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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ㅣ 창비시선 305
박후기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평점 :
무너진 집안의 막내인 나는/ 가난한 어머니가 / 소파수술비만 구했어도/ 이 세상에 없는 아이/ 구석진 울타리 밑에서/ 흙을 먹으며 놀아도/ 키가 자라지 않아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중략> 엄마는 아무 때나 / 울타리 밑에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누었다/ 죽은 동생들이 / 노란 오줌과 함께/ 쏟아져나왔다
...........................................................................'채송화' 중에서
사과나무에겐/ 꽃 핀 자리가 똥구멍이다/ 꽃 필 무렵/ 사과나무는 온몸이 항문이다 / 꽃잎을 버림으로써 몸을 여는/ 항문의 개화기를 지나면/ 똥덩어리 같은 사과 한알/ 비로소 가지 끝에 매달린다
............................................................................'꽃 진 자리' 중에서
지상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난간 위에 망루를 세웠다. 망루가 서 있던 난간은 무너진 하늘의 일부였다. 그곳은 철거민들의 소도였지만, 관리들은 용산 4지구라고 불렀다. 누군가 망루에 불을 질렀고, 시커멓게 타버린 사람들이 들 것에 실려 급하게 이승을 빠져나갔다 // 모두 난간 위에 살고 있으면도 발아래 세상을 보지 못했다.
.............................................................................'난간에 대하여' 중에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죽은 자도 검문소를 통과해야 비로소 죽음에 닿을 수 있다. 포탄에 맞아 이마가 함몰된 도로를 우회하는 것은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게 익숙한 일이다. 앰뷸런스는 죽음보다 늦게 도착하고, 소녀는 무너진 발전소를 지나 집으로 간다.
...............................................................................'소녀들' 중에서
살아야 하는 여자와/ 살고 싶은 여자가 다른 것은/ 연주와 감상의/ 차이 같은 것/ 건반 위의 흑백처럼/ 운명은 반음이/ 엇갈릴 뿐이고
................................................................................'사랑 - 글렌 굴드' 중에서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나이'에 나는 다시 회귀하는 연어처럼 책을 집어들고, 시를 읽는다. 시인이 되기를 꿈꿨던 나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묘한 완충지역을 찾아내 그곳에 비집고 들어가 살아왔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도 벌 수 있다고 행복하다 살아온 날들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나는 분명 분기점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런 분기점에서 이 햇살 같은 시들을 만났다. 박후기의 시에서 그 옛날 스무살 무렵의 나를 지배했던 이성복과 기형도, 그리고 신현림... 그들과 같은 영혼의 무늬를 본 것 같다.
그동안 시를 잊고 살아서 장담할 순 없지만, 내 감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현대시사에 주목받는 한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을는지~
십대에 만나 이십대에 끊어버린 신경숙이 지금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걸 보면, 내 감도 그닥 떨어지진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