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고 연주하고 평론하고 강의하는 시인’ 성기완의 네 번째 시집과 세 번째 앨범을 묶은 시집+앨범 세트가 도착했다. 2008년 여름 세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앨범을 동시 발매한 이후 이번에도 신작을 함께 발표했다.

 

곧 3호선 버터플라이의 새 앨범도 나온다고 하니 올봄 산문집, 시집, 솔로 앨범, 밴드 앨범까지 그야말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인 성기완이다.

 

시집과 앨범에는 시인이 직접 넘버링과 사인을 기입했다. 나는 213번 세트를 받았다. SNS를 통해 보니 포장 비닐까지 직접 준비했을 정도로 정성을 담았다고 하니 더욱 기대된다.

 

시집을 읽으며 음반을 들으면 되는데, 앨범 없이 시집을 읽거나 시집 없이 앨범을 들어도 괜찮으니 다양하게 시도해 보란다. 게다가 2CD 구성이다.

 

서점에 갔다가 <당신의 텍스트>라는 제목에 이끌려 무작정 시집을 사 읽었는데 왜 그리도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은지 홀딱 반했더랬다. 이번 시집의 제목 역시 특이하다. <ㄹ>이라니. 그때도 시집+앨범 세트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이번에는 정보가 등록되자마자 주문했는데 예상보다 사흘쯤 늦게 도착했다. 물량 확보가 되지 않아 포기하는 것보다는 며칠 참아 무사히 받는 게 당연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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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여름이면 여러 매체에서 ‘휴가철 추천 도서’를 나름대로 선정해 발표한다. 여름에 많이 읽히는 소설은 추리, 미스터리 장르 위주인데 우리나라에서 이들은 아직 기반이 약하기에 주로 외국 번역물이 소개되곤 한다. 최근 북유럽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이름을 올리는 것이 바로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模倣犯)』이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녀의 이름을 대면 『모방범』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텐데, 그것은 『모방범』이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번역된 작품이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이 소설의 방대한 분량과 그에 비해 결코 방만하지 않고 섬세하게 파고드는 묘사가 잘 어우러져 압도적인 힘을 뿜어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2006년 『모방범』이 번역 출간된 뒤 한 해에 6, 7권씩 꾸준히 번역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그녀의 이름이 널리 그리고 깊이 인지되고 있고, 이에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 『모방범』이 아닌가 싶다.

 

일본에서 『모방범』은 5년 동안 연재된 뒤 2001년 두 권의 단행본으로 묶였다(문고본은 5권). 5년 동안 소설을 연재한다는 것, 그리고 5년 동안 그것을 찾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책으로 묶인 것은 역시 어마어마한 분량이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쉽사리 멈출 수가 없다. 미스터리물의 특장(特長)은 바로 이 흡인력이 아닐까. 『모방범』은 여느 소설보다도 그 장점을 극대화시킨 작품이다. 더군다나 이 소설이 다른 소설들과 대별되는 지점은 한국소설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그리고 『모방범』 이전의 다른 번역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것이다.

 

요즘은 다시 ‘본격물’이 인기를 끄는 모양이지만 단지 기이한 현상을 해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문제를 소재로 인간의 내면에서 그 원인을 규명해 보고자 하는 시도는 새로움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공교로운 일이지만 최근 T시 사건의 범인은 뻔뻔하게 텔레비전 인터뷰에 응해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전국의 시청자를 놀라게 했다. U시 사건의 범인은 SNS를 통해 거짓말을 늘어놓는 치졸한 행태를 보였다. 『모방범』을 읽으면서 늘 그 생각이 따라다녔다. 인간은 어디까지 가면을 쓰고 뻔뻔해질 수 있는가, 인간은 얼마나 극악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이쯤에서 『모방범』의 줄거리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더위에 지쳤다면 선풍기 바람을 쐬며 책장을 펼쳐 사건에 동참해 보는 것이다. 3권의 막바지를 읽을 때는 실제로 심박이 빨라져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덩달아 빨라지기도 했다. 처음부터 범인을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의외로 범인은 일찍 드러난다. 범인과, 경찰과, 피해자와, 그 주변 인물 모두를 두고 소설은 인물 각각을 파헤치는 데 집중한다. 그 과정에 일말의 지루함이 없다. 역시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모방범』은 그냥 읽어야 한다. 가볍게 읽고 무겁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소설의 전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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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되면 읽고 싶은 단편들이 있다.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눈이 내리는, 칼바람이 부는 날의 이야기들. 만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 이상하게도 ‘여름에 읽고 싶은 소설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지 못하는데 그것을 ‘겨울’로 바꿔 묻는다면 바로 답할 수 있다. 겨울이 오기도 전에 ‘아, 그때가 되면 읽고 있겠구나’ 싶은 마음이 드는 소설들. 그건 내가 여름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덥고 찌고 연방 땀이 흐르는 날씨에 만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얘기를 하려면, 또 그것을 읽으려면 얼마나 고된 일일까. 아무튼 겨울이 되면, 나는 이 단편들이 꼭 읽고 싶어진다. 그래서 꼭, 읽는다.



1.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

「사랑을 믿다」를 처음 읽은 것은 2008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다. 표제작으로 실려 있었는데(세상에나, 대놓고 사랑을 믿는다 하다니!), 고로 대상 수상작이었는데(이상문학상이 센티멘탈해졌나?), 읽고 나서 몇 날 며칠을 끙끙댔다(이런, 이런, 이럴 수가). 작가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이전까지 이름도 몰랐던 소설가를 맹목적으로 좋아하게 만들어 준 소설이기도 하다.

유독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권여선 소설 속 주인공들답게 남녀는 기차 모양의 술집에서 만난다. 삼 년 만에 만난 그들은 각자의, 그리고 친구의 실연담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여자는 삼 년 전에 실연을 겪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고모님 댁을 방문했던 일을 남자에게 말해준다.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던 그녀 앞에서 각자의 고통을 늘어놓는 세 여자를 보고 그녀는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 남녀가 만난 때로부터 또다시 삼 년 뒤. 남자는 단골 술집에 앉아 옛일을 돌이키며 자신이 놓친 사랑과 흘려보낸 청춘에 대해 생각한다.

소설의 이해하는 키워드는 전반부의 ‘실연의 유대감’, 후반부의 ‘보잘것없음’이다. 실연의 유대만큼이나 끈끈하고 사람을 너그러이 만드는 것은 없다는 것, 그리고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이면 고통의 무게에서도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인생의 한낮’을 제때 알아보는 일일 것이다. 지난날 새된 소리에 홀렸던 일을, 만종을 울리는 청춘 앞에서 후회해봤자 부질없는 일이므로. (소설을 처음 읽을 땐 다소 복잡한 구석이 없지 않다. 이렇게 억지로 정리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읽고 또 읽으면서 아귀를 맞춰야 하는 것이, 그리고 거기에서 어떠한 소름에 가까운 떨림을 느끼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사랑을 믿다」를 처음 읽었을 때, 그 쨍하게 맑고 추웠던 날씨. 그런 날이면 기차 모양의 술집과 안동소주, 맥주와 안주 반반이 생각난다. 주인공들이 만났던 날도 가을이나 겨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처음 읽었던 것이 2월의 초입이었으므로, 어쨌든 나에게는 겨울에 생각나는 소설이 맞으므로, 겨울이라고 해둬야겠다. 서두에서 말했듯 200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고 올 가을에 나온 소설집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 수록되어 있다.



2. 윤대녕의 「대설주의보」

절기로의 대설과 기상으로의 대설이 꼭 같은 것만은 아니겠지만, 대설이 되면 생각나는 소설이다. 나는 대설에 내리는 눈을 직접 본 적이 없다. 얼마 전 대설에 눈이 내렸다지만 올해도 역시 내가 사는 곳은 아주 맑았다. 겨울에도 ‘쾌청’이라는 말이 어울린다면 바로 갖다붙여줄 만큼. 눈길 주의하라는 뉴스가 마냥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는데, 허허로운 기분을 한 편의 소설로 달랬으니 그것이 바로 「대설주의보」다. 올해 3월에 출간된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대설주의보」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관통할 수 있다.
늘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가 있다. (101쪽)

「대설주의보」뿐만 아니라 윤대녕 소설 속 인물들은 유독 오랜만에 만나거나 우연히 스치거나 만날 듯 만나지지 않거나 만나도 금세 헤어짐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국 땅에서 얼굴을 마주하거나, 오륙 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다거나, 만나도 고작 하루쯤 같이 보내야 하는 것이 「대설주의보」 속 남녀의 운명인 듯하다. 이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로 보이기까지 하는데 바로 위의 문장 때문이지 않을까. 만나지니까 만나는 것, 헤어져야 하니까 헤어지는 것, 그렇게 살다 보면 또 만나게 되어 있는 것. 그런 의미에서 「대설주의보」의 결말부는 인상적이다. ‘백색의 계엄령’을 뚫고 만난 이들, 윤수와 해란은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지. 읽는 동안의 긴장과 읽고 난 뒤의 깊은 울림이 독자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임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소설 제목은 최승호의 시 「대설주의보」에서 따왔다. 작가의 말에서도 ‘시집 『대설주의보』에서 영감을 받았음이 틀림없다’라고 말한다. (봄에는 「상춘곡」을 읽어야 한다. 그건 필수 코스!) 윤대녕의 소설은 읽기 어렵다는 독자들도 많은데(물론 나도 거기에 속한다), 이 작품만큼은 ‘윤대녕의 소설 세계’를 학습하지 않고도 읽기 부담 없는 소설이다. 다만, 읽고 난 뒤의 격정은 어쩔 수 없다. 「대설주의보」를 읽고 나면 마음 속에서 이미 내리고 있는 폭설을 그칠 수 없을 테니까.



3. 신경숙의 「부석사 -국도에서」

마지막 소설은 신경숙의 「부석사」이다. 이 소설의 제목은 속임수에 가깝다. 부제를 놓친 채 읽어 나가면 부석사는 언제쯤 나오는 것인지, 애가 탈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제목에 잘 넘어가는 독자라면?) 그래서 「부석사」는 부제를 잘 봐야 한다. ‘국도에서’. 그러므로 이 소설은 ‘부석사 (가는 길) 국도에서’의 어떤 한 장면이다.

‘그’와 ‘그녀’는 같은 오피스텔에 산다. 약속을 피하기 위해(‘그녀’는 P와의, ‘그’는 박PD와의) 두 사람은 새해 첫날 부석사에 가기로 한다. ‘그’와 ‘그녀’는 개(바람이)로 연결되어 있고, 상추밭 서리도 함께 했고, ‘그’는 ‘그녀’의 우편물을 훔쳐본 적도 있다. ‘그’와 ‘그녀’의 오피스텔 방 앞의 것들은 대체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지? 각각 어느 관계를 정리하고 있는 두 남녀가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부석사行. 그 길은 국도에서 지방도로, 군도로, 어딘지 알 수 없는 길로 접어들지만 두 사람은 오히려 편안함(안정)을 느낀다. 결국에는 ‘부석사’가 드러나지 않지만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의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설을 읽으면 눈 속에 갇힌 그들보다도, 부석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몰려든다. 오래 전 가을에 한 번 간 적이 있는데, 겨울의 부석사, 눈 오는 날의 부석사는 어떤 모습일지. 소설의 디테일은 생략하고서도, 책장을 덮을 때 마음으로 퍼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눈이 쌓여 차창을 뒤덮었는데도 결코 춥지 않은, 감았던 눈을 뜨면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서 너른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그것은 두 사람 사이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를 기대하는 마음과도 같을 것이다.

이전까지의 작가의 단편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소설이기도 하다. 2003년 출간된 소설집 『종소리』에 마지막 차례로 실려 있다. 2001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다년간 장편 집필에 몰두하여 소설집 소식은 요원하지만 이미 여러 지면에 발표된 단편들만 모아도 한 권 분량이 되므로 늦어도 내후년쯤엔 새 소설집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세 편의 단편을 추렸지만 모두 장편 못지않은 감동과 여운을 주는 작품들이다. 굳이 계절을 따지지 않아도, 봄이든 가을이든 말이다. 또 다른 좋은 작품을 읽게 된다면 ‘겨울에 읽고 싶은 소설’ 목록에 추가될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이 겨울도, 시린 손 호호 불어가며 탐독하는 계절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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