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의 <조서>, 그리고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조서>는 작년 여름 무렵 구입한 것 같은데 쉽게 읽혀지는 책이 아니어서 앞부분만 몇 번 들춰보다 그만뒀었다. 며칠 전 큰 맘 먹고 책을 잡아 읽기 시작했고 드디어 끝을 보았다. 거칠고 낯선 초행길을 거친 후엔 비교적 수월했다.
여름이다. 지금 창 밖 세상도 그렇고 이 책의 계절적 배경도 그러하거니와 마침 우연찮게 함께 읽었던 포크너의 책도 여름이 배경이었다. 두 권 모두 한여름 대낮 마냥 지루하고 답답한 공기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두 권의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이제 막 여름이 지나간 기분이다. 대지를 굽고 바다를 데울 정도로 강렬한, 뫼르소를 살인자로 만들었던 그 태양이 온 정신을 바짝 말려버려 갈증이 나게 했다. 비라도 내렸으면 좋으련만. 정신적 갈증은 때로 빗방울에 의해 해소되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말이다. 그러나 여름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절대적 사실이 나를 절망케 했다. 오 마이 갓. 그럼 비라도 내려주려무나.
나를 갈증나게 한 첫번째 책, 르 클레지오의 <조서>는 아담 폴로라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했는지 탈영을 했는지 모를 한 남자가 후에 정신병원에 감금되기 전까지의 행보를 조서 형식으로 묶은 한 편의 소설이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주인공의 정신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이 책에서 쓰인 기법 또한 만만치 않다. 단어 대신 자리한 공백과 통채로 누락된 단락, 죽죽 그어진 선에 눌린 문장, 난데없는 신문의 삽입은 역설적이게도 난감함과 쾌감을 동시에 주었다. 그 쾌감은 필시 익숙함을 깨뜨리는 데서 오는 충격의 오묘함이리라.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의 행동을 보자. 흰 쥐를 잔인하게 죽이고 개를 따라다니고 여자 친구에게 빌붙고 길거리에서 연설을 하는 둥, 한 마디로 미치광이가 따로 없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의 눈에 투영된 세상, 우리가 사는 소위 말해 '정상적인' 사람들의 세상을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작가의 재주다. 특히 아담이 개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그 점이 두드러진다.
아담 폴로는 그의 이름에서 연상되는 의미, 곧 신화적이고 원초적인 존재로 회귀하려 한다. 언덕 위의 버려진 집에 무단 거주하고 인간이 부여한 세상의 의미를 부정 혹은 거부하는 그는 그러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뫼르소가 그랬듯이. 그래서 이 작품은 카뮈의 <이방인>과 비교되기도 한다.
단순한 줄거리에 비해 할 이야기가 많은 책이다. 초반의 지루함과는 달리 읽고 나면 의외로 재밌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이고, 다음 번엔 더 많은 걸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그래, 일단은 이 정도로 해두자.
자, 이제 두
번째 책인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살펴볼 차례다. 어쩌다 둘의 감상을 함께 적게 되었는데, 뭐 의도한 바는 아니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이 책을 대했던 첫 느낌 역시 위의 책과 마찬가지의 난감함이었다. 열 다섯 인물의 서술, 게다가 의식의 흐름에 따른 거라 술술 읽히는 그런 서사적인 책은 아니다. 그리고 내용은 더 갑갑하다.
어느 시골의 애디 번드런이라는 한 여자가 죽는다. 고향에 자신을 묻어달라던 그녀의 유언에 따라 가족들(남편 앤스, 아이들 캐시, 달, 주얼, 듀이 델, 바더만)은 관을 끌고 40마일 정도의 여정을 떠난다. 시체가 썩어 악취를 풍기는 데도 약속을 꼭 지켜야만 한다며 길을 가는 그들의 여정은 어찌보면 매우 부조리해보인다.
인물들의 행동은 어떠한가.
죽어가는 어머니가 누워있는 창가 아래에서 캐시가 관을 만든다. 떠나는 과정에서 홍수를 만나 부러진 캐시의 다리에 그들은 시멘트를 바른다. 달은 방화를 저지르고 앤스는 주얼이 소중하게 여기는 말을 팔아버리고 딸 듀이 델이 낙태를 하고자 몰래 간직한 돈을 빼앗는다. 바더만은 물고기가 자신의 엄마라 하며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 아내를 매장한 직후 앤스는 의치를 해넣고 아이들에게 새엄마를 소개한다. 이런 내용이다. 나 원 참.
이런 갑갑한 내용에다 익숙치 않은 문체인데도 불구, 나처럼 포기가 쉬운 독자가 한 번에 읽어내려갈 정도로 이 작품은 꽤나 매력있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특별히 흥미롭지도 멋있지도 교훈적이지도(?) 않은 이 소설이 읽고 난 후에 꽤 재밌었다는 느낌 혹은 착각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의 매력은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소재,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각각의 인물들의 독백에서 드러나는 비밀에 있다고 본다. 애디의 죽음 외에도 가족들은 저마다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정이 끝난 뒤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마도 그들은 서로의 비밀에 대해 여전히 모를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 뒤에 오는 일상.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는 나와 너의 삶. 어떠한가.
인물에 따라, 그리고 인물의 정서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문체에서 오는 매력과 언어와 언어 이면의 진실이 주는 의미를 생각케 해주는 이 소설은 오로지 언어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예술작품이다. 그리하여 실험 소설이 주는 난해함과 달리 이상스럽게도 재밌는 이 책 역시 다시 들춰보고 싶은 또 하나의 책이 되었다.
우연히 함께 읽게 된, 모두 여름을 배경으로 한 이 두 작품은 읽는 동안 그 특유의 분위기와 온도로 내 정신을 뜨겁게 달구었지만 익숙함 혹은 비슷비슷한 소설이 주는 매너리즘을 해소케 해준 꽤 보람있는 독서였다. 다만, 여름의 고온을 겨우 견디어내었더니 다시 여름이 왔다는 절망을 느끼게 해주긴 했지만 말이다. 휴,
정말이지, 올 여름을 어떻게 보낸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