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어느 면에서 그것은 치명적으로 불발된 <도와달라는 외침>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프로이트는 썼다. <산다는 게임에서 가장 큰 판돈인 삶 자체가 걸려있지 못할 때엔 삶의 흥미는 줄어든다.> 실비아는 거기에 도박을 걸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승산이 자기 편에 있음이 이미 드러났으므로, 그러나 아마도 그녀의 암울한 마음이 이기든 지든 크게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그녀는 최후의 내기를 걸었다. 그녀의 계산은 빗나갔고 그녀는 졌다.

A. 알바레즈 『자살의 연구』 중



살아있을 때보다 죽고나서 더 유명해진 실비아 플라스. 말로만 듣던 그녀의 삶을 영화로 접하게 되었다. 시를 쓰던 그녀의 생애가 궁금했고 무엇보다 그녀가 왜 서른을 갓 넘은 나이에 자살을 했는지가 몹시 궁금하던 터였다. 영화는 그녀가 영국 유학 중 테드 휴즈를 만나 결혼을 하고 이혼 후 자살을 하기까지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결혼 전 그녀는 전도유망한 시인이었다. 영화에서는 생략되어있지만, '어릴 때부터 시를 쓰는 신동이었고 고교시절엔 상이란 상은 거의 휩쓸다시피 했으며 대학에서 역시 우수한 장학생에 이런저런 대학 단체의 회장이었고, 갖가지 상을 탔다.'(by A. 알바레즈) 그런 그녀가 결혼을 하고나서부터는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바야흐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시인의 배우자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로서의 역할로 바뀌게 되었다. 결국 그녀에게 돌아온 건 남편에 대한 피해의식, 의부증, 극심한 불안과 강박증 뿐이었다. 영화에는 주로 그런 그녀의 불안과 공포로 점철된 불행한 모습이 드러난다. 영화의 장점은 기네스 펠트로가 진짜 실비아인 듯한 내면 연기가 훌륭하다는 점이고 단점은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시인의 아내로서의 모습이 주로 나타나는 점이 아쉽다는 점이다.

다시 알바레즈의 인용구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영화만 본다면 남편의 외도와 사랑의 좌절이 주된 원인인 것처럼 보인다. 헌데, 정말 그것 뿐일까? 남편 휴즈가 떠난 후 그녀는 무서운 기세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유일한 호평을 보내오던 알바레즈를 찾아가 그녀가 쓴 시를 낭독하고 다시금 시인으로서의 역할로 돌아온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녀를 찾아온 테드에게 애인과 헤어지고 다시 데본으로 돌아가자는 그녀의 제안이 좌절되자 결국 얼마 안 가 그녀는 가스를 마시고 죽고 만다. 그녀의 새로운 책의 출판을 바로 목전에 두고 말이다.

하지만 역시 사랑의 좌절만이 그녀의 죽음을 초래한 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었고 죽음에 대해 시를 썼다. 알바레즈는 그런 그녀의 불안정한 모습의 원인을 두 가지로 제시했는데, 하나는 그녀가 아홉살이던 때에 죽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당한 느낌을 그녀를 떠난 테드를 통해 다시 한번 받은 데에 대한 상실감이 그것이고, 또 하나는 10년마다 자신이 부여한 죽음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점에 대해 자격을 얻음으로써 그것을 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녀는 끝내 죽었고 유고작으로 하여금 유명해졌다.

그녀의 삶에 비하면 영화는 매우 부분적이다. 자살로 향하는 그녀 삶의 후반부에, 그것도 그녀의 사랑의 좌절에만 거의 집중되다시피 했으니 많을 걸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궁금하다면 그녀가 직접 쓴 저서나,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의 프롤로그를 읽어보시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07-03-16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영화 보고 싶어졌어요. 디비디를 사니 꽤나 두툼한 실비아 플러스의 일기.가 따라왔더랬어요. 책부터 읽는게 낫겠지요?

서하 2007-03-16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디비디를 사면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주는군요. 분량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래도 책부터 꼭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영화는 극히 일부만 다루어지니까요.
 

 

 랭보에게는 적어도 세 개의 얼굴이 있다. 그리고 그 세 이미지를 나란히 간직하기란 매우 어렵다. 먼저 가출과 분노로 얼룩진, 매우 젊고 눈부신 시인의 얼굴 하나. 다음, 끊임없이 헤매는 고독한 방랑자의 얼굴이 그 뒤를 잇고, 그리고 아프리카 하라르(에티오피아 동부의 도시)의 대담한 중개상의 얼굴이 또 있다. 

 그 셋 중 어느 하나를 중시하는 것은 나머지 둘에 대해 오판하는 일이다. 아르튀르 랭보는 두가지 일로 물의를 빚는다. 먼저, 열일곱의 나이에 그렇게 빨리 그렇게 거세게 시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스물넷의 나이에 시의 세계에서 나와, 중개상의 삶, 무기 밀매자의 삶을 살러 떠나서는 더 이상 시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는 것.

프랑수아 봉 『불을 훔친 사람들』p. 59

Total Eclipse



 내가 아르튀르 랭보를 처음 접한 건 중학교 2학년 사춘기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 한 권의 책, 프랑수아 봉의 <불을 훔친 사람들>을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와 읽던 중 랭보를 발견한 것이다. 사실 난 시를 잘 모른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무렵 나는 랭보에 매료되었고 바람 구두를 신은 그처럼 종일 길거리를 쏘다녔다. 그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이해도 못한 채 읽고 되뇌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시는 난해했고 그래서 서서히 잊어갔다.

 며칠 전 랭보의 삶을 다룬 이 영화 <토탈 이클립스>를 보았다. 영화의 존재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볼 수가 없었다. 영화 내용는 책에서 본 것과 대략 비슷했다. 다만 영화에는 랭보와 베를렌느와의 관계가 주 내용을 이루고 있을 뿐 랭보의 전체적인 삶을 비중있게 다룬 것 같지는 않다. 그점이 몹시 아쉽지만 그래도 역시 한때 내가 열렬히 추종했던 랭보의 삶의 단면을 볼 수 있어 영화를 보는 내내 설레었다.

 영화 장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런던에서 랭보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떠나는 베를렌느 앞에서 랭보가 절규를 하는 모습이다. 가지말라고 모두 어리석은 농담이었다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근데 정말, 랭보는 베를렌느를 사랑했을까.

 영화는 확실치 않다. 랭보와 베를렌느, 두 인물의 전기를 다루었다고는 하나 역시 영화일 뿐이다. 확실한 건 그들이 남긴 시들일 것이다. 영화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지금 나는 열다섯 무렵 그랬듯이 다시 랭보의 시를 찾아볼 것이다. 과연 지금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2006. 7. 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 외롭구나 - 김형태의 청춘 카운슬링
김형태 지음 / 예담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을 한 번 진지하게 바라보자. 언제부턴가 이 사회는 거대한 공장이 되어 끊임없이 복제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핵심은 학교다. 학생들의 개성을 죽이고 똑같은 지식을 주입하고 대학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시키기 위해 십대의 감수성을 숫자 몇 개가 적힌 성적표와 맞바꾸고 있다. 그리하여 사회에 나간 이들의 대부분은 어느새 이태백이라는 무리에 합류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뒤늦게서야 자신을 그렇게 만든 세상을 원망한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과연 세상을 원망하고 한탄하며 술을 들이마신들 세상이 조금이라도 끄떡하는가.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운 세상은 무서우리만치 조용하다. 그럼 어쩌라고?

해답은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 우리들을 구원해줄 사람은 정부에도 없고 기업에도 없고 자선단체에도 없다. 부모님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 일어서서 자신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피나는 노력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핑계대기에 바쁘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외모도 별로고 불공평한 세상이 그저 못마땅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서야 깨달았다.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노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노력하기 싫은 게으르기 짝이 없는 우리가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데 바빴다는 것을.

이런 우리들을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 여기 김형태가 나섰다. 일찍부터 소비에 눈을 뜨고 돈이 최고라는 영악한 생각에 빠져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무언지조차 알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그는 따끔하고 냉정하게 말한다.

- 20대들은 정확히 하고 싶은 일이 없고, 확실하게 할 줄 아는 것이 없고, 겁은 많아서 실패는 무진장 두려워하고, 무엇이든 보상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으면 절대 시작도 하지 않으며, 눈은 높아서 자기가 하는 일도 주변의 현실도 모두 못마땅하고, 시시껄렁하고, 옛날 사람들처럼 고생고생하면서 자수성가할 자신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 하면 편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어 돈을 벌 수 있을까만 궁리합니다. 가장 혈기왕성해야 할 20대가 그런 식이니까 사회가 무기력해지고 경제가 침체되어 불경기가 오는 것입니다. (p.33)

그의 말은 한마디한마디가 매우 쓰다. 이 시대의 나약하고 소극적인 청춘들은 그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 정도로 신랄하게 충고를 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그리고 구구절절이 다 맞는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도 무지했다. 나약하기 그지 없고 타성에 젖어 스스로 뭔가를 할 줄도 모르면서 쓸데없이 눈만 높았다. 그의 말대로 입시 전사로만 길러진 우리들은 이 시대의 진짜 왕따였다.

하지만 20대들이여, 이제 우리들이 길러지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우리 스스로 선택을 하고 그 일에 책임을 져야 할 시기다. 방안에서 공상만 하고 자기 한탄을 하고 종일 컴퓨터만 바라보거나 술과 담배에 미쳐 남아도는 에너지를 헛되이 낭비할 때가 아니다. 지난 세월을 어떻게 보내왔든 중요한 건 현재요, 미래다. 여기 김형태라고 하는 어른이 하고자 하는 말이 이것이다. 꿈을 위해 노력하고 노력을 위해 또 노력하라. 더 이상 꿈은 현실도피용이 아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만약 20대의 청춘들이 이 책을 읽고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일거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아주 잘 살아가고 있거나 개념이 없거나. 그렇다고 이 책을 읽고 모두가 변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틀려먹고 편협하고 헛점투성이였는가를.

오늘도 방 한 구석에서 절망감에 빠져 있는 분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알 수 없는 허망함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곤 하던 분들, 경험을 통해 진리를 얻는 데 겁이 나는 분들, 미친 듯이 살고 싶은데 뭐에 미쳐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분들, 오늘도 잠자리에 들며 아침이 오지 않길 은근히 바라는 분들, 방황하는 모든 청춘들에게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의 상징이다. 모든 인간은 그 속을 헤매는 "불완전한 사서들"이다. 그들은 신이 된 전설의 사서를 좇아 육각형의 방을 순례하며 일생을 보낸다. 이 책의 단서를 통해 저 책으로, 그 책에서 단서를 찾아 또 다른 책으로, 그렇게 무한히 옮겨다니며 언젠가는 전설 속의 사서가 봤다는 '책 중의 책'에 도달하리라는 믿음을 실천한다.

진중권 , 『미학 오디세이 3권』

 바로 이 구절이 나를 보르헤스의 세계로 이끌었다. 무한히 이어지는 육각형의 방. 세상의 모든 책들이 있고 그 모든 책들을 아우르는 '책 중의 책'을 읽어 신이 된 사서의 얘기가 전설처럼 들려오는 곳. 그곳이 바로 그 유명한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다. 모든 책들의 원전이 존재한다는 믿음보다 바벨의 도서관을 만들어낸 이 눈먼 작가의 이력이 한층 더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곧 부딪힌 난해함의 벽. 어마어마한 주석의 양에 압도되어 나는 할말을 잃었다. 읽고 중단하고 다시 읽고 중단하기를 수차례 반복한 끝에 겨우 이 책을 읽어냈다. 허나, 활자만 읽어내면 무엇하나. 여전히 머리에선 환상과 실재의 혼돈스러운 투쟁의 자취들과 뭐라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정리를 해보고자 모니터 앞에 앉은 이 가련한 두뇌의 주인은 저 눈먼 할아버지에게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분명한 픽션(fiction)들의 모음인 이 책 '픽션들'은 그러나 그 제목이 주는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사실처럼 보이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자칫 잘못하면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또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종잡을 수 없는 혼란의 위험을 안고 있다. 실존 인물 같은 허구 인물의 등장은 애교에 가깝다. 실존 인물의 가짜 저작물, 가짜 행로가 마치 실제인양 원작자의 각주까지 철저히 달린 대목에 가서는 그 치밀한 유희에 혀를 내두를 지경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보르헤스가 자주 쓰는 '가짜 사실주의'기법이란다. 이 기법에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드디어 이 책을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 요령이 생겨난다.

 가짜 사실주의와 더불어 읽어낼 수 있는 보르헤스의 또 다른 소설 장치는 탐정소설, 환상소설 기법이다. 탐정소설의 대표적인 예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으로 특히 제목처럼 이야기 가지가 끝없이 이어지는 구조가 인상적이다. 환상적 구조는 가짜 사실주의와 더불어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특히 「원형의 폐허들」은 굳이 역자의 도움이 없이도 쉽게 장자의 호접지몽을 떠올릴 수 있다. 나는 보르헤스의 이 소설집을 읽으며 에드거 앨런 포가 떠올랐다. 물론 보르헤스의 소설엔 뒤팽 같은 탐정이나 괴기스러운 검은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죽음과 나침반」에서 스스로를 뒤팽과 같은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믿는 인물이 등장하기는 한다. 여하튼 사실성과 비사실성이 이야기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과 작품 전반에 걸친 환상적 분위기가 이 책을 읽은 나의 머리 속에 포를 자연스레 떠오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도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누구 말대로 경이로운 현관에 들어선듯 낯설지만 놀라운 소설의 세계를 체험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아마 여느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는 놀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소설도 있다니! 물론 쉬운 책은 아니다. 허나 조금만 인내를 갖고 쭉 읽어나가보면 보르헤스가 왜 그리 많이도 인용이 되는지 왜 그를 주저없이 현대의 고전 목록 첫번째 칸에 기입하려 하는지 알 것이다. 이제 막 보르헤스에 접근하기 시작한 나로서는 불완전한 사서가 되어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과 육각형의 미로 속을 순례하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낙천주의자 캉디드
볼테르 지음, 최복현 옮김 / 아테네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여기 캉디드라고 하는 청년이 있다. 그는 스승 팡글로스로부터 낙천주의를 배우며 자랐다. 낙천주의란 라이프니츠의 철학으로 페시미즘, 즉 비관주의에 반하는 사상이다. 모든 것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알겠지만 이 낙천주의와 비관주의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며 내용이 전개된다. 캉디드의 스승 팡글로스가 낙천주의의 대표라면 마르탱이라고 하는 철학자가 비관주의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캉디드에게는 사랑스런 여인 퀴네공드가 있다. 그녀를 사랑해서 성에서 쫓겨나고 그녀를 얻기 위해 여행을 한다. 여행을 하면서 보게된 세상은 캉디드를 몹시나 당황스럽게 한다. 세상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는 팡글로스의 가르침과는 달리 얼핏 보기에 세상은 악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재해, 전쟁, 기아, 탐욕, 부패한 성직자, 광신도, 그외 인간의 온갖 어리석은 만행들이 순진한 청년 캉디드를 괴롭히고 끝없이 배신한다. 볼테르는 이런 것들을 신랄한 풍자와 과장된 모습으로 보여준다. 그러한 악과 고통의 세계를 보게 된 캉디드는 이렇게 말한다.

"오, 팡글로스! 당신도 이 비참한 경우를 생각 못하셨습니다. 자, 이제 결국 나는 당신의 낙천주의를 버릴 수밖에 없군요."

"낙천주의가 뭐지요?"

카캉보의 물음에 캉디드가 대답했습니다.

"아! 인간이 불행할 때도 모든 것이 잘 이루어져 있다고 우기는 일종의 광기라네."

하지만 그에게는 최선의 목표인 퀴네공드가 있기에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며 낙천주의를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스승 팡글로스를 대변하여 마르탱과 계속해서 논쟁한다. 그들이 거쳐간 유일한 유토피아인 엘도라도를 제외한 모든 세계는 마르탱의 비관주의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나 역시 마르탱의 손을 들어주며 자, 이만하면 포기하시지, 라고 비웃음 반 안타까운 심정 반으로 캉디드를 읽어내려갔으나 이 우직한 청년은 도무지 고집을 꺾을 줄 모른다.

그러나 저자 볼테르는 그 어느 것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다. 캉디드는 모든 여정 끝에 퀴네공드가 그릇닦이로 있는 콘스탄티노플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재산을 또 사기를 당해 잃고 작은 농원을 경작하며 살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팡글로스와 캉디드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모든 일들은 있을 수 있는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서는 서로 연관되어있다는 것일세. 자네가 퀴네공드와의 사랑으로 인해 그 아름다운 성에서 발로 엉덩이를 차여 내쫓기지 않았더라면, 종교재판에 처해지지 않았더라면, 걸어서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남작을 칼로 찌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엘도라도에서 가져온 양들을 모두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이곳에서 설탕에 절인 레몬과 피스타치오 열매를 먹지 못했을 테니까 말일세."

그러자 캉디드는 대답했습니다.

"정말 멋진 명언이로군요!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농원을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결국 그가 말하려는 것은 세상이 이러이러하게 이루어져 있다, 는 게 아니라 노동을 통해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는 계몽사상인 것이다. 이런 사상은 비단 18세기 유럽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점들을 재발견하고 깨닫고자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이 책을 덮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고전을 좋아한다면, 그리고 풍자와 꼬집기를 좋아하는 이라면 아마 이 책이 맘에 들 것이라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