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지음, 이석태 옮김 / 보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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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그들의 맨 마지막 페이지부터 읽게 됐는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잇단 아버지와 반려 고양이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해온 내게 이 책은 두 사람의 조화로운 삶의 연장선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 밖에도 중국의 고대 격언에서부터 임어당의 글까지 인용하고 있는 헬렌의 해박함에 한 번 놀랐고, 스콧 니어링에 대한 죽어서까지도 변함없는 사랑과 존경, 남편이 연필로 적은 편지와 작은 메모까지도 일일이 타자기로 쳐서 보관해둔 성실성에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콧 니어링이 백년 동안 살아서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되었다'는 이웃 사람들의 깃발처럼 삼십년을 살든 오십년을 살든 백년을 살든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되기 위해 사는 삶,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얻기'에만 열을 올리느라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삶이 아닌, '덜 갖되, 더 충실하기'라는 그들이 제시한 대안처럼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그러다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그가 그랬듯, 그녀가 그랬듯 세상에서 조용히 물러나 육체의 껍데기를 세상에 두고 홀연히 죽음 너머의 영원한 고요 속으로 걸어갈 수 있기를... 

 

   
 

 조화롭고 하나로 된 느낌을 갖기 위한 답 - 스코트의 편지 중에서  

1. 일상생활에서 곁가지들을 떼어버리고 남은 알맹이를 찾는 일 

2. 영원한 힘을 가진 우주와 만나는 일 

3. 저마다 자기 존재를 확인하면서도 온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어떤 일을 발견하는 것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나는 동물들이 흔히 택하는 죽음의 방식, 보이지 않는 곳까지 기어나와 스스로 먹이를 거부함으로써 죽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아마도 한 가지 죄악이 있다면 모든 것을 이루는 사랑의 축복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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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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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씹어먹어야할 책이다. 그냥 후루룩 먹어버리기엔 작가의 땀과 노고가 너무나 아까운 그런 책이다. 이제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져버린 동유럽 여행기, 아니 여행기라기보다는 동유럽 문화에 대한 안내서라는 말이 더욱 들어맞을 것 같다. 스무 권의 책을 번역했다는 작가의 톡톡한 내공이 여기저기에서 빛을 발한다. 동구권 문화에 대한 사전지식, 말로 책을 빚어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살아숨쉬는 언어들의 조합. 마치 산문이 아니라 긴 시를 읽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재미난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까지도 갖게 하는... 그녀가 잘 쓰는 말마따나 짭조름한 작가의 땀맛이 느껴지는 착하디 착한 책.  

   
 

여행자는 행동 하나 하나에 온 마음을 담아 집중한다. 세상에서 제일 사소한 일을 최고로 진지하게 해낸다. 나를 둘러싼 시공간에 대한 극진한 예의가 저절로 우러나온다. 여행이 아니라면, 삶은 언제나 나에게 부당한 업신여김을 당해왔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그 지긋지긋하던 삶이 나를 도발한다.  

<키모메 식당>의 미도리씨 말마따나 이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 끝까지 원인을 밝히지 못한 채 단지 일어났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인생에는 널려 있다. 궁금해서 죽을 것 같은 일이 많은 어린 시절에는 그러한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다. 세상이 그다지도 모호하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더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은 나 말고는 아무도 그런 고통을 겪는 듯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먹밥의 밥알처럼 찐득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얼토당토 않은 해답이라도 궁리하며, 뿌연 세상의 유리창들을 닦아나가고 싶다. 적어도 우리 둘의 세상 안에서만이라도 모든 것이 선명했으면 좋겠다.  

나는 9시 이후에 알코올을 팔지 않는 이 깐깐한 동네가 맘에 든다. 그 시간 이후로는 묽은 위로를 팔지 않는 이 깐깐한 동네가 맘에 든다. 그 시간 이후로는 묽은 위로를 팔지 않으니 책을 읽든 정사를 나누든 다른 길을 알아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는 태도가 미더운 것이다. 허튼 기대를 버리면 인생은 조금 수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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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275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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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기가 어디냐고  

 

붉은 해가 산꼭대기에 찔려  

피 흘려 하늘 적시고, 

톱날 같은 암석 능선에  

뱃바닥을 그으며 꿰맬 생각도 않고 

- 여기가 어디냐고? 

- 맨날 와서 피 흘려도 좋으냐고?

 

 
   

  

스무살 나의 영웅이었던 이성복 - 수년만에 다시 만난 그의 시를 보며 왜 내 청춘이 그토록 그에게 매료됐었는 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랄까. 이성복의 시는 이창동의 영화 같은 구석이 있다. 그들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인생을 시라는 창에, 혹은 영화라는 창에 서글프면서도 아름답게 비춰낸다. 물론 읽다보면, 보다 보면 진저리가 나서 한동안 멍하니 그 충격에 난타질을 당할 지라도... '슬픔의 미학은 오래간다'던 누군가의 말처럼 잊지 못할 서러운 아름다움을, 내 청춘과 이제 막 청춘을 빠져나온 덜 영근 영혼에게 선물해준 이성복 시인에게 머리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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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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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지 말자 

가진 게 없어 불행하다고 믿거나 그러지 말자 

문밖에 길들이 다 당신 것이다 

 
   

 

세상에 차고 넘치는 여행기들 속에서도 이병률의 끌림은 조금 특별하게 다가왔다. 시인과 라디오 작가의 감수성을 꼭 반반씩 가진 어느 여행자의 낮지만 울림이 있는 목소리들... 

계속해서 길을 잃고 계속해서 사람에게 뒷통수를 맞아도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 결국엔 삶을 껴안을 수 있다는 이야기...   

이곳의 생이, 이곳의 사람들이 조금 지겨운 우리들에게 '잠시 떠나도 좋다'고 등 두드려주는 따스한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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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 시인선 359
송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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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봄날 이 거친 시집을 꽃 피는 시집으로 잘못 알고 찾아오는 나비에게 오래 머물다 가진 마시라고 해야겠다'는 작가의 겸손한 인삿말과는 달리, 이 한 권의 시집은 나비가 둥지를 틀고 싶은 꽃밭이었다.  

동화와 시를 오가는 발랄한 상상, 그러나 결코 지나침이 없는 절제되고 소박한 말들의 밥상. 달콤함보다는 포근함이 더욱 어울리는 송찬호의 꽃밭에 자주 머무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 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만년필' 중에서  

빗속 천둥과 번개가 토란 잎 위에서 뒹굴었고 그다음 전라의 젊은 남녀가 태양을 피해 토란 잎 그늘로 뛰어들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을 한껏 치장하는 앵무새의 혀, 사자의 갈기, 원숭이의 다이아몬드 꼬리, 잉어의 수염 등은 한낱 삶의 가면에 불과하다  

.............................................................................'토란잎' 중에서  

산토끼가 똥을/ 누고 간 후에 // 혼자 남은 산토끼 똥은/ 그 까만 눈을 / 말똥말똥하게 뜨고 / 깊은 생각에 빠졌다 // 지금 토끼는 / 어느 산을 넘고 있을까? 

............................................................................'산토끼 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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