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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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반복된다. 때로는 비극으로 때로는 희극으로. 그사이 바다가 넘실거리고 죽음이 춤을 춘다. 바다는 죽음을 사랑하고 죽음은 바다를 기억한다. 운명의 총애를 받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죽음 그 자체는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죽음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이 비극을 낳고 죽음에 대한 맹목적 경배가 희극을 잉태한다. 그러니 진실로 운명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가까워져야 한다. 바다에서 운명과 죽음은 서로 친척이다. 밤을 지새우며 포도주를 마시고 발을 구르며 함께 노래한다. 노래는 떠나온 고향에 대한 노래여도 괜찮고 떠나보낸 별에 대한 노래여도 상관없다. 고통에 절망하지 않고 쾌락에 집착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7쪽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이 뭔 줄 아쇼? 농담할 줄 안다는 겁니다. 농담을 모르는 인간들 때문에 세상이 복잡하고 살벌해졌지요. 신이야말로 농담의 천재고 이 세계는 신이 발명한 최고의 농담입죠. 신이 왜 인간을 빚은 줄 아십니까? 자신의 농담을 듣고 웃어 줄 관객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런데 소나 돼지가 웃는 건 모양새가 별로였죠.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빋으신 건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게 농담 없이 사는 거야말로 죄악 중의 죄악입니다. (에보켄의 말)-45쪽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적의는 살과 뼈를 가진 적 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졌다.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적의를 무너뜨린 것은 보이는 적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보이는 적을 죽여야 하는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연민이었다. 연민은 주인 된 자의 덕목이지 종 된 자의 덕목이 아니다.-112쪽

사랑받는 자는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지만 사랑하는 자는 사랑한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다. 그러니 감출 수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147쪽

사랑에 대한 열정은 소년을 사내로 만들고 열정에 대한 사랑은 사내를 소년으로 만든다.-196쪽

벌을 부르는 것은 꽃이 아니라 꽃의 향기고 향기를 맡는 것은 꽃이 아니라 벌이다. 천국과 지옥은 본시 둘이 아니라 하나이니 모두 네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네 마음이 천국이면 벌의 침조차 다정하고 네 마음이 지옥이면 꽃의 향기조차 역겹다. (수도승의 말)-244쪽

"나방이 불속에 몸을 던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줏빛 구름’이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방이 불속에 몸 던지는 것은 불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어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줏빛 구름’이 스스로 답했다.
"나비가 꽃의 품에 달려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인가?"
"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줏빛 구름’의 말은 수수께끼처럼 들렸다.-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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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구판절판


지구는 파란색과 하얀색이 뒤섞인 아름다운 구슬 같았어요. 아니면 한입에 쏙 들어오는 알사탕. 정말이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죠. 저는 소리없이 눈을 깜빡이며, 저 알사탕 안에 있을 점보다 작은 제 생의 흔적들을 찾아보았어요. 글쎄, 그건 졸렬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더군요. 알사탕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간사, 말이에요.-10쪽

드라이브가 길어질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꽤나 괜찮은 팀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사람과 좁은 공간에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상대방과 내가 한 팀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72쪽

언제든지 명령이 떨어지면 저는 이곳으로 완전히 정착할 준비를 시작해야 돼요. 그때가 되면 더이상 편지는 쓰지 못할 거예요. 지구와 달을 오가는 우체부는 없으니까요. 만약에 그런 날이 오더라도 엄마, 제가 있는 곳을 회색빛의 우울한 모래더미 어디쯤으로 떠올리진 말아주세요.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으로, 아, 그래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밤하늘의 저 먼 데를 쳐다보면 아름답고 둥근 행성 한구석에서 엄마의 딸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때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언제나 엄마가 말씀해주셨잖아요?-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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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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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선생님의 산문을 토막글로 종종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책으로 만나기는 처음이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엔 산문만큼 읽기 좋은 것이 없다. 더위를 물리치려고 한 꼭지씩 읽다 보니 아껴 가며 읽으려던 애초의 생각과는 다르게 일찍 책장을 덮게 되었다.

1부에 엮인 ‘내 생애의 밑줄’은 그간 여기저기에 실렸던 선생님의 글을 모은 것이다. ‘박완서’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모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년의 기억부터 지금의 삶까지를 조망하는 사설과 선생님의 눈으로 바라본 사회를 풀어낸 세설이 잘 어우러져 있다. 하나의 글 속에 사설과 세설이 서로 맞물려 있는데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으로 뻗어나가는, 그리고 큰 것을 보면서도 작은 것을 놓치지 않는 시선이 참으로 부러웠다. 바로 앞의 것밖에 보지 못하는 나에게 좋은 자극이 된다.
그리고 ‘박완서 소설’의 핵을 산문 속에서 읽어낼 수도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이 선생님께서 집약하신 개인사와 같은 것들. ‘대한민국’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 살아오신 만큼 선생님의 글은 마치 자식 손자에게 현대사 이야기를 들려 주려고 씌어진 것만 같다.

입학식 치르고 며칠 다니지도 않아 6·25가 났다. 집안 남자들의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 굶주림, 폭격과 기총소사, 혹한의 피난길, 그 와중에서도 좌냐 우냐 하는 이념에 따라 혈육과 가정이 분열하고, 이웃과 친척, 직장 동료끼리도 서로 헐뜯고 고발하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사람 나고 이념 난 게 아니라 이념이 인격이나 사람다움 위에 군림하던 전후의 공포 분위기 …… 베이비 붐 시대가 이 땅의 가임 여성에게 부과한 역사적 사명인 양 대책 없는 다산, 화목한 가정, 남들은 다 팔자 좋다고 알아주는 이러한 결혼생활이 문득문득 나를 힘들게 했다. (22쪽)

하지만 산문집이 이런 글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소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영화를 보러 간 이야기나 여행, 월드컵에 대한 내용도 있다. 지금 살고 계신 집 앞뜰의 마당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자연의 것들을 위하는 마음이 깊게 배어 있다. 마당의 잡초 얘기라든지 살구나무 이야기는 읽으면서 비실비실 웃음이 나기도 했다.

잔디밭에 등을 대고 누우면 부드럽고 편안하고 흙 속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꼼지락대는 것 같은 탄력이 느껴진다. 살아 있는 것들만이 낼 수 있는 이런 기척은 흙에서 오는 걸까, 씨앗들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니 둘 다일 것 같다. 흙과 씨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적이 많다.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 (15쪽)

이런 글을 읽으면 자연 앞에서 몸이 절로 낮아지는 기분을 따라 느낄 수 있다. 「흐르는 강가에서」라는 글에는 선생님의 ‘한강 드라이브 가이드’도 있으니 그대로 따라가 보면 좋을 듯하다.

2부는 ‘책들의 오솔길’이다. 신문에 실었던 글을 모았다. 선생님께선 서평도 독후감도 아닌, 책을 읽다 오솔길로 새버린 이야기라 하신다. 시, 소설, 산문은 물론 인문학, 예술까지 범주가 넓다. 더러는 읽은 책도 있고 대개는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던 것들이지만 선생님의 ‘새버린 이야기’를 읽으면서 괜히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책은 한 권 마련해 두고 쉬엄쉬엄 읽어 보고 싶다.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쉴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말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215쪽)

굉장히 공감했던 내용이다. 누구였던가, 시 쓰는 사람은 우리말을 잘 부려 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한 편의 시, 한 권의 시집을 읽으면 예쁜 우리말도 많이 나오고 잠이 확 깨는 표현들도 있다. 요즘 시는 어려워서 못 읽겠다는 말이 많다. 하지만 지금도 공감할 수 있는 시, 아름다운 서정시가 많이 쓰이고 있다. 무턱대고 아무 시나 두고 쉽다 어렵다 이야기하는 것보단 좋아하는 시를 한 편이라도 더 찾아 읽는 게 바람직하다고 느낀다. (나도 이렇게 몇 글자로만 다짐할 게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등이 뜨거운 계절이니 정신 번쩍 차리도록 해야겠다.)

3부 ‘그리움을 위하여’는 고 김수환 추기경님, 박경리 선생님, 박수근 화백께 보내는 추모의 글을 엮은 것이다. 떠나 보내는 것의 쉽지 않음을 글로써 달래는 느낌. 조용조용 읽게 된다.

여하튼 이번 산문집은 다채롭다. 책을 엮으려다 보니 여러 꼭지가 섞였겠지만 이렇게 또 하나의 ‘글 묶음’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무더운 날씨에 청량제가 되어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선생님의 다음 글을 기다리며 또 다른 산문집도 들춰 보고, 소설도 계속 읽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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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캣캣 - 젊은 작가 11인의 테마 소설집 현대문학 테마 소설집 2
태기수 외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4월
품절


"연애는 원래 피곤한 거야! 몸과 마음이 다 상대방에게로 기울어지는 게 연애니까! 온종일 기울어져 있는데, 까딱하면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데, 피곤하지 않고 배겨? 피곤한 게 연애야. 편해지는 그 순간 연인 관계는 끝이라고! 그러니까 제발 좀 피곤해줘. 피곤하지 않으려면 평생 벽 보고 혼자 살란 말이야!"
"아니 내 말은."
"내 말은 뭐! 그렇게 정 편하고 싶으면 저기 저 담벼락을 걸어가는 길고양이한테나 가서 우리 이제 좀 편하게 지내요, 하고 말하라고!"-191쪽

세상 어디에도, 함께 살던 고양이가 싫어졌다고 해서 고양이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여자는 없다. 그리고 함께 살던 여자가 등을 돌리고 누운 채로 "어디로 갈 거야?"라고 물었대서, "응, 일단 음식물 쓰레기통을 좀 찾아봐야겠지. 앞으론 내 입맛에 맞는 사료 따위, 쉽게 맛볼 수 없을 테니까" 하고 대꾸할 고양이도 없을 것이다.-192쪽

"돌고래는 인간보다 적어도 열여섯 배나 더 빨리, 자신의 메시지를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거야."
"물속에서도?"
"응, 물속에서도."
"그럼, 나중에 내가 SOS를 치면 적어도 다른 사람보다 열여섯 배는 빨리, 구하러 와야 돼. 응?"
"어, 지금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돌고래."
"……."
수다의 끝에서는, 돌고래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연애란 그런 것. 돌고래보다 적어도 열여섯 배는 더 느리게, 메시지를 상대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일지언정 결국 돌고래가 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199쪽

한 여자와 오랜 연애를 한 남자라면, 아마도 공감하리라고 보는데, 자신이 지녀왔던 원래의 ‘것’들이 아주 천천히, 흐무러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것’이라는 건 일종의 ‘무엇’과 같은 의미로, 가령, 내가 무언가 ‘이것만은’이라고 여기거나 행동해왔던 것들이 ‘이것쯤이야’ 정도는 아니더라고, 적어도 ‘아무려면 어때’ 싶은 정도까진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여자가 내게 "하여튼 많이 수다스러워졌어"라고 말을 해도 그것이 불쾌하다기보다는, ‘아무려면 어때’ 하고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 열패감이 아닌 안도감이 느껴지는 순간, 오랜 연인에게 길들여져 너무도 유연하고 온유해진 자신을 발견한다.-200쪽

그러나 이별하는 삶도, 이별하지 않는 삶도 불행하긴 매한가지일 것이다. 사랑하는 삶과 사랑하지 않는 삶이 똑같이 외로운 것처럼.-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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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티타
김서령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4월
품절


말하자면 매뉴얼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을 했다.
열네 살에 예상되는 시련과 성장통, 그것의 존재 이유와 대처 방안, 또 열다섯 살, 열여섯 살. 그런 식으로 말이다. 누구도 월반할 수 없는 통과의례임을 알려주는 매뉴얼.-38쪽

"덜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함께 사는 것이 아냐."-96쪽

내가 더 오래 살아서 내가 더 사랑을 해-128쪽

애정의 깊이를 폄하하는 것은 마음을 가볍게 하는 무척 손쉬운 방법이다.-184쪽

"나는 이런 사랑이라면 싫어. 왜 모두 피해자가 되어서 참고만 있는 거지? 참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고 누가 그런 거야? …… 나는 차라리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가해자가 될래."-212쪽

한 사람을 기쁘게 만들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은 어김없이 욕망을 접어야 했을 테고. 그게 온통 슬픔의 근원이라는 것을, 그 중독의 고달픔을 미처 몰랐겠지. 관계의 부작용은 늘 뒤늦게야 나타나는 법이었다.-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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