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10.21

오늘은 히로쓰 고지란 청년을 소개합니다.

저는 그 이름을 일본인을 구하고 대신 죽은 이수현씨의 의로움을 다룬 어느 신문의 사설 모두에서 처음 봤어요. 이수현에 대한 이야기의 실마리로 조선인(비하니 뭐니 논하지 말 것)을 구하고 대신 죽은 한 일본인 청년, 즉 히로쓰 고지가 소개되었지요. 보편적 인간애가 국적보다 앞섰던 사례를 거론하면서 긴장 관계에 있는 한일관계를 우호적으로 풀어보려는 의도도 있었지요. 내용인즉, 1941년 일제치하때 청진 앞바다에서 일본상선 기비호가 러시아의 기뢰에 부딪쳐 침몰하게 됩니다. 이 배의 구명보트의 수가 적어 일본 경찰은 일본인만 구조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히로쓰 고지라는 23세의 청년이 자기 자리를 한 조선인에게 양보하고 침몰하는 배에 남아 죽었다는 게 그 스토리의 골잡니다.  이 청년이 조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京都大學 윤리학과(철학과) 3년생이란 것과 죽을 때 칸트의 유명한 유언 뇌까렸다는 일화가 있었어요. 

 

그 히로쓰 고지가 요즘 저를 유혹하는 청년입니다. 의로운 일로 요절해서가 아니라 철학정신을 가지고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살았던 한 철학도로서 말입니다.  그는 죽기 3년 전 20세의 나이에 쓴 일기를 남겼는데, 그의 사후 친구들이 이 일기를 정리해 <어느 철학도의 수기>란 표제로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 일기는 수학자 김용운 선생의 번역으로 박영사에서 문고본으로 1978년에 펴낸 적이 있습니다. 참, 오래된 책이지요. 아마 구할 수 없을테니 제 소개가 필요하리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런 좋은 책을 우리 젊은이들이 계속 읽도록 펴내지 않는 것, 또한 안타까이 생각합니다.

 

20살의 청년이 철학적 고민을 해봤자 얼마나 심도있게 하겠느냐고 의혹을 제기할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일부분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보면서 우리의 20살 젊은이도 저 정도로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스스로 진로를 택하는지 묻고 싶었어요. 히로쓰 고지는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격의 완성이라 생각하고 생존적 현실이 문제되는 전쟁통에도  철학을 전공으로 택합니다. 시간의 흐름이 직선적이지 않은 이상, 오늘 날의 학생이 70년전의 학생보다  더 현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로마사이야기>에서 읽어 보았듯 당시의 공화정에 대한 토론은 우리보다 더 정치하지 않습니까. 고지의 책을 읽으면서 마흔이 넘은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스무살 그청년이 그대로 했다는 것에 솔직이 놀랐어요. 의롭게 요절해서 영원히 젊음을 얻은 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그 청년은 가슴속에 불타는 생명, 즉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는 치열한 불꽃을 지니고자 했다는 점에서 '영원한 청춘의 사람'이었던 거지요.

저도 고지처럼 '관념의 인간 ', 다시말해 정신의 사람이고자 했지요. 정신의 인간이란 다시말해 철학하며 사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정신적 관념을 설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사는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흔히 오해하듯이 현실을 배제하고 추상적 관념 속에서 산다는 것도 아닙니다.  현실에 부딪치는 경험들에 맞서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치열하게 사색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안일한 삶을 포기하고 끊임없이 싸우며 사는 것이지요. 고지의 말을 빌면 "끊임없이 과한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며" 말이지요. 이상주의라고 말할 때 그 이상이란 미래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의 배경이 되어 현실을 단련시키는 것을 말한다는 고지의 일기를 읽었을 때, 제게 있어 관념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했지요. 

 

자기 도덕의 기준이 완화될까 사랑과 용서란 말을 쉽게 뱉지 못한다는 청년, 사랑한다는 것이 때론 도끼날을 들고 내리찍는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청년, 운명을 사랑하는데 앞서 운명과 싸우겠다는 청년, 그 싸움이 오히려 살아있는 운명을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청년. 그 청년을 시험에 찌들어 수동적 삶을 사는, 그리고 먼 이상보다는 가까운 현실을 덜컥 손에 잡는 오늘날의 또래의 청년이 만나기를 나는 바라는 것입니다. 대학이 기업 인력공급의 인큐베이터로 전락해 사회의 방향을 설정할 인문학조차 위태로운 이 때 철학도의 글을 권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치열한 고민이야말로 작게는 인생의 비젼을 수립하게 하는 밑걸음이고, 크게는 한 사회의 방향에 대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볼 눈을 기르는 시기인 것입니다.

 

철학적 사고란 어떤 것인지 고지의 글을 토대로 한 번 예를 들어 볼께요.

<요즘 길거리에서 흔히 아름다운 사람을 많이 본다. 이 도시는 발전의 결과 오히려 경박한 것으로 타락해버렸다. 그러나 반면에 도회적 색채가 짙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것 때문에 비교적 세련된 근대적인 미를 지닌 사람이 많아졌다. 그런 사람을 보면 하나의 피가 통하는 형상으로서 그 아름다움에 도취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을 그 대상에 넣고 생각한다면 완전히 벌거벗은 벌레, 요염한 아미도 그 순간에흙덩어리나 다름없어진다....중략...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것은 그 사람이 인간 세계에서 자신의 인간성과 인정을 교차시키며 끝내는 그것을 넘어선 점이 있기 때문이다.>

고지의 생각을 하나 더 소개하지요. 고지는 당시의 문화인 혹은 인텔리겐차의 생활이 단순히 외적 자극에 반응할 뿐 극히 단순하고 유치한 감각에 의지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생활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진정한 문화가 아니라고 평합니다. 문화란 비록 '그것이 좁은 것일지라도 깊은 것'에서 발생한다는 것이죠.

 

외적 감각 생활에 쫒겨 내적 생명을 망각할 때 그것은 자기 상실이며 자기 생명의 상실이랍니다. 즉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음악회를 다니고 유행하는 옷을 입고 스파게티를 먹는다해도 그것이 내적 생명을 길러주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문화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야인이 되겠다고 고지는 말합니다. 이러한 고지의 생각은 평소의 제 생각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자신이 생활속에서 공명하지 못하는 문화적 행사의 향유가 문화는 아니라는 생각요. 음악회에 졸면서 앉아 있는 것이 문화가 아니라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즐기며 듣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일 수 있다는 거 말입니다.

 

죽음에 직면해서 결단을 요구받았을 때 고지는 평소의 사색하던 바대로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es ist gut"이라 외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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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운명은 그에게 살아날 기회를 줬지요. 일본인들이 다 구조되기에 그 또한 그 일원이 되면 별다른 죄책감없이 살았을 거예요. 그러나 철학도였던 고지는 그 운명에 맞서 조선인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죽음을 결단합니다. 안일을 경계하고 치열하게 진리를 추구하며 살겠다는 일기의 내용처럼요. 그런 자신의 철학적 죽음이기에 '이것으로 좋다'고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살기도 힘들며 하나의 생각만을 견지하며 살기도 힘듭니다. 오히려 하나의 일관성 있는 관념만 추구하며 사는 것은 독선과 편견이 될 때도 있고요. 하지만 안락한 일상을 경계하고 정신의 날을 갈며 때론 시대와 불화하며 사는 것도 젊을 땐 필요하다고 봅니다. 젊은이가 너무 둥글한 것은 보기 좋잖습니다. 날선 정신이 세월따라 둥글고 깊게 갈아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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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0

 

한 해의 연말을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작의 현악사중주와 이병주의 책들로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 나온 한길사전집에 수록되지 않은 <매화나무의 인과>와 <쥘부채> <어느 황제의 초상> 등과 <동서양고전탐사>이라는 일종의 독서노트를 읽고 있어요. <동서양....>, 이 책은 이전에 읽은 <허망과 진실>을 생각의 나무에서 새로 펴낸 것이지요. 똑같은 책이 이십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어도 같은 울림을 갖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동안의 제 독서와 사고의 빈함함을 감안하더라도 이병주의 혜안이 뛰어났다는 것에 충분히 감탄하고 있습니다. 루쉰과 쉬광핑이야기만 해도 재작년에 겨우 번역돼 독자들 품에 온 것인데 이병주는 그 원본인 <兩地書>를 이미 젊은 시절에 읽고 1979년 <허망과 진실>에서 소개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요즘에야 비로소 서점에서 접해 읽고 있는 쉬광핑의 저서들 또한 이병주는 1968년에 여러번 읽었지요. 루쉰의 책을 읽기위해 일부러 백화문을 배웠다는 대목에서 저는 잠시 아연해졌습니다. 책을 읽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에서 언어를 배우는 사람. 번역서가 많지 않던 시절의 딜레탕트의 모습이지요. 그의 백과전서적인 지식뒤에는 그런 노력이 숨어 있었어요. 덩달아 젊은 날 스무해도 전에 이병주를 알면서부터 그가 읽은  책들을 권위있는 추천서로 생각하고  구해 읽으려 했던 제가 떠오르네요. 애써도 늘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런 초상의 대상이 제게 있다는 것이 행복할 따름입니다.

 

이병주를 평가할 때 박람강기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가 역사의 기록자였다는 점이 외려 큰 주목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으로서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그에게는 주변의 역사적 진실을 목격할 기회를 자연히 많이 주어졌고 그는 그것을 기록해야할 사명을 느꼈을 거예요. 그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말못한 진실을 대변할 입을 그는 문학을 통해 발견한 것이지요. 입에 절박한 말이 고여야 글이 되는 법이라 생각합니다. 좌우라는 정치적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인간의 잣대로서, 이념의 구호 속에 명멸해간 수많은 이름없는 지식인들을 조명함으로써 역사라는 커다란 봉우리의 진실을 캐내고 싶었을 겁니다. 정치나 역사는 성긴 그물이라 그 속에 숨어든 자잘한 진실들은 다 새어나가기 마련이고, 이 자잘한 것들을 붙여 조각그림을 더해야 전체가 그려지는 것인데, 이병주는 어느 역사가 이상으로 이 작업을 실증적으로 해냈다는 생각입니다. 그의 소설이 단순히 소설에 그치지 않고 사색과 증거, 정확한 실증적 기록을 곁들인 실록의 의미를 지녔다는 것을 읽은 분들은 아실거예요. 소설로 쓴 역사 말입니다. 그것은 이병주 자신이 역사의 기록자가 되겠다는 자세로 글을 썼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단편소설 <어느 황제의 초상>에 남긴 이병주의 각오를 들어 보지요.

소설 속에서 이선생은 어떤 각오로 작가가 되었느냐고 묻는 노정필의 물음에 이병주는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목격자 입니다. 목격자로서 증언만을 해야죠. 말하자면 나는 그 증언을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자처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기록할 수 없는 일, 그 일을 위해서 어던 섭리의 작용이 나를 감옥에 보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을 문학으로 가능케 하자면 詩心 혹은 시정이 기록의 밑바닥에 지하수처럼 숨어 있어야 설득력과 감정이입이  함께 생길 수 있다고 이병주는 생각합니다.

문학을 통한 기록의 추구. 지금 소개하는 <쥘부채>도 그런 이병주의 의도가 배인 소설이지 싶습니다. 집념어린 사랑을 소개하려는 것만은 아니지요.

 

자, 이제 <쥘부채>의 세계로 들어가 볼게요.

 

2006.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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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쓴 글입니다.

 

우리가 지닌 명백히 눈에 보이는 상처나 흉터, 부족하고 못나 보이는 부분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진의를 더 빨리  알 수 있습니다. 흉터가 인간성을 알아내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반대로 우리가 지닌 부나 명성, 아름다움 등 외견상 빛나 보이는 것들 때문에 우리는 늘 타인의 진의를 의심하며 살 수도 있고  반대로 타인의 기만에 더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좋은 것들도 결핍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어요.

한 인간의 결점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장점도 사랑하지만, 장점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결점을 사랑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아래 두 소설을 읽어 보세요.

  

"나는 피치 못할 일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자꾸자꾸 배우고 싶다. 그럼 나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테니까"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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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에 나온 모반에 관한 이야길 시간이 나면 들려드리겠다 했지요.

마침 제가 번역하고 있는 책에도 사람은 누구에게나 맹점이 있다는 아주 지극히 평범한 얘기가 나오네요. 그 맹점도 어떤 의미에선 정신적인 모반이지요. 그 모반을 남이 모르게 속에 감추고 있으면 일견 편리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얼굴이나 보이는 곳에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있지요. 그 얼굴의 모반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얘기를 지금 세 작가의 얘기를 빌어 하려 합니다.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의 주인공은 엘머라는 얼굴에 커다란 모반이 있는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엘머는 나다니엘 호손이 쓴 단편 소설 <모반>을  빌어 자신이 모반을 지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 오스터의 특기인 액자식 소설답게 <환상의 책>에는 모반에 관한 두가지 이야기가 나오는 셈이지요.

 

 

자, <환상의 책>에 따라, 나다니엘 호돈의 <모반>의 이야길 먼저 들려드리지요.

<조지아나는 얼굴 왼쪽에 어린아이 손 크기만한 붉은 손 만한 얼룩, 즉 모반이 있었어요. 그 모반을 빼고는 그녀는 보기드문 완벽한 미인이었고, 스스로도 결혼하기 전까진 그것을 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그녀는 에일머라는 과학자와 결혼 했는데 그는 그녀의 모반을 육체적 아름다움을 망치는 것 뿐만 아니라 내면적 타락의 징후, 조지아나의 영혼에 밴 얼룩, 죄악과 죽음과 부패의 징표로 보았어요. 그런 그의 생각은 자연 조지아나로 하여금 자기 모반에 대해 극도로 싫어하도록 부추겨서 그걸 제거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원했거든요.

에일머는 자기 실험실에서 모반을 제거하는 약을 만들려 애쓰고, 만든 약을 조지아나에게 실험을 하는데그녀는 순순히 그에 따랐어요. 그게 그녀에겐 끔찍한 일이었지만 오직 남편의 사랑을 원했기에 그것을 위한 댓가라면 목숨까지 바칠 각오였어요. 결국은 에일머는 그 실험으로 그녀를 죽이게 됩니다. 그러나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 뺨에서 점이 사라져요. 그 점이 사라짐과 동시에 조지아나는 숨을 거둡니다.

모반이 바로 그여자의 생명이었던 셈입니다. 그 점을 없애면 그 여자도 같이 없어지고 마는.>

 

위는 엘머가 들려준 이야길 제가 요약한 것입니다. 엘머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그대로 보는 법을 배웁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면에 인간성을 간직하고 있지만 나는 얼굴에 그것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게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차이였죠.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숨길 수 없었어요. 사람들이 나를 볼 때마다 그들은 곧바로 내 영혼을 보고 있었던 거예요. 난느 나쁜 여자 아이는 아니었지만-나는 그것을 알고 있어요- 내가 언제까지고 얼굴에 나있는 붉은 반점으로 특징 지워지리라는 것도 알고 잇었죠. 그걸 없애려 해봤자 소용없어요. 그건 내 삶에서 중심적인 사실이었고 그게 없어지기를 바란다는 건 나 자신을 없애달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가요. 나는 절대로 평범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그 이야기를 읽게 된 뒤로는 나에게도 썩 쓸만하기까지 한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나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알 수 있었어요. 그저 그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내 얼굴 왼쪽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하기만 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던 거죠. 그 반점은 인간성을 알아내는 시금석이었어요. 그게 사람들의 영혼의 가치를 쟀던 셈인데, 만일 내가 좀 더 파고 들었으면 사람들의 마음 속을 곧장 꿰뚫어 보고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을 거예요" (<환상의 책>, 열린책들, 황보석역, 159, 160쪽)

 

모반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면에든, 외면에든 혹은 생래적인든 후천적이든.  우리가 인생을 사노라면 여기서의 모반처럼 어쩔 수도 없는, 껴안을 수 없는 모반, 즉 생의 십자가를 지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모반이라 여겨지는 것들, 가난, 육체적 결함, 늙음, 추함, 상처, 좋지 못한 가족.실패...이런 것들이 꼭 불행하거나 불운한 것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름다움도 모반보다 나쁜 것일 수 있습니다. 아래의 찰스 부코스키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죠. 캐시에겐 아름다운 얼굴이 그녀 생애의 모반이었어요.

 

이 이야기가 살아가는 데 힘이 되길 바랍니다. 제게 그러했듯. 폴 오스터를 제가 머리 맡에 두게 된 계기가 된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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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거리의 계관시인'이라 불리는 찰스 부코우스키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모반과 관련해 왜 이 이야기를 실었는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을 보호하기위해 

 스스로 얼굴에 흉터를 만든 아름다운 여인

 캐시의 이야기입니다.

 

 

 

 

마을에서 가장 예쁜 처녀

The Most Beautiful Woman in Town

 

찰스 부코우스키

 

 

막내 캐스는 다섯 자매 중 가장 예뻤다. 마을에서 가장 예쁜 처녀였다. 인디언의 피가 반쯤 흐르는, 드물게 잘 빠지고 나긋나긋한 육체는 뱀처럼 차갑다가도 불처럼 타오르곤 했다. 캐스의 눈빛 또한 그랬다. 캐스는 흔들리며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인간이라는 틀에 도저히 가두어놓을 수 없는 정령(精靈)이었다.

윤기 나는 긴 흑발은 움직일 때마다 넘실대며 마구 출렁거렸다. 캐스는 너무 신이 나 있거나 완전히 풀이 죽어 있거나 했다. 캐스에게 그 중간이란 없었다. 그녀를 막돼먹은 여자라고 말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우둔한 녀석들이 캐스의 진가를 알 리가 없었다. 캐스는 그들을 단지 섹스 기계로 여겼고, 그 녀석들도 캐스가 막돼먹었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캐스는 함께 어울려 춤추고 교태를 부리며 키스도 했지만, 시간이 되면 어느샌가 남자의 손에서 유유히 빠져나와 사라졌다. 두세 번의 예외는 있었지만 말이다.

캐스의 언니들은 아무리 예뻐도 소용없으니 이제는 머리를 쓰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캐스는 머리도 좋고 감수성도 풍부했다. 춤, 노래, 그림과 지점토 공예를 좋아했으며, 누군가가 상처를 받으면 그것이 마음이든 육체든 간에 마치 자기 일처럼 깊이 슬퍼했다. 캐스는 달랐다. 하지만 단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을 뿐이다. 언니들은 자기의 남자들이 캐스에게 매료당하는 것을 질투했고, 남자들을 이용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캐스는 못생긴 남자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것을 좋아했다. 오히려 잘생긴 남자에게는 반감을 느꼈다. "고집도 없고 패기도 없어. 잘난 척하고 요란스레 거드름을 피울 뿐이지 전혀 실속이 없단 말야......" 캐스에게는 무언가 남다른 것이 있었다. 광기라고도 할 만한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캐스의 아버지가 술에 젖어 지내다가 결국 죽어버리자 어머니는 딸들을 버리고 가출했다. 딸들을 맡았던 친척은 결국 캐스와 자매들을 수도원으로 보내고 말았다. 수도원에서의 생활은 비참했다. 특히 캐스에게는 더욱 그랬다. 캐스는 다른 소녀들의 시샘을 사, 거의 모두와 말썽을 일으켰다. 두 번째 싸움에서 캐스의 왼쪽 팔은 면도날 자국으로 엉망이 되었다. 왼쪽 볼에도 평생 없어지지 않을 흉터가 생겼지만, 오히려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할 뿐,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었다.

나는 웨스트 앤드 바에서 수도원을 나온지 며칠 안된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 나이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수도원을 나온 것도 언니들 다음이었다. 그녀는 훌쩍 들어와서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마도 내가 마을에서 가장 못생긴 남자였기 때문인 듯 했다.

"마시겠어?" 내가 물었다.

"좋아요."

아무런 내용이 없는 대화였다고 생각한다. 캐스의 분위기에 젖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녀가 나를 이야기 상대로 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부담은 없었다. 캐스도 술을 좋아하는지 꽤나 마셨다. 아직도 어린 티가 가시지 않았는데도 가게에서는 캐스에게 술을 내주었다. 아마 신분증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내 옆에 앉았기 때문에 나는 우쭐해졌다. 그녀는 마을에서 최고였을 뿐만 아니라 내가 지금껏 만난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예뻤다. 나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고 가볍게 입술을 댔다.

"나 어때요. 예뻐요?"

"물론 당신은 예뻐.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

"모두들 내가 예쁘다는 것을 싫어해요. 정말 당신은 내가 예쁘다고 생각해요?"

"예쁘다는 말은 맞지 않아. 글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캐스는 핸드백에 손을 넣었다. 손수건을 찾나 보다 했는데 가늘고 긴 모자핀을 꺼냈다. 말릴 새도 없이 그 핀으로 자신의 작은 코를 찔러 관통시켰다. 나는 징그러워서 토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웃었다.

"자, 이래도 내가 예뻐요? 어때요, 나?"

나는 모자핀을 잡아 빼고, 터져 나오는 피를 손수건으로 눌러줬다. 바텐더를 포함한 몇 사람이 보고 있었다. 바텐더가 다가왔다.

"이봐, 한번만 더 그런 짓을 하면 쫓아낼 거야. 그런 미친 짓은 이제 그만해."

"쓸데없는 참견 말아요."

"바보 같은 짓 좀 시키지 말아요." 바텐더가 내게 말했다.

"이 아가씨는 괜찮소."

"내 코란 말야! 내 코 가지고 내가 어떻게 하든 내 맘 아냐!" 캐스가 대꾸했다.

"아니야, 내 마음이 아파." 내가 말했다.

"내가 내 코에 핀을 찌르는데 당신 마음이 아프다구요?"

"그래, 맞아. 거짓말이 아냐."

"알았어요. 이제 그러지 않을 테니까 기분 풀어요."

그녀는 손수건을 코에 댄 채 웃으며 키스를 했다. 가게가 문을 닫자 내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면서 아무 이야기나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상냥하고 이해심이 많다는 것을 안 것도 이 때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자신을 열어갔다. 동시에 그것은 황폐한 미지의 세계 저 너머로 그녀가 날아가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분열증, 아름다운 영혼의 분열. 정녕 누군가가, 무언가가 그녀를 영원히 파멸시키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니길 기원했다.

침대로 들어가 불을 끄자 캐스가 물었다.

"언제 할 거에요? 지금? 아니면 아침?"

"아침." 나는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다음날 아침, 나는 커피를 끓여 아직 침대 속에 있는 그녀에게로 가져갔다.

그녀는 웃었다. "밤에 그냥 잔 남자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런가.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아뇨. 지금 하고 싶어요." 샤워하고 올게요. 기다려요."

욕실에서 나온 캐스는 눈부셨다. 긴 검은머리를 찰랑거리고, 눈동자도 입술도 그녀의 모든 것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그녀는 아주 얌전히 침대로 가서 누웠다.

"어서 이리 와요."

나는 침대로 들어갔다.

그녀의 키스는 가냘프고도 뜨거웠다. 나는 난폭하게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그녀에게 올라탔다. 그곳은 뜨거웠으며 꽉 조였다. 나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끝까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름은?" 내가 물었다.

"말하지 않으면 안 할 건가요?" 그녀가 반문했다.

나는 웃으며 동작에 힘을 더했다. 일을 끝낸 뒤 옷을 입은 그녀를 어젯밤 그 술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러나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2시까지 잔 다음에 일어나 신문을 펼쳐 들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자 그녀가 커다란 잎사귀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베고니아 잎이었다.

"욕조 안에 있을 줄 알았어요. 이거라면 가릴 수 있겠네요. 이 야만인."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베고니아 잎을 내 알몸 위로 던졌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지?"

"다 안다구요."

그 후로 거의 매일, 내가 욕조 안에 있을 때마다 그녀가 나타났다. 목욕하는 시간이 매일 달랐는데도 빗나가는 일은 좀처럼 없었고 항상 베고니아 잎을 들고 왔다.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한두 번 한밤중에 전화가 걸려 왔고, 나는 그때마다 만취한 녀석들과의 싸움 끝에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 그녀를 데리러 갔다.

"비열한 자식들! 겨우 그 정도 인심에 내가 자기 것이라도 될 줄 알았나 보지."

"그냥 공짜는 없다는 법을 알아야지."

"하지만 내 몸이 아니라, 나한테 반한 줄 알았단 말이에요."

"나는 당신과 당신의 몸 양쪽 모두에 반했어. 하지만 남자들 대부분은 당신의 몸밖에 보지 않는다구."

나는 마을을 떠나 6개월 동안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캐스를 잊진 않았다. 흔히 있는 말다툼 때문에 훌쩍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돌아오면서 이제는 그녀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웨스트 앤드 바에서 30분 정도 앉아 있자 그녀가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뭐에요. 돌아왔잖아요.'

나는 그녀를 위해 한 잔 주문했다. 다시 보니 목이 높이 올라온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양쪽 눈 밑에 작은 유리 구슬이 달린 핀을 꽂고 있었다. 유리 구슬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침이 얼굴에 박혀 있던 것이다.

"이런! 이 예쁜 얼굴에 왜 또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거야."

"유행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미쳤군."

"외로웠어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나?"

"아무도. 당신 밖에. 그런데, 나 돈 벌고 있어요. 한 번에 십 달러. 당신은 물론 공짜지만요."

"핀 좀 빼."

"싫어요. 유행이에요."

"마음이 너무 괴로워."

"정말?"

"정말이라니, 당연하잖아."

캐스는 천천히 핀을 뽑더니 가방에 넣었다.

"왜 자신이 예쁜 걸 싫어하는 거지? 왜 가만히 놔두지 않는 거지?" 내가 물었다.

"사람들이 겉모습밖에 보지 않기 때문이에요. 예쁘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어차피 사라져버리는 거에요. 못생긴 편이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를 거에요. 만약 누군가 당신을 좋아한다면 그건 당신의 외모가 아닌 다른 이유란 걸 금방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알겠어. 나는 운이 좋군."

"당신은 못생기지 않았어요. 남들이 그렇게 말할 뿐이지, 너무나 따뜻한 얼굴이에요."

"고맙군."

한 잔씩 더 주문했다.

"지금은 무슨 일을 하죠?" 그녀가 물었다.

"아무것도.... 무얼 해도 잘 안돼. 무일푼이야."

"저도 그래요. 당신도 여자였다면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잘 모르는 녀석과 계속 살을 부딪히며 말이지. 나는 못해. 질색이야."

"맞아요. 지겨워요. 모든 것이 지겨워요."

우리는 나란히 가게에서 나왔다. 남자들이 넋을 잃고 캐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예쁘다.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아름다웠다.

방에 도착하자 와인을 마시며 잡담하기 시작했다. 캐스라면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또 이야기를 하고 대화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그 동안 하지 못했던 모든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순간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부분에선 웃었다. 캐스, 그녀만의 웃음으로 말이다. 타오를 듯한 환희, 바로 그것이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키스를 하고, 그러다가 서로 껴안았고 참을 수 없게 되자 침대로 향했다. 캐스가 목이 높은 드레스를 벗는 순간, 칼로 목을 찌른 듯한 끔찍한 흉터가 눈에 띄었다. 커다랗고 깊은 상처였다.

"이런 멍청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느 날 밤, 깨진 유리병으로 그었어요. 이제 내가 싫어졌어요? 그래도 아직 예뻐요?"

나는 그녀를 침대에 쓰러뜨리며 키스했다. 그녀가 몸을 빼며 깔깔거렸다.

"십 달러를 먼저 받고 나서 벗는걸요. 그러면 모두 할 마음이 없어지죠. 십 달러는 내고 말이에요. 정말 유쾌해요."

"손들었어. 대단한 여자야. 사랑해 캐스, 부탁이니까 자신을 죽이는 일 따윈 제발 그만해. 너처럼 좋은 여자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우리는 포옹했다. 캐스는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내 등 뒤로 드리워진 그녀의 검은머리는 죽음의 깃발 같았다. 우리는 비애에 찬 섹스를 조용히 즐겼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캐스가 먼저 일어나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그녀의 행복을 함께 음미했다. 이윽고 그녀가 다가와 나를 흔들었다. "일어나요! 찬물로 얼굴이랑 그곳을 씻고 오세요. 진수성찬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 날, 그녀와 함께 해안으로 갔다. 평일인데다 아직 여름이 되지 않아 황량한 느낌이었지만 실로 상쾌했다. 모래 위에 난 풀 더미 위에서는 거적을 걸친 부랑자들이 자고 있었다. 갈매기 떼가 무심히 상공을 선회했다. 칠팔십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들이 벤치에 앉아 땅을 판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남편들이 일생 동안 악착같이 벌어서 마련한 땅일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온화하게 감싸는 대기 아래 천천히 걸어다니다 풀 위에서 뒹굴었다. 서로 말이 없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샌드위치와 포테이토칩, 그리고 음료수를 사 들고 모래 밭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캐스를 안고 한 시간 정도 잤다. 어쩐지 이렇게 하는 것이 그녀의 육체를 갖는 것보다 좋았다. 부드럽게 젖어들어 하나가 되었다. 방으로 돌아온 후, 이번에는 내가 식사 준비를 했다. 식사 후, 함께 지내자고 말했다. 캐스는 한참동안 긴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만두겠어요."

나는 술집에 그녀를 데려다주고 술도 한 잔 시켜준 뒤, 그곳에서 나왔다. 다음날, 포장하는 일자리를 얻게 되어 주말까지 공장에서 일했다. 온몸이 녹초가 돼서 움직이고 싶진 않았지만, 금요일 밤에는 웨스트 앤드 바에 갔다. 캐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이 흘렀다. 어지간히 취기가 돌 무렵, 바텐더가 말을 걸었다.

"정말 안됐어요, 그 아가씨."

"무슨 소리요?"

"미안해요. 몰랐군요."

"무슨 일이오?"

"자살했어요. 어제 장례를 치뤘어요."

"장례라고?" 나는 되물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없어지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장례식은 언니들이 했어요."

"자살이라니, 어떻게 된 거죠?"

"스스로 목을 베었어요."

"......, 한잔 더 주시오."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나는 계속 마셔댔다. 다섯 자매 중 가장, 아니 마을에서도 가장 예뻤던 캐스. 겨우 운전해서 내 방까지 돌아오는 동안, 나는 계속 한 가지 생각에 몰두했다. "그만두겠어요." 라는 말을 무시하고, 함께 지내자고 끝까지 우겼어야 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 움직임 하나 하나에서 불안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심하고 어리석었다.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 지나가는 개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와인을 찾아내어 다시 퍼붓듯이 마셨다. 캐스, 마을에서 가장 예쁜 처녀 캐스는 스물에 죽었다.

자동차 경적을 울리는 녀석이 있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나는 와인 병을 내려놓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새끼야, 조용히 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거야."

밤은 점차 어둠을 더해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그 첫번째
찰스 부코우스키 지음, 김철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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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의 경제학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파리코뮌에 참여하며 프랑스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이끌었던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는 노동이 생존을 위한 의무로서가 아니라 '게으름의 쾌락을 위한 양념'으로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그의 논문 <게으를 수 있는 권리>(1880)에서 전개했다. 그는 산업시대 이전의 노동을 돌아보면서 산업시대의 노동은 신성하지도 고귀하지도 않은 것으로서 결코 숭배의 대상이 아니며 ,  오히려 노동은 ‘이제까지 인류를 내몰아온 채찍 중 가장 가공스러운 회초리’라면서, 하루 세 시간이상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창했다. 반면에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세뇌의  전도사 역할을 했던  같은 시대 정치 개혁가 새무얼 스마일즈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그 유명한 <자조론>, <인격론>, <검약론>, <의무론>을 펴내 근면을 인격을 재단하는 가치로 승격시키며 노동의 신성성을 강조했다.  스마일즈의 주장은 버트란트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일찌기 간파했듯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노동자들 역시 자신의 노동력을 신성하게 여기면서 노동의 권리와 노동할 권리를 주장했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발흥을 돕고 스스로를 속박하고 자멸시키는 역할을 했다.  근대산업사회와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가장 큰 동반자는 마르크스주의였다. 둘은 근대산업사회에서 겉으로는 적대적으로 보이지만 노동자의 노동력에 기생함으로써 함께 움직이는 쌍륜마차처럼 보인다.  폴 라파르그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쓴 것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노동에서 소외시키고 자본주의의 공범 역할을 하는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각성시키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이처럼 경제학과 문화인류학의 관점에서 노동과 생산을 기본적인 가치질서로 삼고 있는 세계관에 의의를 제기하고 있는 견해를 이어령의 <디지로그>를 읽다가 거기 소개된 마셜 샬린스의 저서에서 발견했다. 샬린스는 우리는 왜 열심히 일하면서도 궁핍할 수 밖에 없는가를 설명하고 그 대안을 채집문화적 삶에로의 회귀에서 발견한다. 그는 산업사회의 근면과 생산성의 확대가 오히려 인간에게 노동시간만 늘렸을 뿐이라면서 인간에게 유용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못했음을  <석기시대의 경제학>에서 예증하고 있다.

그의 견해를 떠나 생태학적으로도 생산성이 확대가 가져온 환경파괴가 고스란히 인류에게 돌아오는 결과를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다.

 

*살린즈의 책을 구하지 못했으므로 이어령의 <디지로그>에 소개된 한 부분을 싣는다. 이어령 선생의 디지탈과 아날로그의 융합을 한국의 고유문화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여기서 생략해 선생의 글을 토막낸 것에 죄송함을 느낀다.  한가지 첨언하면 <디지로그>란 책에서의 그의 해박한 식견을 논외로 한다면, 분석의 도구로 삼았겠지만 한국문화의 원형에서 디지로그의 가능성을 찾은 것은 약간 도식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의 명저 <축소지향의 일본인>처럼. 그러나 선생의 책은 어느 것이든 내 손에 오래 머물러 있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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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랫글은  이어령, <디지로그>, 97쪽 `102쪽에서 <석기시대의 경제학>, <주 5일제 근무> 장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석기시대의 경제학>:

 

<이렇게  한국 문화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는 채집 문화가 이제는 서양에서도 21세기 미래 문화의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가면 채집형 나물 문화야 말로 현대문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탈출구라고 주장하는 문명론자들과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한때 화제를 몰고 온 마셜 살린스의 명저 <석기시대의 경제학>이다.

 

자연생태계의 일원으로 살았던 석기시대의 생활양식과 경제모델을 연구한 살린스의 말은 우리가 잊었던 한국의 나물문화를 다시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왜 조선조의 선비들이 '청빈'을 예찬하고 나물먹고 물을 마시고 팔베개를 하고 살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는지를 경제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살린스는 인간이 풍요에 이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증대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생산성을 계속  향상시키는 것과 반대로 욕구 자체를 최소화해 적은 물질을 가지고도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수렵=채집시대'의 나물 문화는 윤택한 삶과 번영을 객관적인 물질의 풍요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무욕무결(無慾無缺, want not, lack not)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에서 근면과 생산성은 오히려 제한된 숲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나쁜 행위로 보인다.>

 

-------중략----

 

<20세기를 '잠을 도둑맞은 시대'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 '24시간 사회'라고 명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샬린스 (Marshall Sahlins, 1930~ 문화인류학자)의 분석으로 보면 채집민들의 수면량은 어떤 문명시대보다 긴 거의 12시간이었다.

 

노동시간은 4,5 시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러고서도 남자 한 명이 4~5명을 부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구의 5분의 1이상이 나머지 사람들의 식량을 대기 위해 농업에 종사해야만 했던 제2차 세계대전 때의 프랑스인들보다도 훨씬 효율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주5일제의 경제모델>: 

 

<또 다른 통계를 보면 호주의 원주민들은 미국이 한 사람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75분의 1에서 1백분의 1로 주민을 부양한다고 한다. 고정 생산량의 단위당 에너지 비율로 보면 수렵채집민은 우리보다 100배나 효율이 높다는 계산이 나온다.

 

농업경제학자 보스라프의 연구를 보면 지난 세기의 90년 동안 노동자 1인당 생산량은 8.4배가 늘었고 1헥타르당 생산성은 3.5배나 증대되었다고 한다. 노동생산성과 토지 생산성의 증가율은 740%와 240%에 달한다.

 

그러나 이러한 눈부신 생산성 뒤에는 대량의 화학비료와 농약, 트랙터와 같은 농기계, 그리고 그것을 움직이는 화석연료가 있다. 그런 것들에 든 자금과 노동력을 생각하면 농업생산의 진보는 속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다. 기능은 발전하고 효율은 후퇴한 것이 20세기 산업의 아이러니다. 그러니 21세기의 목표는 자연히 기능보다 효율을 높이는 쪽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고,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구석기 시대의 생활 리듬을 꿈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 주5일제를 도입하기 위해 턱걸이를 하고 있는 우리들의 대선배들이 거기 있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인류가 시간에 쫒기고 중노동을 해야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농업혁명을 이룬 신석기시대 이후의 일이다. 무기 중노동의 형을 복역하고 있는 것은 야만스러운 구석기 시대의 채집민들이 아니라 바로 생산과 소비의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자신이다.

 

지금 인류의 3분의 1 또는 거의 태반이 매일 밤 굶주린 배를 틀어쥐고 잠자리에 든다. 살린스는 전대미문의 '굶주림의 세기', 그것이 바로 현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첨단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 시대에 기아가 하나의 제도가 되었다고 개탄한다. 그러니까 이 문명은 나그네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념 목적지는 두 발 뒤로 물러서는 옛 신화의 그 이상한 땅과도 같다는 것이다.

-----후략---->

 

(2008.03.0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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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ens Peter Jacobsen
  •  

  • Jens Peter Jacobsen
  • 아마존: 펭귄판 <Niels-Lyhne>

     

    http://www.amazon.com/Niels-Lyhne-Penguin-Classics-Jacobsen/dp/0143039814#reader_0143039814

     

    볼프강 레프만의 <릴케>(책세상, 김재혁 옮김)를 읽다가

    덴마크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옌스 페터 야콥슨에 대해 릴케가 평한 글을 만났다.

    릴케가 파울라에게 야콥슨의 책 <마리 그루베 부인>을 선물하면서

    그 앞 장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야콥슨은 고독한 시인, 차가운 달의 시인이었다."

     

    창백한 달의 이미지를 노래했던 보들레르,

    달을 '고독의 화로'라 불렀던 懷月 박영희...

     

    릴케가 '젊은 시인에게 쓴 편지'에서 꼭 읽기를 권했던 시인 야콥슨,

    <말테의 수기>에 하나의 전범을 제공했던-

    개인의 고독과 불안이 가진 자기성장적 요소를 잘 그려냈던- 그의 책

    <닐스 뤼네>의 한 페이지를 소개한다.

     

    ------------------------------------------------------

     

     

    http://www.ibiblio.org/eldritch/jpj/niels_lyhne.htm

     

    23페이지

     

    The first year passed very much as their courtship; but when their wedded life had lost its newness, Lyhne could no longer conceal from himself that he wearied of always seeking new expressions for his love. He was tired of donning the plumage of romance and eternally spreading his wings to fly through all the heavens of sentiment and all the abysses of thought. He longed to settle peacefully on his own quiet perch and drowse, with his tired head under the soft, feathery shelter of a wing. He had never conceived of love as an ever-wakeful, restless flame, casting its strong, flickering light into every nook and corner of existence, making everything seem fantastically large and strange. Love to him was more like the quiet glow of embers on their bed of ashes, spreading a gentle warmth, while the faint dusk wraps all distant things in forgetfulness and makes the near seem nearer and more intimate.

     

    구애로 바쳐진 첫해를 보내고 결혼생활이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때, 뤼네는  항상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새로운 말을 찾아내야 하는 것에 지쳐버렸다. 그는 로망스의 깃털을 달고 영원히 날개를 활짝 펴고 감상의 하늘과  생각의 심연 곳곳을 다  날아다녀야 하는 일에 싫증이 났다. 그는 자기의 조용한

    횃대와 둥지에 정착해, 지친 머리를 날개의 부드럽고 솜털같은 은신처 아래에 두기를 갈망했다. 뤼네는 결코 사랑을 영원히 꺼지지않고 너울대는 불꽃, 즉 존재의 구석구석을 비추며 모든 것을 환상적으로 확대하고 기이하게 만드는 그런 불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사랑은, 아궁이에서 타다 남은 장작처럼 조용히 타면서 부드러운 따뜻함을 자아내는 불빛같은 것이었다. 그 한 쪽에선 희미한 황혼의 빛이 멀리있는 사물은 망각속에서 다 감싸안고, 가까이 있는 사물은 더 가깝고 더 친근하게 만들고 있는!.

     

    --------------------------------------------

    *

  • Translated by Hanna Astrup Larsen (1919)

  •  

    “He was weary of himself, of cold ideas and brain dreams. Life a poem? Not when you went about forever poetizing about your own life instead of living it. How innocuous it all was, and empty, empty, empty! This chasing after yourself, craftily observing your own tracks–in a circle, of course. This sham diving into the stream of life while all the time you sat angling after yourself, fishing yourself up in one curious disguise or another! If he could only be overwhelmed by something–life, love, passion–so that he could no longer shape it into poems, but had to let it shape him!”

    "그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죽은 생각과 몽상에 싫증났다. 삶이 시가 될 수 있는가? 당신이 생생한 삶을 사는 대신에 자신의 삶을 불멸의 시로 만들어버린다면, 삶은 시가 될 수 없다. 삶 전체가 맛이없고, 텅비고 공허할 뿐이다! 자신의 꽁무니만을 좇고 체바퀴도는 자신의 삶만을 교활하게 관찰하는 것. 이것은 항상 앵글을 자신에게 맞추고 앉아있으면서 삶의 강물에 뛰어드는 체하는 것이며, 이런 저런 위장을 하고 자신을 낚아올리는 짓이다. 단지 어떤 것-삶, 사랑, 열정-에 압도되어버린 사람은 그것을 더이상 시로 만들 수 없다....

    ― Jens Peter Jacobsen, Niels Lyhne

     

     translated by Hanna Astrup Larsen (1919) (원문 무료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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