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주의자 캉디드
볼테르 지음, 최복현 옮김 / 아테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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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기 캉디드라고 하는 청년이 있다. 그는 스승 팡글로스로부터 낙천주의를 배우며 자랐다. 낙천주의란 라이프니츠의 철학으로 페시미즘, 즉 비관주의에 반하는 사상이다. 모든 것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알겠지만 이 낙천주의와 비관주의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며 내용이 전개된다. 캉디드의 스승 팡글로스가 낙천주의의 대표라면 마르탱이라고 하는 철학자가 비관주의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캉디드에게는 사랑스런 여인 퀴네공드가 있다. 그녀를 사랑해서 성에서 쫓겨나고 그녀를 얻기 위해 여행을 한다. 여행을 하면서 보게된 세상은 캉디드를 몹시나 당황스럽게 한다. 세상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는 팡글로스의 가르침과는 달리 얼핏 보기에 세상은 악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재해, 전쟁, 기아, 탐욕, 부패한 성직자, 광신도, 그외 인간의 온갖 어리석은 만행들이 순진한 청년 캉디드를 괴롭히고 끝없이 배신한다. 볼테르는 이런 것들을 신랄한 풍자와 과장된 모습으로 보여준다. 그러한 악과 고통의 세계를 보게 된 캉디드는 이렇게 말한다.

"오, 팡글로스! 당신도 이 비참한 경우를 생각 못하셨습니다. 자, 이제 결국 나는 당신의 낙천주의를 버릴 수밖에 없군요."

"낙천주의가 뭐지요?"

카캉보의 물음에 캉디드가 대답했습니다.

"아! 인간이 불행할 때도 모든 것이 잘 이루어져 있다고 우기는 일종의 광기라네."

하지만 그에게는 최선의 목표인 퀴네공드가 있기에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며 낙천주의를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스승 팡글로스를 대변하여 마르탱과 계속해서 논쟁한다. 그들이 거쳐간 유일한 유토피아인 엘도라도를 제외한 모든 세계는 마르탱의 비관주의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나 역시 마르탱의 손을 들어주며 자, 이만하면 포기하시지, 라고 비웃음 반 안타까운 심정 반으로 캉디드를 읽어내려갔으나 이 우직한 청년은 도무지 고집을 꺾을 줄 모른다.

그러나 저자 볼테르는 그 어느 것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다. 캉디드는 모든 여정 끝에 퀴네공드가 그릇닦이로 있는 콘스탄티노플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재산을 또 사기를 당해 잃고 작은 농원을 경작하며 살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팡글로스와 캉디드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모든 일들은 있을 수 있는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서는 서로 연관되어있다는 것일세. 자네가 퀴네공드와의 사랑으로 인해 그 아름다운 성에서 발로 엉덩이를 차여 내쫓기지 않았더라면, 종교재판에 처해지지 않았더라면, 걸어서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남작을 칼로 찌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엘도라도에서 가져온 양들을 모두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이곳에서 설탕에 절인 레몬과 피스타치오 열매를 먹지 못했을 테니까 말일세."

그러자 캉디드는 대답했습니다.

"정말 멋진 명언이로군요!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농원을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결국 그가 말하려는 것은 세상이 이러이러하게 이루어져 있다, 는 게 아니라 노동을 통해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는 계몽사상인 것이다. 이런 사상은 비단 18세기 유럽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점들을 재발견하고 깨닫고자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이 책을 덮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고전을 좋아한다면, 그리고 풍자와 꼬집기를 좋아하는 이라면 아마 이 책이 맘에 들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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