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고장나는 바람에 얼마전 서점에서 사둔 안톤 체홉의 단편집을 읽었다. 사실 까마득한 학창시절에 <벚꽃동산>과 <귀여운 여인>을 읽은 게 전부여서 궁금하기도 한 작가였다. 그에겐 자신의 소설 곳곳에 자조적으로 '제법 잘 쓰지만 톨스토이나 뚜르게네프보다는 못하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장편의 호흡을 가지지 못해서 그렇지 삶과 세상을 보는 눈은 그들 못지 않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시가 짧은 언어 속에 하나의 의견을 집어넣듯 단편 소설 작가는 그런 촌철살인의 기지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는 과연 단편소설의 대가다웠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이야기 하려다 그 앞 편에 있는 <다락방이 있는 집(The house with the Mezzanine)>에 인상적인 작가의 견해가 있어서 그 쪽으로 선회했다. 얼마전 본 신영복 선생이 쓴 '진정한 연민은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란 글귀에서 느꼈던 심사와 평상시 교회나 이웃, 그리고 나 자신이 '자선'이란 명목으로 행하는 행위에서 가졌던 회의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이 있어서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시골의 친구 장원에 머물던 풍경화가인 주인공이 이웃 장원, 볼차니코프가의 두 자매를 방문하던 시절의 얘기다. 큰 딸 리사는 이웃에 봉사하기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서 농민교육, 보건소 건설, 계몽 등을 활발히 하는 활동적인 처녀였는데, 신념이 강한 만큼 독선적인 면이 있었다. 자기의 눈 밖에 것들은 수용하지 못하고 주위사람에게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강요하고 간섭하였다. 반면에 둘째 미슈시는 책을 읽고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는 따뜻하고 매력적인 처녀였다. 풍경화가는 이 미슈시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리다가 그와 토론한 끝에 그를 위험인물로 낙인찍고 동생을 피신시켜 버려 그들의 풋사랑은 불발되어 가슴 속에 봉인된다.
리다는 그 신념에 자신의 삶을 가둠으로써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은 되어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지 못했다. 인간은 지기와 닮은 나약한 존재를 좋아하는 법이다.
체홉은 그의 단편 <결투>에서도 그런 주제를 언뜻 비춘 적이 있다. 신념가들이 바르고 옳고 강하고 도덕적인 것들을 내세우며 인간 세상에 해로운 것들을 일소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대해, 술, 여자, 나약함, 부도덕, 우유부단, 게으름, 패배자, 잉여적인 것들이 인간이 서로를 연민하며 살게 하는 밑걸음이 된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인간은 슬픔과 고통으로 연대하는 것이며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다음은 화가와 큰 딸 리다의 봉사활동에 관한 토론이다. 리다는 어려운 처지의 이웃과 농민들을 위해 문맹퇴치를 위한 학교설립, 보건소 건설, 근면등 생활태도 교육 등을 골자로 하는 교양인의 의무라 여기고 풍경화가에게 동참을 강요한다. 그는 그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무엇 하나를 주지 않으면서 그저 그들의 생활을 간섭하고 더욱 더 욕구를 증대시켜 더 많이 일할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할 뿐이라 하였다. 함께 비를 맞지 않으면서 비를 내리게 하고 그 손에 우산을 주어주는 방식은 부당하다는 날카로운 지적이 숨어있다. 사실 자선이나 봉사활동이 결국은 체제의 안정에 기여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장치조차 없는 체제는 무너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영리하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자본주의체제를 지탱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그런 장치는 구비해야 스스로의 발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 중요한 것은 안나가 산욕열로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러한 안나나 마블라나 페라게야들이 모두 아침 일찍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구부려 일하고 힘겨운 노동때문에 병들고, 평생 �주리고 병들어 지낼 자식들 생각에 두려워 덜고, 평생 죽음과 병을 염려하고, 평생 의사 신세를 지고,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데도 체력을 소모하여 늙어 버려서, 그 결과 냄새나는 더러운 곳에서 진흙에 파묻혀 죽어간다는 사실이지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성장하면 또 그들의 어머니와 똑같은 길을 걷게 되고, 이렇게 해서 몇 백년이 지나도 몇십억이라는 인간이 동물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그것도 겨우 빵 한조각 때문에 말입니다. 그들이 느끼는 공포는 결코 없어지지 않앗어요. 이런 상황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그들이 영혼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굶주림과 추위와 동물적인 공포와 끝없는 노동이 마치 눈사태처럼 줄줄이 엄습해 와서 정신적인 활동에의 길을 완전히 막아 버린 것입니다. 더우기 정신적인 활동이야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것, 인간에게 있어서 살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니겟습니까? 당신들은 병원과 학교를 통해 그들을 구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사슬을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더 노예상태로 몰아넣을 뿐이오. 왜냐하면 당신은 그들의 생활 속에 새로운 편견을 가지고 가서는 그들의 욕구를 증대시키고 있으니가요. 자치회에 피부질환치료고약과 팜플렛 대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전보다 더 많이 허리굽혀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것들은 굳이 말하지 않는다 하여도 말입니다."
'농민교육, 쓸데없는 교훈이나 재담이 적혀있는 팜플렛, 보건소, 그런 것으로 문맹이나 사망률을 줄일 순 없는 일입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을 괴로운 육체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일입니다. 그들의 멍에를 풀어주어 잠시라도 쉬게 해주는 일입니다....중략>
언뜻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관도 보인다. 이 단편에서 이런 토론이 백미이긴 하지만 미완으로 끝난 사랑을 세월이 흐른 후 더듬는 주인공의 마지막 몇 마디를 덧 붙이지 않을 수 없다.작가 박완서가 그리고 시인 김용택이 떠올리던 그 남자 혹은 그 여자네 집처럼 한 사람이 담긴 아련한 장소를 떠올리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시간을 안타까이 매만지듯 이 글을 읽었다.
"다락방이 있는 그 집에 대한 기억도 요즈음엔 거의 흐려져 버렸다. 그러나 가끔 글을 쓸 때나 독서를 할 때면 그날 밤 창문에 비추던 녹색 불빛과 한밤중에 추위에 곱은 손을 비비면서 사랑에 취해 들길을 돌던 나 자신의 발소리가 웬일인지 문득 생각나곤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드문 일이지만, 슬픈 고독에 매달려서 어쩔 수 없이 추억에 잠기거나 할 때면 어쩐지 저쪽에서도 나를 생각하고 있겠지, 기다리고 있어 주겠지, 그리하여 두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이런 생각이 조금씩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것이다.
미슈시,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그대는 어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