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갈대 > 역지사지

아침을 아주 더러운 기분으로 맞이해야 했다. 김선일씨 피살 소식을 홍수처럼 쏟아 놓는 뉴스를 보고 있노라니 밥맛이 뚝 떨어졌다. 그래도 간장에 밥을 비벼서 꾸역꾸역 다 먹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그닥 놀라지는 않았지만 막상 현실로 일어나니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전에 일본인들도 곱게 보내준 전례가 있다면서 조심스레 낙관론을 펼치던 뇌가 없는 인간들은 이제 궁색한 추모, 변명, 대처 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칼로 찔러 놓고 미안해하는 격이다. 추가파병을 고수한다는 발표를 통해 이제는 칼이 아니라 기관총을 난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지를 밝히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는 솔직히 김선일씨가 죽었다고 해서 슬프지는 않다. 그는 이라크가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미국편에 서서 이라크인들에게 해를 끼치는 대가로 돈을 벌기 위해 이라크에 갔다. 그가 죽어도 싼 인간이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역시나 보수 언론에서는 "우리는 착해, 너희는 나빠"라는 도덕성을 완전히 상실한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기사를 연신 써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혹해서는 안 된다. 지금 나쁜 놈이 누구인가? 한국인가 이라크인가? 당연히 한국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지금 미국이 우리 나라를 이라크처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재건을 한다는 명분으로 온다면 어떻겠는가? 더군다나 그 나라에서 곧 파병을 할거라면. 환영은 고사하고 죽이고 싶지 않겠는가? 과거에 우리는 지금의 이라크와 비슷한 일제 식민지 지배 시대에 어떻게 대응했던가? 일본의 문명화, 개발화를 고마운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던가? 절대 아니었다. 일본에 빌붙어 기생한 친일파를 제외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일본놈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쓸어버릴 궁리를 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라크인에게 한국인은 '쓸어버리고 싶은 역겨운 놈들'일 뿐이다. 그들에게 우리는 먼 나라에서 온 천사가 아니라 미국 뒤에 서서 죽음의 구덩이로 밀어넣는 악마로 보일 것이다.

제발 역겨운 자기합리화를 그만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이라크에 간다고 해도 그건 우리 생각일 뿐이다. 이라크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오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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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키웨이 2004-06-2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지사지라는 말이 이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잠시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서 퍼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아프다.
젠장..
왜 우리나라는 힘이 일케 없냐구?

panda78 2004-06-23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니가 가라면 가야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