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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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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을 읽는 일은 일종의 사소한 도전이다. 글쓴이는 온 힘을 다해 하나의 장편소설을 탈고했고, 출품했고, 당선되었겠지만 읽는이의 입장에서 그 수고를 모두 헤아리기란 사실 어렵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사소한 도전 삼아 책을 펼친다. 당선작을 통해 등단한 작가의 경우 심사평 외에는 그 무엇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과연 읽을 만한 책인가’ 하는 의심을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거두기가 쉽지 않다. 제17회 한겨레문학상 당선작인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 역시 그 의심을 끝까지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 초반의 익살과 중반을 이끌어나가는 각 인물의 사연(앤, 조풍년, 만딩고)에 비해 후반은 지나치게 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이 ‘황급한 결말’은 요즘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들이 대개 지니고 있는 문제 같다. 가령 ‘너무나 흥미진진하던 사건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해결된다든지,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며 끝이 난다든지, 『굿바이 동물원』처럼 신 나게 잘 읽고 있었는데 너무 짧게 뒷마무리를 해 버린다든지‘와 같은 것이다. 제목의 ‘굿바이’를 너무 ‘심플’하게 처리해 버린 건 아닌지 우려가 든다. 앤과 조풍년, 만딩고가 동물원을 떠나는 이야기가 보다 풍성하게 그려졌다면 좋았겠지만 정작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은 다른 인물들이어서 개연성은 둘째 치고 그때까지 소설을 붙잡고 있었던 주요한 힘을 잃은 듯한 느낌을 가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내의 이야기라도 조금 더 했으면 어땠을까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굿바이 동물원』의 매력은 ‘말도 안 되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재치 있게 소설을 이끌어나간다는 점에 있다. 또 취업준비생, 실직자, 남파 간첩 캐릭터를 통해 “사람답게 살고 싶다!”의 메시지를 전달한 점도 흥미롭다. 읽는이에 따라 설정이 억지스럽게 느껴질지도, 공감의 지점을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모두에게 잘 읽히는 소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점들은 여느 소설들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니 크게 문제 삼을 수는 없겠으나, 앞으로 작가가 좋은 작품을 선보이고자 한다면 문장을 잘 썼으면 좋겠다. 문체가 아니라 문장의 문제이다. 재미있는 소설도 좋지만 재미있는 문장으로 만들어진 소설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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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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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집의 제목이 ‘비행운’이란 걸 알았을 때, 수록 작품 가운데 표제를 고르지 않고 새로이 제목을 붙였다는 데 눈길이 갔다.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그것이 김애란의 소설집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비행운. 구름의 이름이든 나쁜 운수를 가리키는 말이든 단어의 말맛이 착 감겨 왔다. 수록 작품 가운데 굳이 좋은 제목을 고르자면 ‘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서른’ 둘 중 하나를 꼽겠지만 아무래도 ‘비행운’이라는 단어는 이번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을 관통하기에 그야말로 제격이 아닌가 싶다. 모두 읽고 나니 수긍이 갔다. 제목이 ‘불행’은 아니어서 다행이야,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 제목과는 별도로 여덟 편 가운데 이번 소설집의 중심에 놓일 작품이라면 단연 「서른」을 말하겠다. 마지막에 실려 있는 이 소설은 편지 형식으로 쓰였는데 스물에서 서른이 된 주인공의 사연이 너무나 ‘현실밀착형’이다. 단편 「서른」은 ‘누군가 지금도 이 질곡에 빠져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시사 프로그램에서나 보던 일인데…… 이거 소설 맞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자칫 잘못 빠질 수 있는 ‘끝장’을 차분한 편지글로 써 놓았는데 문득 내가 편지의 받는 이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멍했다. 스물에서 서른이 된다는 건, 거기까지 간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구나. 생각보다 허망하구나.

 

# 그리고 그 질곡에서, 별반 다를 것 없는 다른 일곱 편 소설의 주인공들이 기어 나온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에서 아내를 잃고 택시 운전을 하며 생활하는 주인공이나 「하루의 축」에 등장하는 공항 청소 노동자 주인공(그녀는 원형 탈모까지 겪고 있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큐티클」, 「호텔 니약 따」에 나오는 젊은 여성들 모두 나이와 성별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일종의 연대를 맺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연대라는 말을 이런 경우에 써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비행운의 연대’였다. 「벌레들」의 여자가 처한 상황이나 「물속 골리앗」의 소년이 구원의 기미 없이 물살에 떠밀리는 것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여덟 명 주인공을 두고 ‘가장 행복한 사람 선발대회’라도 열고 싶다. 아마 그 누구도, 대회에 참가하지 않을 거다.

(「벌레들」과 「물속 골리앗」은 그 분위기나 장면 들이 매우 흡사한데, 아마도 도시를 주제로 한 기획에 함께했던 소설들이어서일 것이다. 「벌레들」은 ‘서울’에 대한 테마소설집에, 「물속 골리앗」은 계간 자음과모음의 한중일 프로젝트 중 ‘도시’ 편에 발표되었다.)

 

# 『달려라, 아비』의 통통 튀는 발랄함도, 『침이 고인다』의 매력적인 냉소도 『비행운』에는 없지만 여기에는 『달려라, 아비』에도, 『침이 고인다』에도 없었던 무엇이 담겨 있다. 전작에 등장했던 그들도 계속 살다 보니 ‘비행운의 세계’를 겪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살아 본 사람만이 아는 무언가. 등단 10년, 서른을 넘긴 김애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는 바로 ‘이 다음’이다. 이번에 너무 착 가라앉아서 겨울에 연재를 시작하는 두 번째 장편은 ‘활기 있고 유쾌’하게 쓰겠단다. 나는 늘 ‘이 다음’이 궁금하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애란의 문장은 이것이다. “안녕하세요, 가늠할 수 없는 안부들을 여쭙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안녕 하고 물으면, 안녕 하고 대답하는 인사 뒤의 소소한 걱정들과 다시 안녕 하고 돌아선 뒤 묻지 못하는 안부 너머에 있는 안부들까지 모두, 안녕하시길 바랍니다”(「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비행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런 대답을 하겠지. “안녕은 개뿔, 운수도 드럽게 나쁘다.” 그래도 나는 그들이 뒤에 이런 말을 덧붙였으면 좋겠다. “그래도 날마다 비행운을 보며 산다. 비행기 타는 꿈을 꾸면서.” 꿈인들 어떠랴. 나는 그들이 꿈을 꾸며 살게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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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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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너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졌지. 그럼에도 네가 영원히 내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 안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네가 나왔다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험인지 네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있는 입술이 내게는 없네. 네 눈을 빤히 쳐다보고 싶지만, 너를 바라볼 눈동자가 내게는 없네. 너를 안고 싶으나, 두 팔이 없네. 두 팔이 없으니 포옹도 없고, 입술이 없으니 키스도 없고, 눈동자가 없으니 빛도 없네. 포옹도, 키스도, 빛도 없으니, 슬퍼라, 여긴 사랑이 없는 곳이네. (228, 229쪽)

 

0. 계간 《자음과모음》에 다섯 계절 동안 연재되었고 EBS 라디오 연재소설에서 한 달 동안 낭독되었던, 그 소설이 책으로 나왔다. 제목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으로 바뀌었다. 연재 당시의 제목은 ‘희재’였는데 바로 주인공인 카밀라 포트만의 한국 이름이기도 하다. 위의 인용한 부분은 내가 생각하는 이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이다. 엄마 정지은이 딸 정희재(카밀라 포트만)를 향해 하는 말, 아름답다.

 

1.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카밀라 포트만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카밀라’라는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태생지인 한국 진남으로 향한 그녀는 그곳에서 ‘희재’라는 이름을 찾게 된다. 하지만 진남의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는 혼란스러워진다. 희재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24년 전 정지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탐색하는, 정희재와 정지은 두 여자의 이야기를 골격으로 하고 있다.

 

2. 1부 카밀라, 2부 지은에 이어 3부에는 ‘우리’가 등장한다. 정지은과 함께 학교를 다녔던 윤경, 미옥, 유진, 그리고 이희재. 앞서 등장했던 신혜숙, 최성식이 읽는 이를 혼란스럽게 했다면 3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서는 하나씩 단추를 끼워볼 수 있다. 소설의 말미까지 “과연 정희재의 친부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지만, 진남의 모든 사람들이 진실을 숨기려 들지만, 그럼에도 진실은 하나로 존재하고 희망의 날개는 꺾이지 않는다. 소설을 읽는 동안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에서 ‘말하면 할수록 모르는’의 상태가 되었다가, 희미하나마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의 마음으로 끝낼 수 있었다.

 

3.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중심에 이해와 오해, 소통 등이 놓여 있었다면 그 이후의 김연수 소설의 화두는 ‘고통’으로 조준점을 바꾼 것 같다. 이전의 소설들에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 부쩍 그쪽으로(?) 하는 말들이 많아졌달까. 최근의 단편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서 타인의 고통과 그 보편성의 짐작을 엿보았다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는 타인에게로 건너가 그 고통을 어루만져 주는 일이 가능할까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을 터. 그러고 보면 이번 ‘작가의 말’에서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이라는 것은 ‘푸른색으로 쓴 것’을 읽어 달라는 당부 아닐까.

 

0. 더 많은 말은, 책을 다시 한 번 읽은 다음에 겨우 몇 마디 덧붙일 수 있을 듯하다. ① 군데군데 다른 곳이 있겠지만 라디오 연재소설의 낭독으로 들어보는 것도 추천. ② 그리고 작가의 책 가운데 초판에서 가장 많은 오자를 발견했는데, 재쇄 들어가면서 수정되었다고 하니 다행이다. 막바지에는 한 장 걸러 하나씩 오자가 눈에 띄어 마음에 걸렸는데, 2쇄를 한번 읽어봐야겠다. ③ 번역서는 대개 양장으로 나왔지만, 작가의 책 가운데 양장본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함께 꽂아두면 살짝 이질감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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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 창비시선 343
문태준 지음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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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선생님은 어느 수업에서나 문태준의 다음 시를 말씀하셨다. “오래/ 오래도록/ 걸어/ 걸어서 온/ 첫 눈/ 하나/ 하나가/ 벼랑집”(「첫눈」 전문, 『수런거리는 뒤란』 수록).

 

지금은 멀어진 누군가가 나에게 선물한 시집은 문태준의 『가재미』였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가재미」 부분).

 

2009년 봄 동네의 서점에 들러 뒤늦게 『그늘의 발달』을 샀다. “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 한 몸의 그늘/ 그늘의 발달/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눈물은 웃음을 젖게 하고/ 그늘은 또 펼쳐 보이고/ 나는 엎드린 그늘이 되어/ 밤을 다 감고/ 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 나의 日記에는 잠시 꿔온 빛”(「그늘의 발달」 부분).


여름에는 첫 산문집 『느림보 마음』을 샀다.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한 책에는 그의 시만큼이나 정갈한 필체로 서명이 되어 있었다. 그는 소설가 김연수 김중혁과 함께 ‘김천 트로이카’로 불리는 시인이다. 나는 세 사람의 인연이 신기하다.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 나왔다. 4년 만이다. 제목은 『먼 곳』. 이를 문태준답다 해야 할지 답지 않다 해야 할지 잠시 갸우뚱했다. 표제작 「먼 곳」을 읽고 역시 그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먼 곳」의 전문.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큼, 한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시인 허수경의 추천사 역시 눈에 띈다. 추천사 전문.

 

그의 시들은 느슨한 시인, 나를 단련시킨다. 그의 ‘시로 씌어진 제사(祭祀)’를 읽으며 나는 달리기를 준비한다. 신발끈을 조이며 겨울모자를 쓴다. 한 시인이 도착한 어느 순간에 동반하기 위하여 정결하게 옷깃을 여민다. 나의 폐활량이 충분하여 이 달리기가 그곳으로 이르길 바란다. 짧고 간결한 제사, 투명하게 슬픈 제사, 풀벌레와 새소리, 낙과와 울퉁불퉁한 과일과 쓸쓸한 어머니를 위한 제사. 이 아득한 아름다움은 본래 우리의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전에 아름다움은 우리를 떠나갔나. 태준의 시들은 그 ‘본래 아름다운’ 것들을 우리 앞으로 데려온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더라도 심란하지 않게 저녁을 잘 보내라는 안부인사다. 이런 짧은 안부인사가 시의 어떤 힘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인들이여, 왜 세계는 가장 가난하고 아름다운 연인으로 우리를 기억하겠는가. 허수경(시인)

 

 

오늘 책을 받아 이제 겨우 앞부분 조금을 읽었다. 천천히 읽고 싶다. 시인에 대한 이런저런 기억이 떠올라 그것만을 받아 적는다. 책을 받은 오늘도 몇 년이 지나면 두세 줄로밖에 적을 수 없는 일이 될지 모르겠다. ‘먼 곳’처럼. 장석남의 신작과 번갈아 읽고 있는데 이를 한 줄로 적자면, “먼 곳을 바라보는 고요”쯤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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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로 오세요 문지 푸른 문학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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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받아 읽고 작성한 글입니다.

 

“외투”

 

근래 학교 폭력 문제가 불거지면서 고질적인 문제부터 신종 현상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학교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교권의 추락이니 공교육의 붕괴니 하는 말들은 오래 전부터 회자되어 지금은 색이 바랜 느낌이기도 하다. 요즘의 더 큰 문제는 교권 추락이나 공교육 붕괴보다도 더욱 심각한 것이다. 학생들 사이의 서열 조장, 날로 진화하는 ‘왕따’ 수법,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 이 모든 학교 문제를 과연 손쓸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나로서는 그런 비관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의 기사 중 가장 실소했던 것은 아웃도어 브랜드에 대한 것이었다. 몇 년 전까지는 ‘떡볶이 코트’라고 하여 누런빛의 외투를 교복마냥 입고 다니는 것이 겨울철 학교 풍경이었다. 물론 유행 따라 패션 따라 변하기 나름이라지만 현재의 실상은 그저 어이가 없다. 인터넷에 한창 돌아다녔던 ‘계급도’를 보면 모자 유무에 따라, 색깔에 따라, 가격대에 따라 그 계급이 나뉘어 있다. 더욱 놀랐던 것은 가장 낮은 계급임에도 가격이 25만원이라는 점. 비싼 모델을 입고 다니면 부모님 등골을 휘게 한다고 하여 ‘등골 브레이커’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그래, 백 번을 양보해서 저들 나름대로 순위를 매겼다고 하자. 물가가 올랐으니 속에 솜이 들었든 오리털이 들었든 값이 비싸졌다고 치자. 아웃도어 하나를 매개로 범죄를 저지르는 아이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후배를 골목으로 불러 옷을 빼앗고 달아났단다. 돈을 빼앗은 것도 아니고 옷이라니. 그런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라 무더기로 경찰서에 불려갔단다. 영상 속의 아이들은 옷을 입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누더기를 입은 것도 아니었다. 그 옷은 충분히 따뜻해 보였다. 그런데도 더 알아주는 브랜드, 이왕이면 높은 계급, 그런 옷을 입고 싶었던 걸까.

 

“더 높은 곳으로”

 

서설이 길었다. 아이들이 더 좋은 옷을 입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좋다’는 것은 재질이 좋고 보온성이 좋다는 뜻이 아니다. 보통 그 나이대쯤의 아이들에게 ‘좋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에 기대는 바가 크다. 남들이 알아주는 것, 남들이 입고 다니는 것이 바로 좋은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학생들의 안식은 매우 까다로운데 그것은 결국 어른들이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 있다. 대한민국. 더 높은 곳으로, 더 좋은 땅으로, 더 나은 직위로, 더 큰 부와 명예를 좇아 악착같이 살아온 것이 바로 우리들 아닌가. 물론 인간이라면 누구나 ‘좋아지기를’ 희망한다. 대한민국은 짧은 시간에 유별날 정도로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일찍이 부를 축적한 사람과 죽어라 일을 해도 몇 푼 쥐지 못한 사람의 간극이 무언가를 만들어 낼 때마다 더욱 벌어졌다. 더 높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열망은 자의든 타의든 채찍질당하기 마련이어서 앞만 보고 달린 것이 우리 어른들이다. 자라나는 세대는 본 대로 따라한다. 어린 날의 영악함과 뒤섞여 더욱 거침없는 방법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소설을 크게, 아주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1) 현실이 소설에 반영되어 있어 소설의 의미를 현실에 견주어 해석할 수 있는 것과 2) 굳이 현실과 잇지 않아도 그저 이야기 자체로 즐길 수 있는 것으로 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소설은 이야기에만 매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읽을 때가 있다. 구병모의 세 번째 장편소설 『방주로 오세요』가 그렇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까지 쉴 새 없이 책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소설이건 현실에 발붙이고 있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야기 속에도 현실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SF든 판타지든 그 속에는 나름의 세계가 있다. 그래서 한 작품을 읽고 나면 꼭 ‘지금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 『방주로 오세요』 역시 그랬다. 책장을 덮는 순간부터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2012년 2월, 대한민국의 모습을.

 

“종교의 자유”

 

혹시 한 국가의 수도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말한 사람을 기억하시는지. 작가는 그 발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높이 1.2㎞, 넓이 39.5㎢의 도시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께 봉헌해 버렸다. 이참에 방주도 만들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방주시’이다. 노아의 방주의 재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의 방주가 만물 생명의 보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현대판 방주는 상위 1퍼센트 계급의 ‘옥체 보전’을 위해 세워진 곳만 같다. 이 도시의 건물명, 도로명, 시정 원리 등등은 모두 특정 종교의 지배를 받는다. 나는 이것이 매우 불쾌했다. 당연히 특정 종교에 대한 혐오의 뜻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된 국가이고, 국가 종교가 인정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국가이다. 그런데 방주시는? 철저히 종교 이념에 물들어 있는 공간이다. 상위 1퍼센트와 특정 종교가 결합하면, 그 시너지 효과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방주로 오세요』에는 그 시너지가 그득 담겨 있다.

 

길을 지나다 보면 종교 단체에서 나온 사람들을 꽤 많이 볼 수 있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종교보다도 처음 듣는 단체가 더 많다. 저들은 어디서 집결하고 어떤 신을 믿는지 궁금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무례한 설교 행위는 불쾌하기 짝이 없다. 단지 몇몇 사람에 이끌려 원치 않는 전도 행위에 얽히는 것도 스트레스인데, 특정 종교에 의해 모든 것이 움직인다면 그 느낌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직접 겪지 않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그 느낌 때문에 나는 방주시의 특권층보다는 ‘지상의 아이들’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밤을 새하얗게 연소시킬 소설”

 

책의 뒤표지에 적힌 문구인데 전혀 과장이 없다. 앞서 말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술술 읽힌다. 작가의 작품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위저드 베이커리』나 『아가미』보다 『방주로 오세요』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문지푸른책’이라는 청소년 도서의 꼬리표를 달고 나왔지만 어른들도 함께 읽어봐야 할 작품이다. (대개의 ‘청소년 소설’이 그렇다. 문제의 원인이 결국은 상당 부분 어른들에게 있기 때문 아닐까. 우리에게는 서로 간의 교감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독자는 『방주로 오세요』를 다만 한 편의 소설로만 읽고자 할지라도 교묘히 겹치는 현실의 모습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말대로 ‘현재의 가정법’일 뿐이므로 누군가에 의해서든 가정을 참인 것마냥 단정지을 수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마노, 윤시온, 나일락. 윤시온은 학교를 폭파하고자 했고 나일락은 프로네시스(윤시온이 이끄는 조직)의 꿍꿍이를 저지하고자 이마노를 이용했다. 주인공 이마노는 갈등하지만 어느 편에도 확실히 발을 붙이지는 못하는 듯이 보였다. 진짜로 폭파해야 할 것은 방주고등학교가 아니라 세 사람을 얽어매는 낡은 관습과 이념, 보이지 않는 벽, 닫힌 귀와 그릇된 오해 같은 것들 아닐까. 끔찍하다. 바로 모든 것을 폭파해도 좋다는 뜻으로 들린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방주로 오라’는 말은 함께하자는 의미가 아니었다. 너희는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는 일종의 선 긋기와 같은 것이다. 불쾌하다. 그 불쾌가 현실이어서 더욱 불쾌하다. 만일 이 시대에 새로운 노아의 방주가 생긴다면 일대 혼란 속에서 살아남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 답을 생각하는 일이 어려웠으면 좋겠다. 신조차 고르기 어려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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