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품절


나는 이 소설의 내용을 일일이 얘기해주고 싶지 않다. 특히 이 소설의 결말을. 그저 읽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서 그래도 어쩌지 못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보듯이 이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스스로 읽어내며 이 아름답고 허망한 두 사람의 사랑의 기록을 따라가보라고만 말하고 싶다. (소설가 신경숙 추천사)-?쪽

그들은 어떻게 만났고, 왜 이다지도 소심하고 순진했을까? 그들은 운명을 믿기엔 스스로 너무나 세련됐다고 생각했지만, 그토록 중요한 그들의 만남이 우연을 통해 이루어진 게 틀림없고 또 분명 그것이 수백 가지의 작은 사건들과 선택들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여전히 하나의 패러독스로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 만남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건 정말로 끔찍한 가능성이었다.-48쪽

그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서로 코가 거의 닿아 둘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울 때까지. 그가 말했다.
"그래서 첫눈에 반한 거라고 생각했어?"
가벼운 마음으로 놀리는 말투였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끔은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녀가 마주해야 할 불안은 아직 저 멀리에 있었다. 한 달 전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고 서로에게 고백했다. 마음 설레는 일이었다. 그 직후 그녀는 반쯤 깬 상태로 하룻밤을 지샜다. 자신이 성급했다고, 뭔가 중요한 것을 포기했다고, 사실은 자기 것이 아닌 뭔가를 줘버린 듯한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진정으로 흥미진진하고, 새롭고, 자랑스럽고, 깊은 위안을 주었다. 그녀는 거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또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해방과도 같았다. 그녀는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75쪽

그리고 무엇이 그들을 방해하고 있는가? 그들의 성품과 과거가, 무지와 두려움과 소심함과 까탈스러움이, 권한과 경험, 느긋한 태도의 결핍이 그랬고 그 다음엔 막장에 다다른 종교적 금기가, 영국인 특유의 민족성과 계급히, 그리고 역사 자체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뿐이었다.-117쪽

플로렌스는 사랑의 전주前奏가 이처럼 강도 높고 조심스런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언극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해"라는 명백한 세 마디 말 외에, 꾸며낸 것 같거나 바보처럼 들리지 않는 말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125쪽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하잖아."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거야."-153쪽

그는 그녀를 등지고 돌아서서 해안선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고 다시 돌아와서 거칠게 자갈밭을 발로 차며 공중에 작은 돌들을 흩뿌렸고, 개중에 몇 개가 그녀의 발 가까이에 떨어졌다. 그의 분노가 그녀 자신의 분노를 일깨웠고, 그녀는 갑자기 그들의 문제가 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너무 예의발랐고, 너무 경직됐고, 너무 소심했고, 까치발을 든 채 서로의 주위를 빙빙 돌며 중얼거리고 속삭이고 부탁하고 동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174쪽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삶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고, 머리띠를 한 어린 소녀가 그의 사랑스러운 친구가 되었을까.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19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