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시간을 아세요? 베틀북 그림책 49
안느 에르보 글 그림, 이경혜 옮김 / 베틀북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저녁을 먹고 나서 산책을 나갑니다.
엄마와 두 아들은 걷는 날이 대부분이지만 때로 큰 아이은 자전거를 타고 작은 아이는 씽씽카를 타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저는 자판기에서 뽑은 차 한잔을 들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벤치에 앉아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하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기도 하고 점점 짙어져가는 하늘을 보기도 하다가 하늘에 별이 반짝이기 시작하면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그 어슴푸레하고 정적이 깃든 시간은 참으로 짧기만 합니다.
주위가 점점 어두워져서 참으로 짧아서 아쉽기 그지 없는 그 어스름한 시간.
한낮의 소란스러움이 살짝 가라앉은...그러나 툭 건드리면 다시 낮 동안의 즐거움이 와르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그 파란 시간을 저는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어서 집으로 돌아가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또 뭔가를 바삐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지만
그 파란 시간에는 걸음도 천천히 걸어야 하고 이야기도 나직나직해야 할 것 같아집니다.

제게 이런 여유로움을 주는 것은 이 파란 시간의 주인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낮의 태양왕도 아니고 쌀쌀맞고 차가운 밤의 여왕도 아닌 머리는 한낮의 빛으로 가득하고 심장은 한밤의 어둠으로 물들은 채 한손엔 작은 책을 들고 머리엔 골무를 쓰고서 그저 높은 장대발을 조용히 걷는 파란 시간이기 때문일 겁니다.

아름다운 새벽공주를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가슴을 부여잡고 책갈피에 조심스레 끼워넣은 흰장미 한송이를 소중하게 바라보는 그 파란 시간이 바로 이 시간의 주인이기 때문일 겁니다. 태양왕과 밤의 여왕이 옥신각신 싸우는 틈에 살짝 끼어들어서 한손에 든 자신의 책 이야기를 들려주는 파란 시간이 주인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 여유롭고 편안한 시간의 아름다움을 이 그림책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제 아이에게 한단어로 말해줄 수 있었을까?

어느날엔가 저보다 한발씩 앞서 달려가는 그림자를 발견한 아이는 "아, 엄마! 파란 시간이다!"라고 외쳤답니다.
"엄마, 파란 시간이 장대발을 신어서 키가 크~~잖아. 그래서 이렇게 우리 그림자도 긴~~가봐. 그렇지 않아?"

파란 시간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정말 이리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 아름다운 단어를 아이가 알고 아이가 사용하고 아이가 즐긴다는 것이 또한 그렇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림책이 그래서 좋습니다. 어른에게는 어른들만의 즐거움으로...아이에게는 아이만의 느낌으로... 같이 그림책을 읽은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그 느낌의 은밀한 즐거움. 그것은 제가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지게 된 아주 특별한 행복이랍니다.

어느 때는 우리들만의 이런 즐거움에 아빠가 미처 동참하지 못해서 얼마나 아쉬운지 모릅니다.
우리끼리 소근소근대며 낄낄대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말을 이어갈 때 그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아빠를 보면 왠지 미안해지면서 아쉽답니다.
그래서 아빠들이 같이 그림책을 보면 참 좋을텐데...생각을 하지요.


책을 펼치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으며 음미해보는 아름다운 글귀....

파란 시간을 아세요.
불을 켜기엔 아직 환하고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기엔 조금 어두운 시간.
읽던 책을 그대로 펼쳐 놓은 채
생각에 잠기고 꿈을 꾸는 시간.
펼친 책장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시간.

땅거미 질 무렵의 어슴푸레한 시간.
그림자는 빛나고 땅은 어둡고 하늘은 아직 밝은 시간.
온 세상이 파랗게 물드는 시간.
세상 모든 것들이 조용히 밤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
하늘 끝자락이 붉어지고 태양은 멀리 어딘가로 자러 가는 시간.

늘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가
돌아갈 때만 조금 달라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시간.

그런 파란 시간을 정말 아세요? 

정말로 이런 파란 시간을 아세요?
오늘 당신의 파란 시간에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긴 장대발을 신고 밤의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파란 시간의 발자국 소리를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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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eschen 2004-07-26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느 에르보 넘 좋아요.
아직은 이넘보다 제가 더 좋아하지만, 언젠가 아이도 그녀의 책을 보며 탄성을 지를
그날을 아직은 기대해봅니다.
최근에 '부엉이와 보름달'을 보고도 그랬어요.
그럴땐 아이가 얼른 컸음 좋겠다는 생각을 하죠. ^^
이 책, 잊지않고 기억해뒀다 다음에 꼭 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