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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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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소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문학 개론서식으로 말한다면, 일정한 분량의 언어를 갖춘 개연성 있는 허구? 아니면, 있을 법한 한 편의 이야기? 그런데 말이다. 개연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더더군다나 전혀 있을 법하지도 않은 이야기가 뻔뻔하게도 소설이라고 막 나온다면 어떨까. 

 그래, 제목에 버젓이 픽션을 붙이고 등장한 이 <자정의 픽션>은 그런 소설이다. 읽다 보면, 어 이거 아주 막나가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만큼 이 책은 뻔뻔하다. 그리고 아주 웃기다. 헉, 소리를 내다, 낄낄거리다, 얘 왜 이래, 하다 소설은 끝난다. 이제까지 소설을 읽으며 뭔가 하나씩 건지려고 했던 독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건질 게 없으니까. 아니, 일단은 없어 보이니까.

 두 교수가 서로를 겁주고 무시하고 얄밉게 웃다가 정신없이 들이대며 말허리를 자르고 몰아세우다 딴청부리며 막나가든가-논쟁의 기술에서 정말 그런다- 한 망상적인 작가가 제멋대로 미래 세계를 창조한다든가, 망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길을 통과해 저 세상으로 간다든가, 사소한 장난으로 파멸해간 아이라든가, 우리가 배웠던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음란소설로 규정해버린다든가, 자신의 성기를 자른다든가, 한 방에서 죄와 진실이 창조된다든가, 백수 청년의 넘쳐나는 머릿기름을 사수하고자 미국과 쟁탈전을 벌인다든가 하는 것들이 이 책에 나온다.

 그래도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에 상통하는 한 가지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논쟁에서 이기고 꼴 보기 싫은 인간을 상상을 통해 징벌하고 엄마의 품을 차지하고 유전을 사수해 강자가 되고 싶은 욕망 말이다. 그리고 그 욕망으로 인해 파멸한다. 아주 사소한 욕망도 마찬가지로. -「두유전쟁」의 성범수는 단지 배가 몹시 고팠을 뿐이었다.

 작가는 욕망을 재료로 제멋대로 지은 듯한 이 소설집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자정'이란 가라타니 고진이 그리워하는 '요란했던 근대' 이후의 시간이다. 동시에 서사문학이라는 대가족 안에서 소설이 태동하던,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홀로 자문해보던 근대 이전의 저 먼 '새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정'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얕은 꿈을 꾸거나 혹은 잠을 이루지 못해 고단하게 중얼거리는 시간이다.

 내가 이 소설집을 읽고 그의 후기를 읽고난 박형서에 대한 감상을 말하자면 그는 이렇다. 아주 뻔뻔하거나, 혹은 진지하거나, 아니면 둘 다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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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를 추억하며 그르니에 선집 2
장 그르니에 지음 / 민음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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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뮈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는 이 책의 서두에서 카뮈의 몇 가지 면모를 상키시키고자 할 뿐이라고 했다. 시간 순서대로 카뮈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가 아니다. 일종의 카뮈에 대한 스케치다. 그렇지만 마치 퍼즐을 하나하나 끼워 넣듯, 종반에 가서는 카뮈의 대략적인 윤곽이 드러나는 그런 책이다.

 그르니에는 카뮈의 글에서 어떤 부르짖음, 외침, 절규를 듣는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지도 모르겠다. 카뮈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못한 나지만,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 적어도 오래 전에 읽은 「이방인」을 돌이켜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니까. 그리고 비로소 마주한 이 말은 쉬이 잔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창작을 택했다"

 그가 「이방인」을 왜 썼는지, 아니 쓸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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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마치 1 - 진옥섭의 예인명인
진옥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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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후무(前無後無),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

  저자가 한 팸플릿에서 썼다는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 전무후무(全舞珝舞), 가장 완전한 춤. 그 춤판의 고수들이 노름마치다. 과연 앞으로는 다시 볼 수 없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그들의 이야기가 이 두 권의 책에 묶였다. 최고의 명인이라 불리는 18인의 고수들을 만나러 가는 여정은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편히 앉아 그들의 삶을 엿본다는 게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누군가가 예술은 곧 놀이라 하였다. 그러나 놀이가 단순한 유희를 넘어 예술이 되려면 참으로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 만만치 않은 놀음판에서 예술의 경지에 오른 분들이 있다. 놀음을 마치게 할 정도의 최고의 명인을 일러 남사당패 은어로 '노름마치'라 하니 되뇌여볼 수록 과연 그보다 적절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4무[武·舞·巫·無]에 사무친 한 사내가 있다. 그 사내가 바로 진옥섭, 이 책의 저자다. 그는 전국 여기저기에 흩어져, 심지어는 자신들의 과거를 꼭꼭 숨기며 사는 명인들을 찾아가 그들을 무대에 올리고 이제는 책으로까지 엮었다. 장단을 따라 춤을 추는 듯한 그의 문장은 그대로 춤판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 눈이 활자를 읽는 게 아니라 춤추는 문장이 저절로 내 마음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진양조로, 때로는 휘몰이로 치달으며.

  그 장단에 따라 18인의 명인들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내 마음은 위로 치솟다가 아래로 푹 가라앉기를 수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초야에 묻힐 뻔했던 춤꾼이 무대에 올라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을 땐 내 마음엔 뜨거움이 치밀어 오른 반면, 끝내 그토록 기다리던 빛을 보지 못하고 작고하신 분들의 이야기는 마음을 착잡하게 하였다. 일생을 기다리던 명무전에서 춤추고픔을 억누르며 북을 쳐야 했던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춤꾼 허종복의 이야기에선 새어나오는 한숨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걸작'에 지정되게 만든 '조선성악연구회'를 이루던 명인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국밥집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또한 재주로 인해 남다른 삶을 살아온 각각의 명인들의 한 많은 세월에 감히 어떤 감상을 드려야할지. 그들조차도 가족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함구해온 이야기들이다. 나로서는 그저 책으로나마 그들을 알게 되어 송구스러움과 감사함을 느낄 뿐이다.

  책은 때때로 크고 작은 영향력을 발휘하곤 한다. 읽고 나서 혼자 간직하고픈 책이 있는 반면, 드물긴 하지만 세상에 알려야할 의무를 느끼게 해주는 책들도 있다. 이 책이 그러하다. 타인에게 책을 추천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각자의 취향이 유독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책이므로. 감히 말하건대, 이 책은 꼭 일독을 권하고 싶다. 울고 웃게 만드는 책, 무엇보다 우리 것이라 더 무심했을 지도 모르는 우리의 예술을 말하고 있는 책이다. 한 많은 삶을 살아온 명인들의 구성진 입담과 저자의 재기 넘치는 말놀이가 당신을 웃게 하고 또 울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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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 - 글쓰기에 대한 사유와 기록 조선 지식인 시리즈
고전연구회 사암, 한정주, 엄윤숙 지음 / 포럼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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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글을 쓰기보단 말하기에 더 익숙한 존재다. 사실인즉, 생각보다 훨씬 더 글쓰기는 어렵다. 이 시대의 문장가 김훈마저도 밤새워 원고지 한 장을 채우고 그것마저 마음에 차지 않을 땐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할 정도로 보면 글로 밥을 벌어먹는 사람들에겐 더욱더 글쓰기는 고통을 빼놓을 수 없는 절실한 행위다. 물론 창조적 고통은 단순한 고통을 넘어서 어떤 숭고함마저 품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요즘 출판계를 보면 이 글쓰기가 더이상 글쟁이들만의 전유물은 아닌 듯하다. 그만큼 글쓰는 능력이 요구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리라. 입을 떼자마자 읽고 글자를 깨우치자마자 외우기 바쁜 이 시대 사람들은 대학에 가고 사회에 나가서야 비로소 자신이 글쓰기와는 너무 동떨어진 삶을 오래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그런 그들을 위해 각종 글쓰기 관련 서적들이 만들어지고 심지어 어떤 이는 밥하기 보다 더 쉬운 글쓰기란 표제로 펜대 굴리기에 주눅든 이들에게 희망어린 유혹의 손짓을 내보인다.

 그런 와중에 옛 문인들의 문장에 눈을 돌린 이들이 있다. 고전연구회 사암(俟巖). 조선 지식인 시리즈를 낸 그들의 책 중 내 손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제목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이 책은 조선 문인들의 글쓰기에 대한 사유를 모아 엮은 것이다. 박지원, 이덕무, 이익, 정약용, 허균 등 익히 들어 앎직한 옛 문장가들이 글쓰기에 대해 어떤 마음 자세를 지니고 그것을 다루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나는 정약용과 최한기의 글이 마음에 와닿았다. 정약용은 문장이란 마음 깊은 곳에 쌓아둔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였고, 최한기는 글은 글쓴이의 얼굴이라 했다. 과연 글을 쓰려 하는 자는 우선 자기가 쓸 수 있는 것을 써야 하며 애써 밖에서 끌어다 뼈대 부실한 글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곧 글쓴이의 얼굴이라 하니 결코 경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해서도 안 된다. 백 번 천 번 지당한 말씀이다.

 이 책에 들어차 있는 사유들은 모두 한 장 분량의 짤막한 글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글들을 통해 현대인이 배워야할 점들이 많기에 유효한 고전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 다만 거슬리는 건, 각각의 글 뒤에 달아놓은 저자들의 코멘트다. 기왕 코멘트를 달려면 책의 주제에 걸맞게 글쓰기와 글쓰기를 대하는 자세를 중점으로, 그리고 조선 문인들의 글을 보충하는 방향으로 좀 더 자세하고 무게 있게 달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 마치 문화교양지에서나 어울릴 듯한 뜬금없는 코멘트는 확실히 책의 진가를 떨어트렸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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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쉽게 하기 - 기초 드로잉 -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배운다! 스케치 쉽게 하기 2
김충원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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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 시절, 미술 시간은 내게 소외와 굴욕의 시간이었다. 매 첫 시간이면 들어가는 소묘 실습에 선생님이 아무런 언급도 없이 소재를 던져주고 팔짱을 낀 채 가소롭다는 듯 백지 위에서 방황하는 우리의 손을 내려다보곤 하던 광경이 떠오른다. 그 얼마나 진땀나고 울컥 화가 치솟는 시간들이었던가. 반마다 꼭 있는 미술 학원생들의 능숙한 손놀림에 하얀 바탕 위에 윤곽을 드러내는 사물들, 혹은 인물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친구들의 모습은 또 어찌나 애처롭던지. 그래도 해보겠다고 초등학생도 웃고 갈 그림, 아니 교과서 위 낙서나 다름없는 그것들에 심혈을 기울이는 진지한 얼굴들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우습기도 하고 일면 그립기도 하다. 그 친구들에게 이 책을 보여주면 얼마나 놀라워할지 눈에 선하다.

  스케치 쉽게 하기는 말 그대로 스케치를 쉽게 하는 법, 즉 기교를 가르쳐주는 책이다. 미술 시간에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혹은 무시되었던 기술을 자세히 보여준다. 연필을 쥐는 손가락부터 손목, 팔꿈치, 어깨까지 어떻게 움직여서 선을 긋고 명암을 넣는지 등등에 대해 단계적으로 소개해준다. 책의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미술 시간이면 느꼈던 소외감은 온데간데 없고 이것만 따라하면 될 것 같은 자신감마저 느껴진다. 이 얼마나 친절한 책인가.

  물론 이것은 기교일 뿐이다. 중요한 건 책에서 말해주는 기교만이 아니라 이제 막 스케치를 하기 시작한 우리들의 마음자세이다. 저자는 잠깐씩이라도 자주 그리는 습관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완성을 위한 그림 그리기가 아닌 스케치를 하는 과정에서의 몰입 상태와 사물과 풍경의 재발견을 통해 창조력과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것에 그림을 그리는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거리를 걷다가 무심코 바라본 풍경에 매혹되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내 손으로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지. 스케치는 그렇게 우리와 거리가 먼 고난이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우리를 주눅들게 한 건 미술이 아니라 미술 시간에서 기인한 것임을 깨닫자. 그리고 각종 디지털 기기가 넘쳐나 너도 나도 디카를 들고 다니며 셔터를 누르는 이 시대에 소소한 연필 스케치가 주는 남다른 감동을 느껴보자. 이 얇은 책이 나와 당신을 도울 것이다. 다만, 욕심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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