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구판절판


"흑백논리가 아닙니다. 부분과 전체의 문제예요.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은 철저히 질서가 지배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인 예측이 가능한 것이구요. 통계학에서는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사실은 필연적 결과라는 걸 숫자로 증명하죠. 쌤플의 숫자가 커지면 극히 일어나기 어려운 일도 의외로 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측을 많이 하면 할수록 하나라도 맞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예측을 하게 유도하는 것은 초능력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속임수지요."-18쪽

"(전략) 인간이 오피스텔 밀집지역의 폐쇄회로 데이터 따위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세요? 골방에 틀어박혀 인터넷으로 세상 모두를 검색할 수 있다고 해도 거기에서 삶에 대한 실감은 결코 얻지 못해요. 나는 내가 만나러 온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어요."-30쪽

─그리고 공중에 뜨는 공상도 많이 했어요. 몸이 가벼워지면 뜰 수 있다고 믿었죠.
─어떻게 하면 가벼워지는데요?
─나를 여러개로 나눠야 해요. 그래서 방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구요. 나는 내가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자라기 때문에 키가 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해요?
─아니요. 이제 어른이니까요.-57쪽

─글쎄요. 사람들은 순종적인 대상에게 오히려 가학적이 되기도 하니까요. 잘해주면 짓밟고 싶어질 때가 있죠. 상대가 무슨 말을 듣기 원하는 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끝까지 그 말만은 하기 싫은 어긋남 같은 거요.-65쪽

넌 뭐든 이런 식이야. 그래, 식당 좌석이 돌아가는 게 네 잘못이냐고 말하고 싶지? 너는 언제나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만을 따르고, 결과적으로 아무 잘못도 없는 거잖아. 그렇지? S의 목소리가 약간 컸는지 맞은편 자리의 악기 연주자와 난쟁이 여자가 우리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나는 분명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프릴이 달린 폭넓은 스커트 아래 가지런히 모은 그녀의 짧은 두 발이 허공에서 대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분명히 느꼈다. 나로부터 나누어진 내 몸의 일부가 가볍게 허공을 날아올라 악기 연주자에게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난쟁이 여자의 옆자리에 가서 앉은 나는 여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해. 나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미안해, 난 쓸모없는 놈이야. 미안해. 눈물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74쪽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날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나는 왜 태어난 걸까,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걸음이 뒤처질 때마다 아버지는 잠깐씩 멈춰서서 기다려주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러듯이 내 몸집이 둔해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오해는 나에게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뚱뚱한 꼬마였던 나는 언제나 뭔가 불만스럽고 또 심술궂게 보였지만 그러나 단지 수줍었던 것뿐이었다.-80쪽

B는 내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이 넘으면 그때부터는 체중을 톤 단위로 계산하라고 농담하곤 했다. 100보다는 0.1이란 숫자가 뭔가 갈망이 있고 이미지도 정교하잖아. 솔직히 다소의 묵직함마저 없었다면 넌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평범할 뻔했어. 그러나 묵직하다는 B의 말이 사실이어서 그랬는지 나는 그 정도 이유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고, 아니면 평범하다는 그의 말이 사실과 달라서 그랬는지 집단적 가치에 의해 떠밀려가는 건 특히 싫어했다.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다수가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어떤 사람들이다.-85쪽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B는 아직도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나는 무엇을 간절이 원하기 이전에 내가 그것을 원해도 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조건에서 살아왔을 뿐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이지는 않았다.-87쪽

나는 어머니에게 상처주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상처주는 자를 멸시하는 어머니의 관록 또한 만만찮았다. (중략) 왜 날 낳았어요? 어쩌다 저런 놈이 생겨나가지고! 어머니와 내가 닭과 달걀이었다면 그런 말로 서로 으르렁댔을 것이다.-96쪽

내가 패스트푸드점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뚱뚱한 사람이 나타나는 즉시 거기 있는 사람들이 맥도날드 소송을 떠올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이 무얼 먹는지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데다가 특히 어린애가 많기 때문이다. 어린애들은 솔직해서 눈에 띄는 점이 있으면 그것을 빤히 바라보기 마련인데, 대부분의 부모들은 천진함에 대한 아이들의 권리만 인정할 뿐 그런 시선을 받고 싶지 않은 타인의 자존심에 대해서는 교육하지 않는다.-99쪽

사람이 이쁘면 먹는 것도 이쁘다더니…… 어머니가 혼잣말로 하는 대화를 시작했다. 늙으면 먹는 모습이 추해진다는 말이 있어. 어느 누가 추한 걸 자꾸 보려고 하겠니. 먹을 것을 뺏어야 할 때가 온 거지. 죽을 때가 된 거야. 사람이 정을 뗄 때도 그런다더라. 정이 식으면 먹는 모습이 제일 보기 싫어진단다. 먹을 것을 뺏고 싶은 심정, 그거 죽으라는 소리 아니겠냐. 먹는 것만큼 치사한 것도 없어. 좋아지는 마음도 다 먹을 때에 생겨나고 살가운 정도 한밥상에서 나오는 거란다. 먹는 게 이쁘면 곧 돼지가 되겠네. 내가 비아냥댔다.-102쪽

나는 그날 B의 마지막 말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삶은 그런 식으로 비루하게 이어지는 거고, 우리는 아버지들의 위선 속에 세상을 배우는 거잖아. 글쎄. 내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너하고 난 달라. 네 아버지는 너를 얻기 위해 잠시 커튼 뒤로 들어갔지만 우리 아버지는 나를 원한 적이 없어.-108쪽

밥알은 달게 씹혀 목구멍 안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내 몸이 미칠 듯이 환호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장이 춤추듯 꿈틀거렸으며 뱃속이 흐뭇할 만큼 따뜻해졌다. 자, 네가 그토록 원하는 탄수화물이다. 숟가락질이 점점 빨라졌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국밥을 퍼먹고 있었다. (중략) 국물까지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자 마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상복 여인이 다가와 말했다. 한그릇 더 드릴까요? (중략) 두 그릇째의 국밥을 나는 후루룩 과장된 소리를 내며 지나치게 급히 먹기 시작했다.-111쪽

밤에 일하는 사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대다수의 다른 사람과 생활리듬이 다르다는 점이다. 다수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커다란 불편인가는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시간을 공유할 수 없는 탓에 익숙했던 많은 것들과 멀어지는 것 정도는 이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른다. 그러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일요일이 아닌 평일 낮 거리를 돌아다니게 되면 내가 거기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이방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156쪽

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지난학기에 가출한 적이 있는 여학생이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성적이 안 올라서 고민이니? 그게 아니고요. 여학생은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저 오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떡볶이 말고 술 사주시면 안돼요? 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B의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었다. (중략)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혼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좀 걷고 싶은 날씨였다. 날카롭게 쏘아볼 뿐 여학생도 따라오지는 않았다. 늦은 밤 도시의 거리에는 텅 빈 채로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서른이 넘었는데, 나도 아직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바람이 서늘하고 간간이 별도 보였다.-183쪽

세상 사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어쩌면 틀을 갖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삶의 매뉴얼 말이다. 아무리 복잡한 일도 틀에 집어넣으면 단순해져버린다. 시간도 마찬가지여서 날짜와 빈칸만으로 이루어진 새 플래너수첩을 펼쳤을 때는 내 앞에 많은 미지의 시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몇개의 스케줄을 적어넣으면 그것은 조각조각 나뉘고 그다음부터는 익히 아는 일상의 시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경륜이라고 좋게 보든 보수화되었다고 비난하든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세상일이 놀랍지 않게 생각되면서 동시에 어느정도 무기력해진다는 사실이다.-188쪽

혹시 나는 취한 그날 은숙에게 편지를 썼을까. 그러고 나서 정말로 부치기라고 했고 그 편지가 가령 십오년 뒤 오늘 만나자는 따위의 내용이었다면, 이런 모든 애매함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말을 믿었을까. 우리는 한때나마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까. 편지는 간절하고도 유치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아마 끝문장은 자못 비장하여 먼 훗날 차마 기억난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너와 나, 우주의 고독한 코스모나츠. 우리의 귀환지점 리버 쎄느에서 쓴다. 잘 가라, 내 청춘.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이여.-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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