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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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척 따뜻한, 유쾌하고 찡한 이야기. 한 가족의, 우리들의, 세상 모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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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처럼
김경욱 지음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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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다림의 마력이란 오묘해서 그냥 기다리는 것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뭔가를, 누군가를 기다리기 시작한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작당이라도 한 듯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97쪽

행복에도 맛이 있다면 여름이 익어 가는 밤, 강이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먹는 차가운 치즈 케이크 같은 것이리라.-133쪽

해 본 사람들은 안다. 결혼이라는 통과의례가 얼마나 복잡다단한가를. 이혼을 억제하는 것은 부부 클리닉도,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주위의 이목도 아닌 결혼이라는 제도의 번거로움이다. (중략) 가급적 간소하게 치르자고 여자와 뜻을 모았지만 빠뜨릴 수 없는 최소한의 것들로만으로도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147쪽

영원한 추억은 없다. 시간은 힘이 세니까. 그러나 마지막 추억마저 어둠에 묻혀도 깨달음의 빛은 언젠가 찾아온다. 사랑도 힘이 세니까.-214쪽

매운맛은 실연의 아픔과 같아서 시간이 치료해 줄 때까지 고통을 온전히 느끼는 수밖에 없었다. 매운맛과 실연의 공통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혼쭐이 나고도 또 찾으며 고통이 클수록 고통을 준 대상에게 더 끌린다. 다른점도 있다. 실연의 아픔은 눈물 없이 견딜 수 있지만 매운맛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그러니까 태어날 때 울지 않은 사내조차도.-226쪽

생사의 기로에 선 자들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한 방은 단말마의 고통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이었다. 공감은 신의 언어이니 고독한 환자에게 신은 모르핀도 히포크라테스도 아닌, 또 다른 환자다.-257쪽

의사는 말했다. 결혼은 두 사람이 모여 사는 게 아니라 네 사람이 모여 사는 거라고. 신랑과 신부, 그리고 각자의 마음 속 아이. 네 개의 다른 별에 살건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사는 거라고.-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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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
김중혁 지음 / 창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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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3, 9, 1, 4, 2, 4, 5, 7, 8, 6 같은 숫자를 하루종일 바라보고 있으면 거기에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것이 1과 10 사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의 상태는 7이었고, 체력은 4였고, 내 생활은 1이었고, 자신감은 0이었다. 기분은 1과 4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모든 상황을 숫자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기자 나는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 숫자란 내가 바꿀 수 있느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1이 2가 되기를 기다리며 멍청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9쪽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삶은 일직선이었다. 하나의 사건은 이전 사건의 결과이자 다음 사건의 원인이었다. 도미노가 다음 도미노를 넘어뜨리듯 모든 사건은 연결돼 있었다. (중략) 중요한 것은 내 가 지금 이곳에 서 있다는 것이고, 지금의 이 사건은 또다른 사건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14쪽

형이 죽은 이후 나는 더이상 미래를 믿지 않게 됐다. 아직 오지 않은 일들은 영원히 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다시 일어날 확률이 높다. 현재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과거만 필요하다. 미래는 사치다.-50쪽

고리오의 공동묘지에는 높다란 봉분이나 커다란 비석이 없었다. 대신 작은 돌에다 죽은 사람의 이름과 태어난 날짜와 죽은 날짜와 짧은 글귀를 적어놓았다. 땅을 보며 걷다보니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속으로 읽으며 공동묘지를 걸었다. 모두 죽은 사람의 이름 같지 않았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이름에는 차이가 없으니까.-72쪽

나는 착한 사람들이 죽으면 세상에 커다란 변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의 소멸 때문에 지구의 무게가 가벼워지거나, 그 사람들의 소멸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무거워지거나, 하다못해 그 사람들의 소멸 때문에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생길 줄 알았다. 며칠 동안은 슬픔이 자욱하게 세상을 뒤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죽음이란 결국 작은 점일 뿐이었다. 멀리서 보면 작은 점이었고, 더 멀리서 보면 더 작은 점이었고, 더욱 멀리서 보면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는 점일 뿐이었다.-80쪽

하나의 사건은 다음 사건의 원인이 된다. 나는 열 권의 노트를 펼쳐볼 때마다 거기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까 생각한다. 첫번째 노트는 분명히 두번째 노트의 원인이 된다. 하지만 가끔은 첫번째 노트의 일이 세번째 노트의 원인이 될 때도 있다. 내가 지금 겪는 어떤 사건은 내일 벌어질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삼일 후에 벌어진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은 여러 사건의 원인이 된다. 원인과 결과는 무한대로 뻗어나가서 끝내는 원인과 결과를 도저히 밝혀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원인과 결과는 무슨 의미일까.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121쪽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진실들이 아무도 모르게 묻혀버리는 걸까. 지금 채지훈씨에게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얘기했다고 쳐요. 그건 두 사람만의 비밀이잖아요.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채지훈씨는 그걸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죽고, 나도 내 비밀을 채지훈씨에게 말고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죽어요. 어딘가에 기록하지도 않고요. 그러면 두 사람이 죽는 순간 하나의 진실이 완전히 사라지는 거죠. 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다가 죽었다면 그건 비밀이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입밖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그건 둘만의 비밀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사라진 비밀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요. 무덤 하나에 그런 비밀이 하나쯤은 묻혀 있지 않을까요? 무덤 하나에 비밀 하나. 비밀 하나에 십자가 하나. 십자가가 둘이면 묻힌 비밀이 둘. 십자가가 셋이면 비밀이 셋."-138쪽

"정말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나 말해보세요."
"단순한 문장처럼 생겼어요."
"뭐예요? 그건 욕 아니에요?"
"아뇨, 짧지만 강렬한 문장 있잖아요. 한눈에 확 들어오고, 쉽게 잊혀지지 않는 문장요."
"내 얼굴이 표어나 경고문 같다는 거예요?"
"휴, 그런 게 아니고요."
"하하, 농담이에요. 어떨 때 보면 되게 순진하단 말야. 귀여워요. 그 얘기 좋은데요. 단순한 문장처럼 생긴 얼굴. 기억해둘게요."-159쪽

한참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먼 곳에 작은 불빛 몇개가 보였다. 그게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둠속에서는 거리감각도 무뎌진다. 그토록 멀리 떨어진 우주의 별들이 너무나 가깝고 선명하게 보이는 것도 모두 이 어둠 때문일 것이다. 어둠속의 불안한 마음이 불빛을 환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빛이 보였지만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나는 언젠가부터 가깝게 보이는 불빛은 믿지 않았다. 불빛들은 언제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멀리 있었으므로 나는 불빛으로 위안을 삼지 않았다. 더이상 어떤 일에도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212쪽

홍이안의 말이 맞다. 특별한 죽음은 없다. 특별한 죽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동경하고 두려워하지만 세상에 특별한 죽음은 없다.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고, 0이다. 어머니의 죽음도, 형의 죽음도, 홍혜정의 죽음도 나에게 조금 특별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이제 곧 나 역시 그 죽음들을 잊을 것이다. 죽음들은 평범해질 것이고, 쉽게 잊혀질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0이 되지 말고, 쉽게 소멸하지 말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240쪽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모르지?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인 인간이야. 얼마나 이기적인지 가르쳐줄까? 난 희망 같은 거 잘 몰라. 희망은 다른 사람이랑 공유하는 거니까. 그런 건 별로야. 내 몸속엔 욕망뿐이야. 하루하루의 욕망이 날 살게 해줬어. 저 물건을 갖고 싶다, 저 사람을 갖고 싶다, 모든 걸 갖고 싶다, 그런 욕망이 날 살게 했어."-243쪽

자료를 수집하다보면 기존의 모든 자료를 배신하는 자료가 나타나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하는가로 연구자의 태도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첫번째 유형의 연구자는 기존의 자료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자료를 버린다. 게으른 연구자다. 두번째 유형은 새로운 자료의 가능성을 믿고 기존의 자료를 버린다. 피곤한 스타일의 연구자다. 마지막 유형은 상반되는 자료를 그대로 놓아둔다. 자신의 논리가 어긋나고 부서지더라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하는 것이다.-343쪽

나에게 삶은 일직선이었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 하나의 사건은 이전 사건의 결과이자 다음 사건의 원인이었다. (중략) 도미노가 다음 도미노를 넘어뜨리듯 모든 사건은 연결돼 있었다. 처음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처음이란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마지막 도미노는 무엇일까. 마지막 도미노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사건이 될 것이다.-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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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품절


나는 이 소설의 내용을 일일이 얘기해주고 싶지 않다. 특히 이 소설의 결말을. 그저 읽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서 그래도 어쩌지 못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보듯이 이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스스로 읽어내며 이 아름답고 허망한 두 사람의 사랑의 기록을 따라가보라고만 말하고 싶다. (소설가 신경숙 추천사)-?쪽

그들은 어떻게 만났고, 왜 이다지도 소심하고 순진했을까? 그들은 운명을 믿기엔 스스로 너무나 세련됐다고 생각했지만, 그토록 중요한 그들의 만남이 우연을 통해 이루어진 게 틀림없고 또 분명 그것이 수백 가지의 작은 사건들과 선택들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여전히 하나의 패러독스로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 만남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건 정말로 끔찍한 가능성이었다.-48쪽

그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서로 코가 거의 닿아 둘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울 때까지. 그가 말했다.
"그래서 첫눈에 반한 거라고 생각했어?"
가벼운 마음으로 놀리는 말투였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끔은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녀가 마주해야 할 불안은 아직 저 멀리에 있었다. 한 달 전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고 서로에게 고백했다. 마음 설레는 일이었다. 그 직후 그녀는 반쯤 깬 상태로 하룻밤을 지샜다. 자신이 성급했다고, 뭔가 중요한 것을 포기했다고, 사실은 자기 것이 아닌 뭔가를 줘버린 듯한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진정으로 흥미진진하고, 새롭고, 자랑스럽고, 깊은 위안을 주었다. 그녀는 거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또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해방과도 같았다. 그녀는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75쪽

그리고 무엇이 그들을 방해하고 있는가? 그들의 성품과 과거가, 무지와 두려움과 소심함과 까탈스러움이, 권한과 경험, 느긋한 태도의 결핍이 그랬고 그 다음엔 막장에 다다른 종교적 금기가, 영국인 특유의 민족성과 계급히, 그리고 역사 자체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뿐이었다.-117쪽

플로렌스는 사랑의 전주前奏가 이처럼 강도 높고 조심스런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언극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해"라는 명백한 세 마디 말 외에, 꾸며낸 것 같거나 바보처럼 들리지 않는 말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125쪽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하잖아."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거야."-153쪽

그는 그녀를 등지고 돌아서서 해안선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고 다시 돌아와서 거칠게 자갈밭을 발로 차며 공중에 작은 돌들을 흩뿌렸고, 개중에 몇 개가 그녀의 발 가까이에 떨어졌다. 그의 분노가 그녀 자신의 분노를 일깨웠고, 그녀는 갑자기 그들의 문제가 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너무 예의발랐고, 너무 경직됐고, 너무 소심했고, 까치발을 든 채 서로의 주위를 빙빙 돌며 중얼거리고 속삭이고 부탁하고 동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174쪽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삶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고, 머리띠를 한 어린 소녀가 그의 사랑스러운 친구가 되었을까.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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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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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논리가 아닙니다. 부분과 전체의 문제예요.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은 철저히 질서가 지배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인 예측이 가능한 것이구요. 통계학에서는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사실은 필연적 결과라는 걸 숫자로 증명하죠. 쌤플의 숫자가 커지면 극히 일어나기 어려운 일도 의외로 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측을 많이 하면 할수록 하나라도 맞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예측을 하게 유도하는 것은 초능력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속임수지요."-18쪽

"(전략) 인간이 오피스텔 밀집지역의 폐쇄회로 데이터 따위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세요? 골방에 틀어박혀 인터넷으로 세상 모두를 검색할 수 있다고 해도 거기에서 삶에 대한 실감은 결코 얻지 못해요. 나는 내가 만나러 온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어요."-30쪽

─그리고 공중에 뜨는 공상도 많이 했어요. 몸이 가벼워지면 뜰 수 있다고 믿었죠.
─어떻게 하면 가벼워지는데요?
─나를 여러개로 나눠야 해요. 그래서 방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구요. 나는 내가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자라기 때문에 키가 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해요?
─아니요. 이제 어른이니까요.-57쪽

─글쎄요. 사람들은 순종적인 대상에게 오히려 가학적이 되기도 하니까요. 잘해주면 짓밟고 싶어질 때가 있죠. 상대가 무슨 말을 듣기 원하는 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끝까지 그 말만은 하기 싫은 어긋남 같은 거요.-65쪽

넌 뭐든 이런 식이야. 그래, 식당 좌석이 돌아가는 게 네 잘못이냐고 말하고 싶지? 너는 언제나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만을 따르고, 결과적으로 아무 잘못도 없는 거잖아. 그렇지? S의 목소리가 약간 컸는지 맞은편 자리의 악기 연주자와 난쟁이 여자가 우리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나는 분명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프릴이 달린 폭넓은 스커트 아래 가지런히 모은 그녀의 짧은 두 발이 허공에서 대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분명히 느꼈다. 나로부터 나누어진 내 몸의 일부가 가볍게 허공을 날아올라 악기 연주자에게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난쟁이 여자의 옆자리에 가서 앉은 나는 여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해. 나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미안해, 난 쓸모없는 놈이야. 미안해. 눈물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74쪽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날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나는 왜 태어난 걸까,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걸음이 뒤처질 때마다 아버지는 잠깐씩 멈춰서서 기다려주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러듯이 내 몸집이 둔해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오해는 나에게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뚱뚱한 꼬마였던 나는 언제나 뭔가 불만스럽고 또 심술궂게 보였지만 그러나 단지 수줍었던 것뿐이었다.-80쪽

B는 내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이 넘으면 그때부터는 체중을 톤 단위로 계산하라고 농담하곤 했다. 100보다는 0.1이란 숫자가 뭔가 갈망이 있고 이미지도 정교하잖아. 솔직히 다소의 묵직함마저 없었다면 넌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평범할 뻔했어. 그러나 묵직하다는 B의 말이 사실이어서 그랬는지 나는 그 정도 이유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고, 아니면 평범하다는 그의 말이 사실과 달라서 그랬는지 집단적 가치에 의해 떠밀려가는 건 특히 싫어했다.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다수가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어떤 사람들이다.-85쪽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B는 아직도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나는 무엇을 간절이 원하기 이전에 내가 그것을 원해도 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조건에서 살아왔을 뿐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이지는 않았다.-87쪽

나는 어머니에게 상처주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상처주는 자를 멸시하는 어머니의 관록 또한 만만찮았다. (중략) 왜 날 낳았어요? 어쩌다 저런 놈이 생겨나가지고! 어머니와 내가 닭과 달걀이었다면 그런 말로 서로 으르렁댔을 것이다.-96쪽

내가 패스트푸드점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뚱뚱한 사람이 나타나는 즉시 거기 있는 사람들이 맥도날드 소송을 떠올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이 무얼 먹는지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데다가 특히 어린애가 많기 때문이다. 어린애들은 솔직해서 눈에 띄는 점이 있으면 그것을 빤히 바라보기 마련인데, 대부분의 부모들은 천진함에 대한 아이들의 권리만 인정할 뿐 그런 시선을 받고 싶지 않은 타인의 자존심에 대해서는 교육하지 않는다.-99쪽

사람이 이쁘면 먹는 것도 이쁘다더니…… 어머니가 혼잣말로 하는 대화를 시작했다. 늙으면 먹는 모습이 추해진다는 말이 있어. 어느 누가 추한 걸 자꾸 보려고 하겠니. 먹을 것을 뺏어야 할 때가 온 거지. 죽을 때가 된 거야. 사람이 정을 뗄 때도 그런다더라. 정이 식으면 먹는 모습이 제일 보기 싫어진단다. 먹을 것을 뺏고 싶은 심정, 그거 죽으라는 소리 아니겠냐. 먹는 것만큼 치사한 것도 없어. 좋아지는 마음도 다 먹을 때에 생겨나고 살가운 정도 한밥상에서 나오는 거란다. 먹는 게 이쁘면 곧 돼지가 되겠네. 내가 비아냥댔다.-102쪽

나는 그날 B의 마지막 말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삶은 그런 식으로 비루하게 이어지는 거고, 우리는 아버지들의 위선 속에 세상을 배우는 거잖아. 글쎄. 내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너하고 난 달라. 네 아버지는 너를 얻기 위해 잠시 커튼 뒤로 들어갔지만 우리 아버지는 나를 원한 적이 없어.-108쪽

밥알은 달게 씹혀 목구멍 안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내 몸이 미칠 듯이 환호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장이 춤추듯 꿈틀거렸으며 뱃속이 흐뭇할 만큼 따뜻해졌다. 자, 네가 그토록 원하는 탄수화물이다. 숟가락질이 점점 빨라졌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국밥을 퍼먹고 있었다. (중략) 국물까지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자 마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상복 여인이 다가와 말했다. 한그릇 더 드릴까요? (중략) 두 그릇째의 국밥을 나는 후루룩 과장된 소리를 내며 지나치게 급히 먹기 시작했다.-111쪽

밤에 일하는 사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대다수의 다른 사람과 생활리듬이 다르다는 점이다. 다수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커다란 불편인가는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시간을 공유할 수 없는 탓에 익숙했던 많은 것들과 멀어지는 것 정도는 이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른다. 그러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일요일이 아닌 평일 낮 거리를 돌아다니게 되면 내가 거기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이방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156쪽

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지난학기에 가출한 적이 있는 여학생이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성적이 안 올라서 고민이니? 그게 아니고요. 여학생은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저 오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떡볶이 말고 술 사주시면 안돼요? 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B의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었다. (중략)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혼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좀 걷고 싶은 날씨였다. 날카롭게 쏘아볼 뿐 여학생도 따라오지는 않았다. 늦은 밤 도시의 거리에는 텅 빈 채로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서른이 넘었는데, 나도 아직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바람이 서늘하고 간간이 별도 보였다.-183쪽

세상 사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어쩌면 틀을 갖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삶의 매뉴얼 말이다. 아무리 복잡한 일도 틀에 집어넣으면 단순해져버린다. 시간도 마찬가지여서 날짜와 빈칸만으로 이루어진 새 플래너수첩을 펼쳤을 때는 내 앞에 많은 미지의 시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몇개의 스케줄을 적어넣으면 그것은 조각조각 나뉘고 그다음부터는 익히 아는 일상의 시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경륜이라고 좋게 보든 보수화되었다고 비난하든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세상일이 놀랍지 않게 생각되면서 동시에 어느정도 무기력해진다는 사실이다.-188쪽

혹시 나는 취한 그날 은숙에게 편지를 썼을까. 그러고 나서 정말로 부치기라고 했고 그 편지가 가령 십오년 뒤 오늘 만나자는 따위의 내용이었다면, 이런 모든 애매함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말을 믿었을까. 우리는 한때나마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까. 편지는 간절하고도 유치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아마 끝문장은 자못 비장하여 먼 훗날 차마 기억난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너와 나, 우주의 고독한 코스모나츠. 우리의 귀환지점 리버 쎄느에서 쓴다. 잘 가라, 내 청춘.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이여.-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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