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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 bar

 
 여름 내내 나하고 쥐는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25미터 풀을 가득 채울 정도의 맥주를 퍼마셨고, 제이스 바의 바닥에 5센티미터는 쌓일 만큼의 땅콩 껍질을 버렸다. 그때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따분한 여름이었다.

 제이스 바의 카운터에는 담뱃진 때문에 변색된 판화가 한 장 걸려 있었는데, 나는 따분해서 견딜 수 없을 때면 몇 시간이고 질리지 않고 그 판화를 계속 바라보았다. 마치 로르샤흐 테스트에라도 사용될 것 같은 그 도안은, 내가 보기엔 서로 마주 보고 앉은 두 마리의 녹색 원숭이가 바람이 빠지기 시작한 두 개의 테니스공을 서로에게 던지고 받는 것 같았다.

 내가 바텐더 제이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는 한참 동안 뚫어지게 판화를 바라보더니 듣고 보니까 그런 것도 같다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내가 물어보았다.

  “왼쪽 원숭이가 자네고, 오른쪽이 나겠지. 내가 맥주병을 던지면, 자네가 술값을 던져주고." 

 나는 감탄하며 맥주를 마셨다.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무라카미 하루키 

 ***

 어떻게라도 무엇에든 빠져 있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여름이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냉장고를 열어 캔커피를 꺼내들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바라본다. 아직 손대지 않은 책이 많지만 가끔은 예전에 읽던 책을 다시 들춰보고 싶어진다. 오래 전에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으면 그 음악을 들었던 시절의 추억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처럼 책 또한 그러하다. 책 모서리에 쌓인 먼지는 그동안의 시간의 침전물이다. 묵은 시간을 조심스레 털어내고 안락의자에 앉아 아무 페이지나 펼쳐 놓고 그것을 읽고 그것을 처음 읽던 때와 지금의 느낌을 비교한다. 이것이 내 나름의 지겨운 여름을 견디는 하나의 방법이다.

 어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의 처녀작인 얇은 이 책을 꺼냈다. 손이 가는대로 아무 페이지나 들춰보다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젊은 나이에 죽은 여자는 죽었기에, 영원히 젊듯, 책 속의 ‘나’는 여전히 스물한 살 그대로다. 나는 그동안 두 살을 더 먹었는데도. 스물한 살의 ‘나’, 그리고 쥐와 제이는 여전히 그곳에서 맥주를 건네고 마시며 텅 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말하자면, 제이스 바는 뭔가가 공허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다. 제 아무리 침몰 직전의 여객선 같다고 해도 책 속의 그들은 줄곧 맥주만 마셔댈 뿐이다. 마치 그들의 시간은 맥주에 섞여 아무 의미 없이 흡수되어버리는 느낌이랄까. 그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따분한 여름이고, 청춘일 테니까.

 김빠진 맥주 마냥 밍밍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로서는 내게도 그런 바가 하나 있었으면 싶다. 살갗을 찌르는 여름한낮의 햇볕을 피해 달려가 술값을 던지고 맥주병을 받으며 시시한 농담이나 나누며 얼른 이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뭐,  별 수 있겠는가.

(2007.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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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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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소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문학 개론서식으로 말한다면, 일정한 분량의 언어를 갖춘 개연성 있는 허구? 아니면, 있을 법한 한 편의 이야기? 그런데 말이다. 개연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더더군다나 전혀 있을 법하지도 않은 이야기가 뻔뻔하게도 소설이라고 막 나온다면 어떨까. 

 그래, 제목에 버젓이 픽션을 붙이고 등장한 이 <자정의 픽션>은 그런 소설이다. 읽다 보면, 어 이거 아주 막나가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만큼 이 책은 뻔뻔하다. 그리고 아주 웃기다. 헉, 소리를 내다, 낄낄거리다, 얘 왜 이래, 하다 소설은 끝난다. 이제까지 소설을 읽으며 뭔가 하나씩 건지려고 했던 독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건질 게 없으니까. 아니, 일단은 없어 보이니까.

 두 교수가 서로를 겁주고 무시하고 얄밉게 웃다가 정신없이 들이대며 말허리를 자르고 몰아세우다 딴청부리며 막나가든가-논쟁의 기술에서 정말 그런다- 한 망상적인 작가가 제멋대로 미래 세계를 창조한다든가, 망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길을 통과해 저 세상으로 간다든가, 사소한 장난으로 파멸해간 아이라든가, 우리가 배웠던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음란소설로 규정해버린다든가, 자신의 성기를 자른다든가, 한 방에서 죄와 진실이 창조된다든가, 백수 청년의 넘쳐나는 머릿기름을 사수하고자 미국과 쟁탈전을 벌인다든가 하는 것들이 이 책에 나온다.

 그래도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에 상통하는 한 가지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논쟁에서 이기고 꼴 보기 싫은 인간을 상상을 통해 징벌하고 엄마의 품을 차지하고 유전을 사수해 강자가 되고 싶은 욕망 말이다. 그리고 그 욕망으로 인해 파멸한다. 아주 사소한 욕망도 마찬가지로. -「두유전쟁」의 성범수는 단지 배가 몹시 고팠을 뿐이었다.

 작가는 욕망을 재료로 제멋대로 지은 듯한 이 소설집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자정'이란 가라타니 고진이 그리워하는 '요란했던 근대' 이후의 시간이다. 동시에 서사문학이라는 대가족 안에서 소설이 태동하던,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홀로 자문해보던 근대 이전의 저 먼 '새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정'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얕은 꿈을 꾸거나 혹은 잠을 이루지 못해 고단하게 중얼거리는 시간이다.

 내가 이 소설집을 읽고 그의 후기를 읽고난 박형서에 대한 감상을 말하자면 그는 이렇다. 아주 뻔뻔하거나, 혹은 진지하거나, 아니면 둘 다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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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인가 나는 문득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괴로운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늘 누군가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을 것이고 내가 알던 거리가 바뀔 것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문득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면서 자꾸만 내 안에 간직한 불빛들을 하나둘 꺼내보는 일이 잦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사탕을 넣어둔 유리항아리 뚜껑을 자꾸만 열어대는 아이처럼 나는 빤히 보이는 그 불빛들이 그리워 자꾸만 과거 속으로 내달았다. 추억 속에서 조금씩 밝혀지는 그 불빛들의 중심에는 뉴욕제과점이 늘 존재한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어른이 되는 동안, 뉴욕제과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뉴욕제과점이 내게 만들어준 추억으로 나는 살아가는 셈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뭔가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다음에 나는 깨달았다.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 괴로운 일만 남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없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위안이 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삶에서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저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내 안에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게 됐다.
 
   

 
김연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 뉴욕제과점 90페이지

 
  기억이란 선택된 과거라는 말처럼, 무의식중에 선택되어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 마음 속에 작은 풍경을 드리운다. 특별한 추억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그래서 먼훗날을 위해 추억을 만들고자 애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추억이란 게 꼭 튀는 뭔가가 있어야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문득 떠올리며 눈앞의 현실을 잠깐 등지고 사색에 잠기게 만드는 일들이, 혹은 사람들이, 사물들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자신만의 풍경화를 그려나가고 있고,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때때로 나는 유년 시절에 뛰놀던 거리를 떠올려보곤 한다.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떠나왔던 그 거리가 짝사랑하던 남자애의 소식만큼이나 궁금해지는 것이다. 첫 서리의 경험을 맛보았던 석류나무가 있던 집, 불장난을 하던 집앞 공터, 우리의 장난에 언제나 무표정했던 짱깨 아저씨를 잔뜩 약올리고 숨었던 담벼락, 소꿉장난을 하던 친구네 집 옥상, 내 여드름을 짜주시던 늘 웃는 얼굴의 아저씨가 있던 약국, 집인지 가게인지 미로인지 알 수 없었던 친구 아버지네 철물점, 방과후면 단짝 친구와 달려가 책을 읽던 책대여점, 어린 가슴이 설렐 정도로 예쁘장한 오빠가 카운터를 보던 수퍼마켓 등등. 그곳을 떠나온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문득 궁금해진다. 10년 전 그 거리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어느새 기억 한 켠의 풍경화를 장식하게된 그곳들이 그대로 있을지. 아마도 이미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한 그 거리 풍경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고 당연히 개발과 경쟁논리에 따라 거의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단지 이것들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내가 알던 뭔가가 점점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추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김연수의 뉴욕제과점을 읽기 전엔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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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의 <조서>, 그리고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조서>는 작년 여름 무렵 구입한 것 같은데 쉽게 읽혀지는 책이 아니어서 앞부분만 몇 번 들춰보다 그만뒀었다. 며칠 전 큰 맘 먹고 책을 잡아 읽기 시작했고 드디어 끝을 보았다. 거칠고 낯선 초행길을 거친 후엔 비교적 수월했다.

  여름이다. 지금 창 밖 세상도 그렇고 이 책의 계절적 배경도 그러하거니와 마침 우연찮게 함께 읽었던 포크너의 책도 여름이 배경이었다. 두 권 모두 한여름 대낮 마냥 지루하고 답답한 공기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두 권의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이제 막 여름이 지나간 기분이다. 대지를 굽고 바다를 데울 정도로 강렬한, 뫼르소를 살인자로 만들었던 그 태양이 온 정신을 바짝 말려버려 갈증이 나게 했다. 비라도 내렸으면 좋으련만. 정신적 갈증은 때로 빗방울에 의해 해소되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말이다. 그러나 여름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절대적 사실이 나를 절망케 했다. 오 마이 갓. 그럼 비라도 내려주려무나.

  나를 갈증나게 한 첫번째 책, 르 클레지오의 <조서>는 아담 폴로라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했는지 탈영을 했는지 모를 한 남자가 후에 정신병원에 감금되기 전까지의 행보를 조서 형식으로 묶은 한 편의 소설이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주인공의 정신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이 책에서 쓰인 기법 또한 만만치 않다. 단어 대신 자리한 공백과 통채로 누락된 단락, 죽죽 그어진 선에 눌린 문장, 난데없는 신문의 삽입은 역설적이게도 난감함과 쾌감을 동시에 주었다. 그 쾌감은 필시 익숙함을 깨뜨리는 데서 오는 충격의 오묘함이리라.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의 행동을 보자. 흰 쥐를 잔인하게 죽이고 개를 따라다니고 여자 친구에게 빌붙고 길거리에서 연설을 하는 둥, 한 마디로 미치광이가 따로 없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의 눈에 투영된 세상, 우리가 사는 소위 말해 '정상적인' 사람들의 세상을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작가의 재주다. 특히 아담이 개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그 점이 두드러진다.

  아담 폴로는 그의 이름에서 연상되는 의미, 곧 신화적이고 원초적인 존재로 회귀하려 한다. 언덕 위의 버려진 집에 무단 거주하고 인간이 부여한 세상의 의미를 부정 혹은 거부하는 그는 그러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뫼르소가 그랬듯이. 그래서 이 작품은 카뮈의 <이방인>과 비교되기도 한다.

  단순한 줄거리에 비해 할 이야기가 많은 책이다. 초반의 지루함과는 달리 읽고 나면 의외로 재밌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이고, 다음 번엔 더 많은 걸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그래, 일단은 이 정도로 해두자.

 

  자, 이제 두 번째 책인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살펴볼 차례다. 어쩌다 둘의 감상을 함께 적게 되었는데, 뭐 의도한 바는 아니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이 책을 대했던 첫 느낌 역시 위의 책과 마찬가지의 난감함이었다. 열 다섯 인물의 서술, 게다가 의식의 흐름에 따른 거라 술술 읽히는 그런 서사적인 책은 아니다. 그리고 내용은 더 갑갑하다.

  어느 시골의 애디 번드런이라는 한 여자가 죽는다. 고향에 자신을 묻어달라던 그녀의 유언에 따라 가족들(남편 앤스, 아이들 캐시, 달, 주얼, 듀이 델, 바더만)은 관을 끌고 40마일 정도의 여정을 떠난다. 시체가 썩어 악취를 풍기는 데도 약속을 꼭 지켜야만 한다며 길을 가는 그들의 여정은 어찌보면 매우 부조리해보인다.

  인물들의 행동은 어떠한가.

  죽어가는 어머니가 누워있는 창가 아래에서 캐시가 관을 만든다. 떠나는 과정에서 홍수를 만나 부러진 캐시의 다리에 그들은 시멘트를 바른다. 달은 방화를 저지르고 앤스는 주얼이 소중하게 여기는 말을 팔아버리고 딸 듀이 델이 낙태를 하고자 몰래 간직한 돈을 빼앗는다. 바더만은 물고기가 자신의 엄마라 하며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 아내를 매장한 직후 앤스는 의치를 해넣고 아이들에게 새엄마를 소개한다. 이런 내용이다. 나 원 참.

  이런 갑갑한 내용에다 익숙치 않은 문체인데도 불구, 나처럼 포기가 쉬운 독자가 한 번에 읽어내려갈 정도로 이 작품은 꽤나 매력있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특별히 흥미롭지도 멋있지도 교훈적이지도(?) 않은 이 소설이 읽고 난 후에 꽤 재밌었다는 느낌 혹은 착각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의 매력은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소재,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각각의 인물들의 독백에서 드러나는 비밀에 있다고 본다. 애디의 죽음 외에도 가족들은 저마다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정이 끝난 뒤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마도 그들은 서로의 비밀에 대해 여전히 모를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 뒤에 오는 일상.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는 나와 너의 삶. 어떠한가.

  인물에 따라, 그리고 인물의 정서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문체에서 오는 매력과 언어와 언어 이면의 진실이 주는 의미를 생각케 해주는 이 소설은 오로지 언어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예술작품이다. 그리하여 실험 소설이 주는 난해함과 달리 이상스럽게도 재밌는 이 책 역시 다시 들춰보고 싶은 또 하나의 책이 되었다.

  우연히 함께 읽게 된, 모두 여름을 배경으로 한 이 두 작품은 읽는 동안 그 특유의 분위기와 온도로 내 정신을 뜨겁게 달구었지만 익숙함 혹은 비슷비슷한 소설이 주는 매너리즘을 해소케 해준 꽤 보람있는 독서였다. 다만, 여름의 고온을 겨우 견디어내었더니 다시 여름이 왔다는 절망을 느끼게 해주긴 했지만 말이다. 휴,

   정말이지, 올 여름을 어떻게 보낸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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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ding Neverland, 2004

 


 좋은 영화다.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그런 영화. 보는 내내 즐거웠고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J. M. 배리가 <피터팬>을 만들기까지의 이야기라는 건 다들 알겠지만 난 영화를 보는 동안에야 알았으며 그제서야 작가 이름이 제임스 배리라는 것도 알았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어릴 적 보았던 명작들이 내게 준 것에 비해 나는 그것들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으며 알 필요도 없다고 여겼던 듯싶다.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니까, 뭐 그런 거겠지. 그러나 최근에 든 생각은 동화가 꼭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 어쩌면 나이만 먹은 어른들에게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흔히 아이들은, 나도 그랬지만, 얼른 자라 근사한 어른이 되길 바라며, 아이로 돌아가길 바라는 건 다 큰 어른들의 생각이다. 동심이 필요한 건 단지 나이가 먹었다는 이유로 매사에 고개를 뻣뻣이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라 어느새 옆에 앉은 아이의 천진한 눈망울을 놓치는 그런 어른들에게 더 절실한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제임스 배리는 영화에서 피터가 말했듯 진정한 피터팬이다.
 
 
 영화는 그와 데이비스 가족을 통해 상상력의 무한한 가능성과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동시에 보여준다. 어른이 된다는 것, 제임스가 조지에게 한 말을 되새겨보자.
 
 
 "봐, 멋있지 않니? 아이는 사라졌어, 30초사이에 넌 어른이 되어버렸단다"
 
 
 그렇게 아이들은 때로 저도 모르는 사이 불쑥 자라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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