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을 대학 시절에 읽었다. 옆에 보이는 저 북디자인은 개정판에서 복원된 원서의 디자인이고 내가 처음 읽었던 키친은 아주 조잡하기 짝이 없는 paperback이었다.
취직과 영어공부에 쫒기는 요즘 대학생들도 그렇게 여유가 있을까 싶지만 나의 대학시절은 아~주 여유있는 시간들이었고 남들이 공부하러 가는 도서관에 가끔씩 책을 보러 들르곤 했었다.


그당시 바나나는 인기작가는 아니었다. 일본문학 코너에서 책을 찾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이 책은 막 출간된 것도 아니었는데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만큼 인기가 없었다. 그당시 일본문학은 하루키와 류가 평정하고 있었고 대학생들은 하루키를 유행가사처럼 트렌드로 읽고다녔다.  그런 쿨한 트렌드에 비춰볼 때, 바나나는 조금 유치한 감이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왜 그렇게 감성의 코드가 맞는다고 느꼈는지....아마 전생애를 걸쳐 만화 애호가로 보낸 나의 감성이 처음 발현된 책이었기 때문일게다.(사실 또래보다 조금 유치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바나나 이후에 "만화를 못그리면 소설가가 된다"라는 컨셉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여간, 나는 왠만하면 책을 빌려읽지는 않는다. 읽고 나서 너무너무 갖고 싶은데 구할 수 없다면? 그 고통을 이미 어린 시절에 깨달았기 때문에 책은 꼭 사서 읽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고 난 이 책을 구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음을 밝힌다. 서점마다 책은 품절이었고(인기가 없어서) 도서관에서 책을 훔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도 처음 고민했던 것 같다. 은박지를 바코드에 붙이면 나가면서 소리가 안난다는 낭설과....소심한 나의 고뇌..ㅋㅋ...그때 이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생전 친하게 지내지 않던 과친구와 돈독해지기까지 했다. (그녀는 등단했다고 들었는데 잘 살고 있는지....)

결국 차선책으로 교보문고 외국어 코너에서 영역본을 샀다. 지금도 그렇지만 영문으로 감정을 느낄만큼은 아니어서 그냥, 책을 갖고 있다는데 만족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에 바나나가 많이 출간되기 시작하면서 읽었던 많은 책들에는 이 책만큼의 만족감이 없었던 것 같다.  

때가 꼬질꼬질해져 책장에 꽂혀있는 이 책을 볼 때마다 처음 느꼈던 감성의 깊이가 다시 돌아오는 것만 같다. 지금이라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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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lbi 2004-08-24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하하...나도 이 책을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발견했었지..읽고 나서는 소장을 하기 위해 서울시내 대형서점을 뒤지고 돌아다니다 결국 어느 후진 서점 한구석탱이에서 발견하고는 기뻐했지...키친 보다는 키친 안에 있던 "달빛 그림자"때문에....음....내 대학 시절은 그리움과 거리가 멀었는데, 햇살 가득한 창가에서 이책저책 쌓아놓고 읽을 수 있었던 그 때가 그립군....

michelle 2004-08-24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보쇼 우리 같은 대학 아니었던가? 지금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면 열람카드에 니 이름과 내 이름이 있겠군. 즐거운 시절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