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들
김중혁 지음 / 창비 / 2010년 9월
장바구니담기


4, 2, 3, 9, 1, 4, 2, 4, 5, 7, 8, 6 같은 숫자를 하루종일 바라보고 있으면 거기에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것이 1과 10 사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의 상태는 7이었고, 체력은 4였고, 내 생활은 1이었고, 자신감은 0이었다. 기분은 1과 4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모든 상황을 숫자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기자 나는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 숫자란 내가 바꿀 수 있느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1이 2가 되기를 기다리며 멍청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9쪽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삶은 일직선이었다. 하나의 사건은 이전 사건의 결과이자 다음 사건의 원인이었다. 도미노가 다음 도미노를 넘어뜨리듯 모든 사건은 연결돼 있었다. (중략) 중요한 것은 내 가 지금 이곳에 서 있다는 것이고, 지금의 이 사건은 또다른 사건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14쪽

형이 죽은 이후 나는 더이상 미래를 믿지 않게 됐다. 아직 오지 않은 일들은 영원히 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다시 일어날 확률이 높다. 현재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과거만 필요하다. 미래는 사치다.-50쪽

고리오의 공동묘지에는 높다란 봉분이나 커다란 비석이 없었다. 대신 작은 돌에다 죽은 사람의 이름과 태어난 날짜와 죽은 날짜와 짧은 글귀를 적어놓았다. 땅을 보며 걷다보니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속으로 읽으며 공동묘지를 걸었다. 모두 죽은 사람의 이름 같지 않았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이름에는 차이가 없으니까.-72쪽

나는 착한 사람들이 죽으면 세상에 커다란 변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의 소멸 때문에 지구의 무게가 가벼워지거나, 그 사람들의 소멸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무거워지거나, 하다못해 그 사람들의 소멸 때문에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생길 줄 알았다. 며칠 동안은 슬픔이 자욱하게 세상을 뒤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죽음이란 결국 작은 점일 뿐이었다. 멀리서 보면 작은 점이었고, 더 멀리서 보면 더 작은 점이었고, 더욱 멀리서 보면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는 점일 뿐이었다.-80쪽

하나의 사건은 다음 사건의 원인이 된다. 나는 열 권의 노트를 펼쳐볼 때마다 거기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까 생각한다. 첫번째 노트는 분명히 두번째 노트의 원인이 된다. 하지만 가끔은 첫번째 노트의 일이 세번째 노트의 원인이 될 때도 있다. 내가 지금 겪는 어떤 사건은 내일 벌어질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삼일 후에 벌어진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은 여러 사건의 원인이 된다. 원인과 결과는 무한대로 뻗어나가서 끝내는 원인과 결과를 도저히 밝혀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원인과 결과는 무슨 의미일까.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121쪽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진실들이 아무도 모르게 묻혀버리는 걸까. 지금 채지훈씨에게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얘기했다고 쳐요. 그건 두 사람만의 비밀이잖아요.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채지훈씨는 그걸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죽고, 나도 내 비밀을 채지훈씨에게 말고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죽어요. 어딘가에 기록하지도 않고요. 그러면 두 사람이 죽는 순간 하나의 진실이 완전히 사라지는 거죠. 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다가 죽었다면 그건 비밀이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입밖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그건 둘만의 비밀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사라진 비밀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요. 무덤 하나에 그런 비밀이 하나쯤은 묻혀 있지 않을까요? 무덤 하나에 비밀 하나. 비밀 하나에 십자가 하나. 십자가가 둘이면 묻힌 비밀이 둘. 십자가가 셋이면 비밀이 셋."-138쪽

"정말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나 말해보세요."
"단순한 문장처럼 생겼어요."
"뭐예요? 그건 욕 아니에요?"
"아뇨, 짧지만 강렬한 문장 있잖아요. 한눈에 확 들어오고, 쉽게 잊혀지지 않는 문장요."
"내 얼굴이 표어나 경고문 같다는 거예요?"
"휴, 그런 게 아니고요."
"하하, 농담이에요. 어떨 때 보면 되게 순진하단 말야. 귀여워요. 그 얘기 좋은데요. 단순한 문장처럼 생긴 얼굴. 기억해둘게요."-159쪽

한참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먼 곳에 작은 불빛 몇개가 보였다. 그게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둠속에서는 거리감각도 무뎌진다. 그토록 멀리 떨어진 우주의 별들이 너무나 가깝고 선명하게 보이는 것도 모두 이 어둠 때문일 것이다. 어둠속의 불안한 마음이 불빛을 환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빛이 보였지만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나는 언젠가부터 가깝게 보이는 불빛은 믿지 않았다. 불빛들은 언제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멀리 있었으므로 나는 불빛으로 위안을 삼지 않았다. 더이상 어떤 일에도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212쪽

홍이안의 말이 맞다. 특별한 죽음은 없다. 특별한 죽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동경하고 두려워하지만 세상에 특별한 죽음은 없다.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고, 0이다. 어머니의 죽음도, 형의 죽음도, 홍혜정의 죽음도 나에게 조금 특별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이제 곧 나 역시 그 죽음들을 잊을 것이다. 죽음들은 평범해질 것이고, 쉽게 잊혀질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0이 되지 말고, 쉽게 소멸하지 말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240쪽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모르지?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인 인간이야. 얼마나 이기적인지 가르쳐줄까? 난 희망 같은 거 잘 몰라. 희망은 다른 사람이랑 공유하는 거니까. 그런 건 별로야. 내 몸속엔 욕망뿐이야. 하루하루의 욕망이 날 살게 해줬어. 저 물건을 갖고 싶다, 저 사람을 갖고 싶다, 모든 걸 갖고 싶다, 그런 욕망이 날 살게 했어."-243쪽

자료를 수집하다보면 기존의 모든 자료를 배신하는 자료가 나타나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하는가로 연구자의 태도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첫번째 유형의 연구자는 기존의 자료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자료를 버린다. 게으른 연구자다. 두번째 유형은 새로운 자료의 가능성을 믿고 기존의 자료를 버린다. 피곤한 스타일의 연구자다. 마지막 유형은 상반되는 자료를 그대로 놓아둔다. 자신의 논리가 어긋나고 부서지더라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하는 것이다.-343쪽

나에게 삶은 일직선이었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 하나의 사건은 이전 사건의 결과이자 다음 사건의 원인이었다. (중략) 도미노가 다음 도미노를 넘어뜨리듯 모든 사건은 연결돼 있었다. 처음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처음이란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마지막 도미노는 무엇일까. 마지막 도미노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사건이 될 것이다.-37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