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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 도둑
수잔 올린 지음, 김영신 외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난초도둑>은 영화를 통해 먼저 알게 되었다. [어댑테이션]은 수잔 올린의 <난초도둑>에서 출발한 영화다. '출발한' 영화라고 한 것은, 실은 영화의 내용이 책과는 거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관계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책의 저자인 수잔 올린을 모욕하고 우습게 만드는 장면이 많아서 이게 정말 원작이 있는 책이며 수잔 올란이 실존인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정말로 <난초도둑>과 수잔 올린이 이 세상에 나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경악스러웠고 덕분에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보통은 난초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다큐라고 해야 하나 르포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이런 식의 책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가 아니었더라면 보지 않았을 책이었다.
수잔 올린은 성공한 기자다. 그는 무엇에 열정적으로 빠져드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다. 이성적이지만 감칠맛 나는 글을 쓸 수 있을 정도의 감수성도 갖추고 있는 보통의 도시인이다. 그는 어느날 난초를 훔치려다 기소된 사람들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게 되고 그를 취재하기 위해 마이애미로 날아간다. 이 책은 난초와 난초에 미친 사람들, 그리고 마이애미 파카하치 지구(난초가 많이 자라는 늪지대)에 대한 수잔 올린의 조사와 기록과 감상을 담은 책이다.
무언가에 미친 사람들. 그게 난초가 되었든 무엇이든 간에, 이런 사람들을 작가는 이해하지 못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뭔가에 집착하는 일이 거의 없는 편이고, 실은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다(예를 들어, 연애의 경우 집착하지 않는 게 사는 데 편하다).
수잔 올린은 그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세계가 궁금했고 그렇기 때문에 난초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이 책에는 여러 명의 난초 중독자들이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단연 라로슈다. 라로슈라는 인물은 난초에 중독되기 전에는 거북이, 화석, 보석세공술, 거울에 중독된 바 있었다. 요컨대 무엇인가에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다. 게다가 성격은 자기중심적이며, 언제나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면서도 도덕적으로 그것을 보충할만한 기이한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뉴욕에 살면서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는 수잔 올린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아주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데는 이렇게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종류의 세상에 대한 매혹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수잔 올린이 취재를 시작하면서 가장 보고싶어했던 난초는 속칭 유령난초라고 불리는 폴리리자 린데니다. 이건 라로슈가 파카하치 지구에서 불법으로 채취한 난초 중 하나이며, 꽃이 핀 상태를 보는 게 매우 어렵다고 알려져 있고 인공적으로 재배하기도 불가능한 종류의 난초다. 잎이 없이 뿌리와 줄기, 꽃으로만 이루어진 이 난초는 꽃이 피지 않았을 때는 가늘게 얽힌 뿌리만 나무둥치를 붙잡고 있을 뿐이다. 책이 끝날 때까지 올린은 결국 이 난초를 보지 못한다. 이름처럼, 유령같은 존재로 남은 것이다. 어쩌면 실제로 본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 난초가 매력적인 이유는 아름다운 외형 때문이 아니라 쉽게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나에게는 찾아오지 않는 열정처럼. 궁금하고 매력적이고 끌리기는 그것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유지되는 감정이다.
책에는 많은 종류의 난초가 등장하지만 난초에 문외한이라고 해서 재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올린이 이 책을 쓰면서 난초에 대해 알게 되었듯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난초에 대해 배우게 된다. 단지 난초만이 아니라 난초중독 현상, 난초중독의 역사, 그리고 미국에서 난초가 어떻게 유행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책의 또 하나의 주인공인 마이애미 파카하치 지구와 세미놀 인디언에 대한 부분도 무척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다. 이렇게 난초를 중심으로, 그리고 라로슈를 중심으로 해서 실로 여러가지 층위를 얹혀 책을 구성했기 때문에 풍부한 읽을거리가 보장된다.