게는 가시처럼 박히는 것이 죽음이다. 선인장의 어떤 가시는 몸뚱어리에 박혀 몸 자체로 둔갑한다. 어떤 사람에겐, 어떤 기억들이 바로 그렇다.

아픈 기억은 최종적으로 가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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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피다
우지혜 지음 / 청어람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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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 이후 숨 막히는 집안 분위기에 도망치듯 뛰쳐나온 서연. 갈 곳이 없었던 서연은 병석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후원을 하고 있던 고아원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천사누나라고 부르며 졸졸 쫓아다니던 강준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시간이 지나고 검사가 된 서연. 바쁜 시간을 쪼개 아이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들고 천사원을 방문하는데 득달같이 달려드는 아이들을 항상 제지해주던 강준이 없다. 강아지 같던 소년은 쑥쑥 자라 완연한 남자의 모습을 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느닷없이 강준에게서 느껴지는 아릿한 감정에 서연은 혼란스러워진다. 서연을 바라보며 오래 간직해 온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강준은 서서히 홀로서기를 결심하고 서연의 곁에 머무른다.

 

오랜 시간 간직해온 마음에 빈틈없는 믿음까지 더해지니 이들의 사랑이 찬란한 빛을 발하기까지의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강준이 살아가는 이유이자 강준의 세상 모든 것이 되어버린 한 여자 심서연. 이렇게 절절하고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그녀가 내심 부러워서 질투심이 슬쩍 일기도 한다.

 

주인공은 물론이고 조연까지 버릴 캐릭터들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단권인 게 아쉬울 정도. 너무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후반부는 쫓아가기 살짝 버겁기도 하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인 강준이가 내뿜는 마성의 매력에 혼미해질 정도이니 버겁거나 말거나 어느새 남자는 역시 연하남이 최고라며 외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여자 주인공인 서연이가 매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만한 집안이 있음에도 자기 발로 박차고 나와 검사가 되었고 강단 있는 성격으로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여자가 봐도 멋있더라.

 

평생 온 마음을 다해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을까. 끝이 어딘지 가늠이 되지 않는 서연에 대한 강준의 깊고 깊은 마음은 티끌 한 점 없이 순수하고 깨끗하다. 태양을 한없이 짝사랑하던 해바라기는 그렇게 단단하게 여물어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준의 온전한 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깨질세라 아끼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심장이 따끔거린다. 오랜 시간 뭉근한 열에 데워져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는 사랑이 더 애틋한 건 그 때문이다.

 

단단하게 여문 해바라기가 태양의 사랑을 흠뻑 받아 활짝 펴 비로소 아름다운 제 모습을 찾는 것처럼 첫 출간작 이후 작가의 성장을 함께 하는 느낌이 들어 나까지 괜히 뿌듯해진다. 작품을 더해갈수록 단단해지고 농밀해지는 글에 흡족한 마음도 든다. 시들지 않을 해바라기는 결코 없겠지만 다른 꽃들보다 오래 펴있는 해바라기는 있다. 그 해바라기처럼 우리 곁에 오래 머무르며 좋은 글로 즐겁게 해주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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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소나타
솔겸 지음 / 도서출판 오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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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든든한 비호 아래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던 소영.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으로 순식간에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게 자란 소영은 이를 악물어 보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던 중 자신의 형을 유혹해 달라는 한 남자의 이상한 의뢰를 수락하게 되는데...

 

늦은 밤에 시작해서 새벽까지 앉은 자리에서 읽어버렸다. 남녀 주인공들의 로맨스가 살짝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있길래 기대치를 한층 내려놓고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굉장히 특이한 설정에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졌다. 남자 주인공 알아맞히기에 열이 올라 미스터리 소설을 보는듯한 착각도 했다.

 

작은 숨결 하나, 작은 손짓 하나 무척이나 관능적이다. 섹시한 매력이 철철 넘치는 주인공들이 풍기는 관능미가 아니다. 작가가 공들여 쓴 장면 하나하나에 관능미가 물씬 풍긴다. 그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뿐인데 호감을 가지고 있는 여자와 남자가 만나니 이렇게 새로워 보일 수가 없다. 치밀한 계산에 의한 접근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발산되는 본능에 의한 끌림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책을 접하기 전에 최대한 책 소개 글이나 뒤표지의 꼭지 글은 읽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스포가 있는 글은 아니지만 재미가 반감될 수 있으니까. 설정이 굉장히 특이하다. 로맨스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플롯의 이야기다. 아예 대놓고 이 남자가 주인공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끝까지 독자를 쥐락펴락하며 알쏭달쏭하게 만든다. 절대 방심은 금물! 책장을 덮을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로맨스가 없어도 좋다. 너무 과하면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을 텐데 미스터리를 적당히 버무려 이야기의 매력을 한층 살렸다. 개연성이 살짝 부족해 보여도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니 차기작이 무척 기대된다. 그저 그런, 흔하디흔한 이야기들에 지칠 때 펼쳐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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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계십니까 - 사람이 그리울 때 나는 산으로 간다
권중서 지음, 김시훈 그림 / 지식노마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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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산사를 찾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복잡했던 머릿속이 말끔히 정리되는 느낌이 좋아 자주 찾는 편이다. 믿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슴없이 절이든 성당이든 가까운 곳에 있으면 무작정 찾아 가는 편. 유독 나들이를 좋아하시는 엄마의 등살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곤 하지만 넓게 펼쳐진 풍광에 넋이 나갈 정도로 좋았던 적이 많아 두말없이 따라나서곤 한다. 목차를 보니 가까운 곳에 위치한 용주사도 있고 가족 여행 중에 들려본 내소사도 있고 내남자와의 특별한 여행 중에 만났던 부석사도 있고 언제 가도 너무나 좋은 백담사도 있고. 생각보다 가 본 곳이 많아 뿌듯해진다.

 

어느 사찰을 가든 사찰의 역사 등을 기록한 커다란 팻말(?)이 입구 쪽에 항상 자리 잡고 있다.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어도 그것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풍광에 시선이 빼앗겨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인 그것이 이렇게 궁금해지고 그냥 지나친 게 후회되기는 처음이다.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은 흥미롭지만 워낙 알고 있는 게 미미해서 검색도 해가며 열심히 찾아봤다. 책을 통해 숨겨진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니 다녀왔던 곳도, 앞으로 가 볼 곳도 특별해지는 기분이다. 종교인만이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았던 위화감이 사라지고 친근하게 느껴져 꼭 가 본 것처럼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백석을 사랑했던 김영한의 절절한 사랑이 함께 한 길상사와 고요한 전나무 숲길의 내소사가 기억에 남는다. 내소사의 화려하지 않아도 단아하고 청초한 멋이 눈길을 사로잡는 대웅보전과 문짝에 새겨져 있던 꽃무늬 문살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다. 담아두었던 기억 한 자락을 꺼내보게 만드는 아릿한 책. 누구에게나 다 그러지는 않을 테지만 유독 나에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제일 뒤쪽에 이런 글이 있다. ‘25곳의 산사 중 얼마나 가보았는가? 그리고 머릿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는가?’ 얼마만큼 가본 게 중요하지 않다. 물론 가봤던 절의 이름이 나오면 뿌듯해지고 아름다운 풍광이 생각나 잠시 기억을 더듬는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여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놀러 다녔나하는 생각에 뼈아픈 반성도 했고 사찰의 숨겨진 이야기들과 건축 이야기를 들으며 즐겁기도 했다. 이젠 어느 사찰을 가더라도 조금 다른 시선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덕분에 돌 하나, 나무 하나 다르게 보이니 한층 높아진 수준을 어떻게 감당할까 싶지만 언제 찾아도 좋은 곳임은 분명하니 열심히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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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단 대학 탐방기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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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촌부 춘단은 남편의 암 치료를 위해 서울 아들네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병원에서 남편을 간병하던 중 만나게 된 사람 소개로 천지대학교 청소 노동자로 일을 하게 된 춘단. 가난했던 어린 시절 배우지 못한 서러움이 가득했던 춘단은 대학교에 간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강의실을 들락거리며 청강도 하고 옥상에서 만난 시간강사와 오붓한 점심시간을 즐기기도 한다. 춘단이 대학교에서 하는 일은 공부가 아닌 비록 청소였지만 춘단은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즐겁다.

 

할머니가 주인공인줄 몰랐다. 이름이 촌스러운 학생이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겪는 좌충우돌 탐방기 뭐 그 정도로 생각했는데 춘단 할머니가 이렇게 씁쓸하게 할 줄 전혀 몰랐다. 춘단이 일하는 대학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 같다. 모순된 사회 앞에 나약하기만 한 우리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춘단은 마음을 달리 먹는다. 현재 서있는 자리가 남들이 보기에 하찮고 초라해 보여도 마음먹기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이 달라지는지 보여준다. 시간강사를 대신해 춘단이 몸소 행했던 일은 마음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할머니의 또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할머니의 손처럼 굽고 버석거리는 감정들이 내내 함께였지만 씁쓸해도 좋았다. 작가의 말처럼 이 시대 어디에선가 진짜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나이가 아직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나이답지 않은, 시대를 대변하고 있는 글들이 가슴에 아프게 박혀온다. 아마 다른 글들도 찾아 읽어봐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다. 할머니의 따뜻한 품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p. 354-355
코끼리 등에 올라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봄꽃들을 바라보던 춘단은 이 세상에 완벽하게 새로운 사람이란 없구나, 생각했다. 다들 자신의 피에 담긴 누군가를 흉내내고 있었다. 실패는 반복되고 인간은 대를 이어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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