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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말 찌꺼기

 글 / 한광준 <문화평론가, 편집인> 토지 2002.5월호

아마도 이 글이‘토지’에 실려 독자들에게 읽혀질 즈음이면‘한일 월드컵’이 한참 진행 중일 때이리라. 이 시점에 우리의 말글에 어떠한 일본말 찌꺼기들이 남아 있는지 되짚어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뜻있는 분들과 크고 작은 한글 관련 단체들의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활동으로 현재에는 일본말 찌꺼기들이 많이 없어지고 순화되었지만 아직도 그 찌꺼기들이 남아 있고 은연중에 쓰이고 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1945년은 우리 말글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복된지 57년이 다 되어가는 아직까지도 그 찌꺼기가 남아 있음은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땡땡이

날이 더워지면 사람들은 시원한 음료수는 물론이요, 시원한 옷을 찾기 마련이고 느낌마저도 시원한‘땡땡이 무늬’옷을 찾곤 한다. ‘동그란 점이 사방으로 난 천 따위의 무늬’를 흔히‘땡땡이 무늬’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땡땡이’는‘점점(點點)이’의 일본식 발음이다. 한자 점(點)의 일본어 발음이‘텐-’이고 이것이‘땡땡이’가 된 것이다. 우습지 않은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수십 년 동안‘물방울무늬’’점무늬’를‘땡땡이’무늬라고 한 우리들 자신이.

사시미

만약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주지 않았다면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신화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이야기이다. 불이 없었다면 참 많은 것이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요즘 식도락가이니 미식가이니 하며 먹는 즐거움을 말하는 사람도 많은데, 무엇보다도 먹는 게 무척 달라졌을 것이다. 다양한 조리법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불의 덕일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조리법이 발달하고 다양해져도 우린 가장 오래되고 간단한 조리법도 여전히 즐기고 있다. 바로 날 것 그대로를 먹는 그것, ‘회’이다.

‘회’는 대표적으로‘육회’와‘생선회’가 있는데, ‘생선회’를‘사시미’라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사시미’는 일본 요리로 우리말로는‘생선회’이다. 그리고‘스시’는 우리말로 ‘초밥’이며, ‘생선초밥’에 꼭 필요한 푸른 빛을 띠는 양념 이름은‘와사비’가 아니라‘고추냉이’며, 약간 매운 맛이 파 밑동처럼 생긴 반찬은‘락교’가 아니라‘염교’이다. 이뿐 아니라‘생선초밥’이 나오기 전에 나오는 곁들이 음식들을‘스끼다시’라고 말하곤 하는데, 국립국어연구원에서는 이를 우리말‘곁들이’‘곁들이 안주’로 순화하였다. 이제는 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듯 한데, 아는 것 따로 말 따로인 것인 무슨 이유에서일까.

무데뽀

영화‘넘버3’의 송광호가 유행시킨 말이 있다. 다름 아닌‘무데뽀’이다. ‘무데뽀’는 일본말이다. 한자로는‘무철포(無鐵砲)’라고 쓰고 그렇게 읽는다. 아는 이는 다 아는 것처럼 전쟁이 한때 삶이었던 일본에서‘총(철포) 없이’나서는 것은 곧 무모함을 뜻했다. ‘총도 없이 전장에 나서는 무모함’에서 비롯한 낱말이 일본말‘무데뽀’이다. 이런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떤 이는 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갈 방법으로‘무데뽀 정신’을 내세웠다.

‘보통 사람’도 아닌 아무개 대학의‘교수님’이 신문에서 그랬다. ‘무데뽀’가 일본말인 것을 몰랐었다면 모를까, 뻔히 일본말임을 알면서도 쓴다면 그건 정말 문제다. 축구 한-일전에서 우리가 지면 그렇게 분해하면서, ‘오리지널 일본말’을 입에 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면 앞뒤가 안 맞는 일 아닐까. 국립국어연구원에서는‘무데뽀’를‘막무가내, 무모’로 순화하였다.

삐까뻔쩍

‘반짝반짝 작은 별……’어린 시절 이 노래를 안 불러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밤하늘의 별,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의 그‘반짝임’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반짝이다’의 큰말은‘번쩍이다’이다. ‘반짝’‘번쩍’모두 고운 우리말이다. 그렇다면‘삐까뻔쩍’은? ‘반짝반짝’에 해당하는 일본어는‘삐까삐까’이다. 그러니‘삐까뻔쩍’은 일본어‘삐까’와 우리말‘뻔쩍’이 합쳐져 만들어진 이상한 국적 불명의 말이다. ‘삐까뻔쩍’대신에‘으리으리한’,‘멋진’‘아주 좋은’등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을 골라 써야 할 것이다.

곤색

‘소라색’‘곤색’‘구로곤색’등 이러한 말들은 옷가게에서 쉽사리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문제는 이 말들이 다 일본말이라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왜 하늘색을 어른들이‘소라색’이라고 하는지 이해 못 했었다. 그리고 무심코 따라 했었다. ‘하늘’이 일본말로‘소라’인 걸 안 건 한참 뒤의 일이다.

그렇다면 곤색은? 역시 일본말이다. ‘검은 빛을 띤 짙은 남빛’을‘곤색’이라고 하는데, 우리 말로는 감(紺)색이다. 그‘감(紺)’의 일본 발음이‘곤’인 것이다. 그리고 짙은 감색을‘구로곤색’이라고 하는데, ‘검다’는 뜻의 일본어‘구로’와‘곤색’을 붙여 만든 말이다. 모두 다 쓰지 말아야 할 일본어 찌꺼기이다. 따라서 검은 빛을 띤 짙은 남색은‘곤색’이 아니라‘감색’이다. ‘먹는 감(柑)〔감:〕’과 헷갈릴 수도 있으나 짧게 발음하면 감색이 된다.

뗑깡

어릴 때 누구로부턴가는 꼭 들었음직한 말이 있다. ‘뗑깡 부린다, 뗑깡 쓴다’는 말이다. 자주 듣는 말이 아니지만‘뗑깡’이란 말을 접하곤 한다.

‘뗑깡’은 남의 자식이든 내 자식이든 어린애가 칭얼대고 투정부릴 때 스스럼없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뗑깡’은 일본말로서 한자‘전간(癲癎)’을 뗑깡이라고 읽는다. 뜻은‘지랄병, 간질병’이다. 요즘은 일본에서도 전문 의학 용어로만 쓰이는 말이다. ‘뗑깡 = 지랄병, 간질병’이란 걸 안다면 내 자식은 물론이고, 남의 자식에게도‘뗑깡’이란 말 쓰지 못할 것이다. 이 땅의 주인공인 어린이에게‘지랄병에나 걸려라’하고 저주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뗑깡’의 우리말은 어리광, 응석이다.

일본식 한자어

일본의 글자‘가나’는 자유로운 글자살이를 하기에는 다소 불충분한 글자이다. 그러한 까닭에 그들은 한자를 버릴 수 없는 숙명을 떠안고 있는데, 그들이 쓰는 각 한자의 음이나 뜻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 게다가 그들은 한자를 음으로 읽기도 하고 뜻으로 읽기도 한다. 그들이 자기네 방법대로 표기한 한자를 들여다가 그대로 적어 버리거나, 우리의 한자음대로 읽어 버린데서 비롯된 일본말이 있다. 이런 것을 통틀어‘일본식 한자말’이라 한다.

이런 부류의 낱말은 매우 많다. ‘거래, 검사, 과학, 국회, 농구, 물리, 방송, 배구, 야구, 철학, 판사, 화학, 회사’들과 같이, 우리들이 날마다 쓰고 있는 말들이 사실은 그런 것들이다. 이들은 이미 우리말에 거의 녹아 들어 일본식 한자말이라는 이유로 몰아내기는 어렵게 된 것들이다.

그러나 한자를 매개로 한 일본말 찌꺼기 가운데에는 이제부터라도 얼마든지 바꾸어 쓸 수있는 말들이 많다. 일본말이 들어오기 전에 쓰이던 우리말이 있는 것, 같은 한자말이라도 우리말식 한자말이 따로 있는 것 등은 마땅히 그것을 써야 한다. 흔히‘일본식 한자말’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몇 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개찰구( → 표끊는곳/들어가는곳), 견적서( → 추산서), 경합( → 경쟁), 굴삭기( → 굴착기), 기합( → 얼차려), 나대지( → 빈집터), 납득하다( → 알아듣다/이해하다), 매표구( → 표파는곳), 세대( → 가구), 수속( → 절차), 시건장치( → 잠금장치/자물쇠), 절사하다( → 잘라버리다), 추월하다( → 앞지르다), 타합하다( → 의논하다/상의하다), 특단의( → 특별한), 행선지( → 갈곳/가는곳)

우리말을 더럽히는 대표적인 일본말 찌꺼기가 바로 위와 같은 것들인데, 한자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아무 생각없이 아이에게 뗑깡이라는 말을 썼고, 감색을 곤색이라고, 굴착기를 굴삭기라고 가르쳐왔다. 회사에선 견적서를 발행해왔고, 외근나갈 때면 행선지를 표시했다. 반성 또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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