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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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선생님의 산문을 토막글로 종종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책으로 만나기는 처음이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엔 산문만큼 읽기 좋은 것이 없다. 더위를 물리치려고 한 꼭지씩 읽다 보니 아껴 가며 읽으려던 애초의 생각과는 다르게 일찍 책장을 덮게 되었다.

1부에 엮인 ‘내 생애의 밑줄’은 그간 여기저기에 실렸던 선생님의 글을 모은 것이다. ‘박완서’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모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년의 기억부터 지금의 삶까지를 조망하는 사설과 선생님의 눈으로 바라본 사회를 풀어낸 세설이 잘 어우러져 있다. 하나의 글 속에 사설과 세설이 서로 맞물려 있는데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으로 뻗어나가는, 그리고 큰 것을 보면서도 작은 것을 놓치지 않는 시선이 참으로 부러웠다. 바로 앞의 것밖에 보지 못하는 나에게 좋은 자극이 된다.
그리고 ‘박완서 소설’의 핵을 산문 속에서 읽어낼 수도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이 선생님께서 집약하신 개인사와 같은 것들. ‘대한민국’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 살아오신 만큼 선생님의 글은 마치 자식 손자에게 현대사 이야기를 들려 주려고 씌어진 것만 같다.

입학식 치르고 며칠 다니지도 않아 6·25가 났다. 집안 남자들의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 굶주림, 폭격과 기총소사, 혹한의 피난길, 그 와중에서도 좌냐 우냐 하는 이념에 따라 혈육과 가정이 분열하고, 이웃과 친척, 직장 동료끼리도 서로 헐뜯고 고발하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사람 나고 이념 난 게 아니라 이념이 인격이나 사람다움 위에 군림하던 전후의 공포 분위기 …… 베이비 붐 시대가 이 땅의 가임 여성에게 부과한 역사적 사명인 양 대책 없는 다산, 화목한 가정, 남들은 다 팔자 좋다고 알아주는 이러한 결혼생활이 문득문득 나를 힘들게 했다. (22쪽)

하지만 산문집이 이런 글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소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영화를 보러 간 이야기나 여행, 월드컵에 대한 내용도 있다. 지금 살고 계신 집 앞뜰의 마당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자연의 것들을 위하는 마음이 깊게 배어 있다. 마당의 잡초 얘기라든지 살구나무 이야기는 읽으면서 비실비실 웃음이 나기도 했다.

잔디밭에 등을 대고 누우면 부드럽고 편안하고 흙 속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꼼지락대는 것 같은 탄력이 느껴진다. 살아 있는 것들만이 낼 수 있는 이런 기척은 흙에서 오는 걸까, 씨앗들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니 둘 다일 것 같다. 흙과 씨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적이 많다.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 (15쪽)

이런 글을 읽으면 자연 앞에서 몸이 절로 낮아지는 기분을 따라 느낄 수 있다. 「흐르는 강가에서」라는 글에는 선생님의 ‘한강 드라이브 가이드’도 있으니 그대로 따라가 보면 좋을 듯하다.

2부는 ‘책들의 오솔길’이다. 신문에 실었던 글을 모았다. 선생님께선 서평도 독후감도 아닌, 책을 읽다 오솔길로 새버린 이야기라 하신다. 시, 소설, 산문은 물론 인문학, 예술까지 범주가 넓다. 더러는 읽은 책도 있고 대개는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던 것들이지만 선생님의 ‘새버린 이야기’를 읽으면서 괜히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책은 한 권 마련해 두고 쉬엄쉬엄 읽어 보고 싶다.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쉴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말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215쪽)

굉장히 공감했던 내용이다. 누구였던가, 시 쓰는 사람은 우리말을 잘 부려 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한 편의 시, 한 권의 시집을 읽으면 예쁜 우리말도 많이 나오고 잠이 확 깨는 표현들도 있다. 요즘 시는 어려워서 못 읽겠다는 말이 많다. 하지만 지금도 공감할 수 있는 시, 아름다운 서정시가 많이 쓰이고 있다. 무턱대고 아무 시나 두고 쉽다 어렵다 이야기하는 것보단 좋아하는 시를 한 편이라도 더 찾아 읽는 게 바람직하다고 느낀다. (나도 이렇게 몇 글자로만 다짐할 게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등이 뜨거운 계절이니 정신 번쩍 차리도록 해야겠다.)

3부 ‘그리움을 위하여’는 고 김수환 추기경님, 박경리 선생님, 박수근 화백께 보내는 추모의 글을 엮은 것이다. 떠나 보내는 것의 쉽지 않음을 글로써 달래는 느낌. 조용조용 읽게 된다.

여하튼 이번 산문집은 다채롭다. 책을 엮으려다 보니 여러 꼭지가 섞였겠지만 이렇게 또 하나의 ‘글 묶음’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무더운 날씨에 청량제가 되어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선생님의 다음 글을 기다리며 또 다른 산문집도 들춰 보고, 소설도 계속 읽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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