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30
한 해의 연말을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작의 현악사중주와 이병주의 책들로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 나온 한길사전집에 수록되지 않은 <매화나무의 인과>와 <쥘부채> <어느 황제의 초상> 등과 <동서양고전탐사>이라는 일종의 독서노트를 읽고 있어요. <동서양....>, 이 책은 이전에 읽은 <허망과 진실>을 생각의 나무에서 새로 펴낸 것이지요. 똑같은 책이 이십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어도 같은 울림을 갖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동안의 제 독서와 사고의 빈함함을 감안하더라도 이병주의 혜안이 뛰어났다는 것에 충분히 감탄하고 있습니다. 루쉰과 쉬광핑이야기만 해도 재작년에 겨우 번역돼 독자들 품에 온 것인데 이병주는 그 원본인 <兩地書>를 이미 젊은 시절에 읽고 1979년 <허망과 진실>에서 소개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요즘에야 비로소 서점에서 접해 읽고 있는 쉬광핑의 저서들 또한 이병주는 1968년에 여러번 읽었지요. 루쉰의 책을 읽기위해 일부러 백화문을 배웠다는 대목에서 저는 잠시 아연해졌습니다. 책을 읽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에서 언어를 배우는 사람. 번역서가 많지 않던 시절의 딜레탕트의 모습이지요. 그의 백과전서적인 지식뒤에는 그런 노력이 숨어 있었어요. 덩달아 젊은 날 스무해도 전에 이병주를 알면서부터 그가 읽은 책들을 권위있는 추천서로 생각하고 구해 읽으려 했던 제가 떠오르네요. 애써도 늘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런 초상의 대상이 제게 있다는 것이 행복할 따름입니다.
이병주를 평가할 때 박람강기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가 역사의 기록자였다는 점이 외려 큰 주목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으로서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그에게는 주변의 역사적 진실을 목격할 기회를 자연히 많이 주어졌고 그는 그것을 기록해야할 사명을 느꼈을 거예요. 그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말못한 진실을 대변할 입을 그는 문학을 통해 발견한 것이지요. 입에 절박한 말이 고여야 글이 되는 법이라 생각합니다. 좌우라는 정치적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인간의 잣대로서, 이념의 구호 속에 명멸해간 수많은 이름없는 지식인들을 조명함으로써 역사라는 커다란 봉우리의 진실을 캐내고 싶었을 겁니다. 정치나 역사는 성긴 그물이라 그 속에 숨어든 자잘한 진실들은 다 새어나가기 마련이고, 이 자잘한 것들을 붙여 조각그림을 더해야 전체가 그려지는 것인데, 이병주는 어느 역사가 이상으로 이 작업을 실증적으로 해냈다는 생각입니다. 그의 소설이 단순히 소설에 그치지 않고 사색과 증거, 정확한 실증적 기록을 곁들인 실록의 의미를 지녔다는 것을 읽은 분들은 아실거예요. 소설로 쓴 역사 말입니다. 그것은 이병주 자신이 역사의 기록자가 되겠다는 자세로 글을 썼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단편소설 <어느 황제의 초상>에 남긴 이병주의 각오를 들어 보지요.
소설 속에서 이선생은 어떤 각오로 작가가 되었느냐고 묻는 노정필의 물음에 이병주는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목격자 입니다. 목격자로서 증언만을 해야죠. 말하자면 나는 그 증언을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자처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기록할 수 없는 일, 그 일을 위해서 어던 섭리의 작용이 나를 감옥에 보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을 문학으로 가능케 하자면 詩心 혹은 시정이 기록의 밑바닥에 지하수처럼 숨어 있어야 설득력과 감정이입이 함께 생길 수 있다고 이병주는 생각합니다.
문학을 통한 기록의 추구. 지금 소개하는 <쥘부채>도 그런 이병주의 의도가 배인 소설이지 싶습니다. 집념어린 사랑을 소개하려는 것만은 아니지요.
자, 이제 <쥘부채>의 세계로 들어가 볼게요.
2006.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