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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에게 창비시선 95
나희덕 지음 / 창비 / 199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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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집을 다시 손에 쥐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희덕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것이다. 소월시 문학상에서 만난 그녀의 시들은 나를 통째 흔들어놓았고 나는 그녀의 처음이 몹시도 궁금했다.  

19년 전에 처음으로 쓰여진 '뿌리에게'라는 처녀시집 역시 기대를 빗겨가지 않았다. 후문에 '산 만큼 쓴다는 말 앞에 스물여섯 해의 삶이라고 내놓기에는 너무나 어설픈 시집'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제는 그녀보다 무려 일곱 살이나 더 살아버린 나로서는 그녀가 정말이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스물  여섯 해 밖에 살지 않고도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대지같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처럼 우주를 통째로 껴안고 있는 시인의 넓은 가슴에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 없게 시집.  

살아숨쉬는 모든 것들의 절망과 어두움에까지도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어줄 것만 같은 시집.   

늦게라도 그녀를 만나게 된 것에 감사드린다.   

 

   
 

              11월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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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275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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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기가 어디냐고  

 

붉은 해가 산꼭대기에 찔려  

피 흘려 하늘 적시고, 

톱날 같은 암석 능선에  

뱃바닥을 그으며 꿰맬 생각도 않고 

- 여기가 어디냐고? 

- 맨날 와서 피 흘려도 좋으냐고?

 

 
   

  

스무살 나의 영웅이었던 이성복 - 수년만에 다시 만난 그의 시를 보며 왜 내 청춘이 그토록 그에게 매료됐었는 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랄까. 이성복의 시는 이창동의 영화 같은 구석이 있다. 그들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인생을 시라는 창에, 혹은 영화라는 창에 서글프면서도 아름답게 비춰낸다. 물론 읽다보면, 보다 보면 진저리가 나서 한동안 멍하니 그 충격에 난타질을 당할 지라도... '슬픔의 미학은 오래간다'던 누군가의 말처럼 잊지 못할 서러운 아름다움을, 내 청춘과 이제 막 청춘을 빠져나온 덜 영근 영혼에게 선물해준 이성복 시인에게 머리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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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 시인선 359
송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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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봄날 이 거친 시집을 꽃 피는 시집으로 잘못 알고 찾아오는 나비에게 오래 머물다 가진 마시라고 해야겠다'는 작가의 겸손한 인삿말과는 달리, 이 한 권의 시집은 나비가 둥지를 틀고 싶은 꽃밭이었다.  

동화와 시를 오가는 발랄한 상상, 그러나 결코 지나침이 없는 절제되고 소박한 말들의 밥상. 달콤함보다는 포근함이 더욱 어울리는 송찬호의 꽃밭에 자주 머무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 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만년필' 중에서  

빗속 천둥과 번개가 토란 잎 위에서 뒹굴었고 그다음 전라의 젊은 남녀가 태양을 피해 토란 잎 그늘로 뛰어들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을 한껏 치장하는 앵무새의 혀, 사자의 갈기, 원숭이의 다이아몬드 꼬리, 잉어의 수염 등은 한낱 삶의 가면에 불과하다  

.............................................................................'토란잎' 중에서  

산토끼가 똥을/ 누고 간 후에 // 혼자 남은 산토끼 똥은/ 그 까만 눈을 / 말똥말똥하게 뜨고 / 깊은 생각에 빠졌다 // 지금 토끼는 / 어느 산을 넘고 있을까? 

............................................................................'산토끼 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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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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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百年이라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문태준, '百年' 전문  

 
 
   




목울대가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기어이 마지막 문장처럼 눈물이 났다. 문태준이란 시인을 참 뒤늦게 알게 됐는데, 이 사람 참 대단하다. 자기 맘대로 사람을 웃고 울린다.  

유행처럼 번진 산문형 시가 아닌 것도 마음에 들고 - 시는 운문일 때 좀 시답지 않나 싶은 나만의 생각이다 - , 우리말과 고유의 정서를 잘 담아낸 것도 참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시인이라고, 작가라고, 소위 지적허영에 빠져 뜻도 알 수 없을 만큼 온갖 잘난 척을 시 속에 담아둔 치기들과 달리, 간결함 속에 강렬함을 담아낼 줄 아는 지혜가 빛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살아보니 깨달은 건 단순함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이요, 쓰다보니 깨달은 건 소박한 음식이 몸에 좋은 것처럼 꾸미지 않은 글이 좋은 글이라는 것.  

진달래꽃이라는 명시가 탄생하기까지 김소월은 3년 동안 퇴고를 반복했다는데, 문태준도 이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 하나를 두고 얼마나 고심했을 지가 선하다. 상이 무슨 그리 대수랴만은 2006년에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문태준, 그가 현대판 김소월로 오래 오래 남아주길 바란다. 

위의 시가 나를 울렸다면, 마치 억새로 코끝을 간질이는 것 같아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온 시도 한 편 소개하련다.   


   
 
들키지 않도록 살금살금
아무도 없는 부뚜막에서
장독대 낮은 항아리 곁에서
쪼그리고 앉아
토란잎에 춤추는 이슬처럼
생글생글 웃는 아이 

비밀을 갖고 가
저 곳서
혼자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언제였던가, 

간질간질하던 때가
고백을 하고 막 돌아서던 때가
소녀처럼,
샛말간 얼굴로 저 곳서 나를 바라보던 생의 순간은

...................................문태준,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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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창비시선 238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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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미줄처럼 얽힌 책읽기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일단 읽은 책이 마음에 들면, 그 책 속에서 소개된 책을 다시 찾아 읽어보는 것. 문태준이란 시인을 알게 된 것 역시, 바로 전에 읽은 공지영의 <나는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너를 응원할 것이다>를 통해서다.  

98년에서 2000년까지, 스물 한 살에서 스물 세 살까지 시에 미쳐있던 시절에는 창비와 문지에서 나온 시집을 죄다 섭렵할 정도였는데... 어느 덧 시와는 담을 쌓고 살아오는 동안, 이렇게 괜찮은 시인도 이제야 알게 됐다.  

그의 이력이 조금 의아스럽다. 시인이면서 불교방송의 피디다. 그런 그의 이력을 보면서 난 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타협해버렸다고만 생각해왔는데, 감춰둔 시에 대한 연정을 꺼내봐도 좋을 지 묻게 되는 밤이다.    

그의 시는, 시집 제목처럼 거추장스러운 세상의 가식을 벗어버린 맨발과 같은 느낌이다. 나아가 그 맨발로 흙먼지 풀풀 날리는 그 옛날 우리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듯한 평안함을 준다. 

찾아보니 이미 소월문학상, 미당문학상,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힐 만큼 꽤 명성을 쌓았다. 뭐 이런 상 나부래기며 명예 따위가 뭘 그리 중요하겠는가마는, 지적 허영으로 똘똘 뭉쳐있거나 경제며 문화까지 그저 미국적인 삶을 좇아가는 지금의 세태에서 우리 전통 정서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인정해도 좋을 것 같다.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맨발' 중에서 

 

당신과 나 사이/ 이곳의 어둠과 저 건너 마을의 어둠 사이에/ 큰 둥근 바퀴 같은 강이 흐릅니다  // 강 건너 마을에서 소가 웁니다 / 찬 강에 는개가 축축하게 젖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 낮 동안 새끼를 이별했거나 잃어버린 사랑이 있었거나/ 목이 쉬도록 우느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 우는 소의 희고 둥근 눈망울을 잊을 수 없습니다 // 어리숙한 아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저물어 가는 강마을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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