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시대의 경제학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파리코뮌에 참여하며 프랑스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이끌었던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는 노동이 생존을 위한 의무로서가 아니라 '게으름의 쾌락을 위한 양념'으로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그의 논문 <게으를 수 있는 권리>(1880)에서 전개했다. 그는 산업시대 이전의 노동을 돌아보면서 산업시대의 노동은 신성하지도 고귀하지도 않은 것으로서 결코 숭배의 대상이 아니며 , 오히려 노동은 ‘이제까지 인류를 내몰아온 채찍 중 가장 가공스러운 회초리’라면서, 하루 세 시간이상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창했다. 반면에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세뇌의 전도사 역할을 했던 같은 시대 정치 개혁가 새무얼 스마일즈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그 유명한 <자조론>, <인격론>, <검약론>, <의무론>을 펴내 근면을 인격을 재단하는 가치로 승격시키며 노동의 신성성을 강조했다. 스마일즈의 주장은 버트란트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일찌기 간파했듯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노동자들 역시 자신의 노동력을 신성하게 여기면서 노동의 권리와 노동할 권리를 주장했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발흥을 돕고 스스로를 속박하고 자멸시키는 역할을 했다. 근대산업사회와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가장 큰 동반자는 마르크스주의였다. 둘은 근대산업사회에서 겉으로는 적대적으로 보이지만 노동자의 노동력에 기생함으로써 함께 움직이는 쌍륜마차처럼 보인다. 폴 라파르그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쓴 것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노동에서 소외시키고 자본주의의 공범 역할을 하는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각성시키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이처럼 경제학과 문화인류학의 관점에서 노동과 생산을 기본적인 가치질서로 삼고 있는 세계관에 의의를 제기하고 있는 견해를 이어령의 <디지로그>를 읽다가 거기 소개된 마셜 샬린스의 저서에서 발견했다. 샬린스는 우리는 왜 열심히 일하면서도 궁핍할 수 밖에 없는가를 설명하고 그 대안을 채집문화적 삶에로의 회귀에서 발견한다. 그는 산업사회의 근면과 생산성의 확대가 오히려 인간에게 노동시간만 늘렸을 뿐이라면서 인간에게 유용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못했음을 <석기시대의 경제학>에서 예증하고 있다.
그의 견해를 떠나 생태학적으로도 생산성이 확대가 가져온 환경파괴가 고스란히 인류에게 돌아오는 결과를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다.
*살린즈의 책을 구하지 못했으므로 이어령의 <디지로그>에 소개된 한 부분을 싣는다. 이어령 선생의 디지탈과 아날로그의 융합을 한국의 고유문화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여기서 생략해 선생의 글을 토막낸 것에 죄송함을 느낀다. 한가지 첨언하면 <디지로그>란 책에서의 그의 해박한 식견을 논외로 한다면, 분석의 도구로 삼았겠지만 한국문화의 원형에서 디지로그의 가능성을 찾은 것은 약간 도식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의 명저 <축소지향의 일본인>처럼. 그러나 선생의 책은 어느 것이든 내 손에 오래 머물러 있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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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랫글은 이어령, <디지로그>, 97쪽 `102쪽에서 <석기시대의 경제학>, <주 5일제 근무> 장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석기시대의 경제학>:
<이렇게 한국 문화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는 채집 문화가 이제는 서양에서도 21세기 미래 문화의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가면 채집형 나물 문화야 말로 현대문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탈출구라고 주장하는 문명론자들과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한때 화제를 몰고 온 마셜 살린스의 명저 <석기시대의 경제학>이다.
자연생태계의 일원으로 살았던 석기시대의 생활양식과 경제모델을 연구한 살린스의 말은 우리가 잊었던 한국의 나물문화를 다시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왜 조선조의 선비들이 '청빈'을 예찬하고 나물먹고 물을 마시고 팔베개를 하고 살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는지를 경제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살린스는 인간이 풍요에 이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증대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생산성을 계속 향상시키는 것과 반대로 욕구 자체를 최소화해 적은 물질을 가지고도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수렵=채집시대'의 나물 문화는 윤택한 삶과 번영을 객관적인 물질의 풍요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무욕무결(無慾無缺, want not, lack not)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에서 근면과 생산성은 오히려 제한된 숲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나쁜 행위로 보인다.>
-------중략----
<20세기를 '잠을 도둑맞은 시대'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 '24시간 사회'라고 명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샬린스 (Marshall Sahlins, 1930~ 문화인류학자)의 분석으로 보면 채집민들의 수면량은 어떤 문명시대보다 긴 거의 12시간이었다.
노동시간은 4,5 시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러고서도 남자 한 명이 4~5명을 부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구의 5분의 1이상이 나머지 사람들의 식량을 대기 위해 농업에 종사해야만 했던 제2차 세계대전 때의 프랑스인들보다도 훨씬 효율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주5일제의 경제모델>:
<또 다른 통계를 보면 호주의 원주민들은 미국이 한 사람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75분의 1에서 1백분의 1로 주민을 부양한다고 한다. 고정 생산량의 단위당 에너지 비율로 보면 수렵채집민은 우리보다 100배나 효율이 높다는 계산이 나온다.
농업경제학자 보스라프의 연구를 보면 지난 세기의 90년 동안 노동자 1인당 생산량은 8.4배가 늘었고 1헥타르당 생산성은 3.5배나 증대되었다고 한다. 노동생산성과 토지 생산성의 증가율은 740%와 240%에 달한다.
그러나 이러한 눈부신 생산성 뒤에는 대량의 화학비료와 농약, 트랙터와 같은 농기계, 그리고 그것을 움직이는 화석연료가 있다. 그런 것들에 든 자금과 노동력을 생각하면 농업생산의 진보는 속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다. 기능은 발전하고 효율은 후퇴한 것이 20세기 산업의 아이러니다. 그러니 21세기의 목표는 자연히 기능보다 효율을 높이는 쪽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고,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구석기 시대의 생활 리듬을 꿈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 주5일제를 도입하기 위해 턱걸이를 하고 있는 우리들의 대선배들이 거기 있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인류가 시간에 쫒기고 중노동을 해야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농업혁명을 이룬 신석기시대 이후의 일이다. 무기 중노동의 형을 복역하고 있는 것은 야만스러운 구석기 시대의 채집민들이 아니라 바로 생산과 소비의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자신이다.
지금 인류의 3분의 1 또는 거의 태반이 매일 밤 굶주린 배를 틀어쥐고 잠자리에 든다. 살린스는 전대미문의 '굶주림의 세기', 그것이 바로 현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첨단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 시대에 기아가 하나의 제도가 되었다고 개탄한다. 그러니까 이 문명은 나그네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념 목적지는 두 발 뒤로 물러서는 옛 신화의 그 이상한 땅과도 같다는 것이다.
-----후략---->
(2008.03.02 2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